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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26화


그의 웃음은 흐뭇해하기도 하고, 자애롭기까지 한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연신 미소를 배어 물며 막대를 휘젓던 감송은 지그시 문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있으면 피차 피곤하니 들어오시게.”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감송이 할 일 없이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아닐 터. 고요한 적막을 깨고 있는 것은 끓는 물소리와 막대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뿐이었다. 감송은 상대가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오면 상대하는 것이고, 이대로 대치 상황이 지속되면 대치만 할뿐이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검은 야행 복 차림을 한 사내가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문가에 서 있었다. 복면인의 피부가 드러난 것은 오직 손과 눈가뿐이었다.

“…….”

두 사람이 침묵하는 가운데 휘젓던 막대를 꺼낸 감송은 그것을 허공에다 한 번 휘둘러 덕지덕지 달라붙은 끈적한 내용물을 씻어내었다. 그러자 복면인의 몸이 움찔하였다. 그것을 본 감송은 예의 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밤손님답게 간이 작구먼. 허허허!”

자신이 지레 겁을 먹었었다는 사실이 수치심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심하게 변조된 듯한 거북한 음성이 분노를 내포한 채 흘러나왔다.

“감송. 죽는다.”

복면인은 어느 정도의 반응을 예상하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감송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허허, 날 안다니 다행이군. 내 별호는 독살(毒殺)이네. 기억해두게.”

복면인이 은근히 불안감을 느낄 찰나 갑자기 감송이 안면을 싹 바꾸었다.

“적어도 누구에게 죽어야 하는지는 알아야 덜 억울할 게 아닌가?”

스팟!

짧은 옷깃 스치는 소리와 함께 감송의 신형이 곧은 직선으로 뻗어갔다. 복면인은 그의 선제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상황이 안 좋았다. 자신이 당황해서 몸이 움츠러진 때에 상대가 공격한 것이었다. 그는 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감송의 공격을 피한 뒤 왼손을 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감송의 막대기가 복면인의 허리를 찔러 들어왔다.

‘허억?’

헛바람을 들이킨 복면인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이를 악물었다.

푹!

“울컥!”

복면인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복면이 입을 가린 탓에 흘러나오는 것은 미미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살을 내주었다면 무언가 단단히 준비한 게 있을 터. 복면인은 갈비뼈가 아작 나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곧추세우고 근접한 상태에서 10성 공력을 내뿜었다. 반탄지기. 그러나 보통의 반탄지기가 아닌 살인 강기라 불리는 혈벽살강(血壁殺剛)이었다. 찰나지간 핏빛 강기가 터져 나오자 감송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복면인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미리 준비해 온 가루를 약탕실 안으로 뿌렸다. 내공으로 감싸서 그런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으응?”

무슨 생각으로 이 상황에서 저러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감송은 붉은색 가루가 약탕실 내부에서 퍽! 하고 터지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야 머리를 회전시킬 수 있었다.

“이놈! 무슨 수작이더냐!”

감송은 청뇨로명단을 망칠 수 없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그 가루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숨을 멈춘 뒤, 내공을 사용해 그 가루들을 손안으로 끌어모았다. 두 손을 둥글게 말아가며 가루들을 손안으로 갈무리한 감송은 밖으로 나와 뿌려냈다.

“으음, 그 놈이 도망가기 위해서 이런 수법을 쓸 줄이야. 한방 먹었군.”

그가 서 있는 자리 바로 옆에 흥건한 핏자국이 보였다. 따라간다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를 죽여봤자 입막음으로는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의외로 감송은 자신의 일을 쉽게 털어낸 후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맡은 바를 소홀히 할 수 없지. 허허허!”

감송이 웃으며 약탕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그때, 젖 먹던 힘까지 사용해 도망쳐 나왔던 복면인은 상대가 쫓아오질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쓰러지듯 멈추었다.

“우욱! 제길!”

쓰러질 때 몸이 뒤틀린 탓인지 감송에게 다쳤던 옆구리가 부서질 듯 쑤셔왔다. 복면인은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품안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다 입가까지 복면을 벗고, 하얀 단환을 꿀꺽 삼켰다. 그것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곧 반응이 왔다. 몸 안이 시원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복면인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약왕전은 의술을 추종하는지라 주위의 경비가 소홀했다. 환자들이나 의원들이 몰려있는 약전 부근만 빼고 말이다. 그에게 행운이 따라주려는지,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약전 부근과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다친 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렵한 몸놀림을 보이며 여러 개의 담들을 휙휙, 넘어갔다.

‘너무 방심했다. 지나간 명성이라 생각하여 도발에 순순히 넘어간 것이었는데 너무 자만심이 컸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친 사람이라는 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불안정하게 기울어지기를 반복하다 끝내 바닥에 내려서야만 했다. 복면인은 거친 숨을 토해낼 때마다 거센 통증을 느끼며 전방을 주시했다. 순간 그의 눈에 안도의 물결이 흘렀다.

‘헉헉, 다행이 바로 앞에서 진기가 고갈되었군.’

복면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담을 넘고 자신의 방으로 흘러들어갔다. 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에 무지한 것들이라고 속으로 욕했던 자들이 의외로 이런 때에 도움이 될 줄 그가 상상이라도 해봤겠는가? 아무튼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복면인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고갈된 진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간 그는 다행스럽게도 진기가 엉켜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까 전에는 무언가 이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공이 고갈돼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었다.

운기조식을 무사히 끝마친 복면인은 조심스레 상의를 벗어서 감송에게 당한 옆구리의 상처를 살폈다. 한눈에 동전 크기의 상처가 들어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관통 당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으나 그에 비해 장기는 멀쩡했다. 복면인은 정말로 자신에게 운이 따라주었다고 생각했다.

“감송. 날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옆구리의 상처를 본격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복면인은 채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이상함을 느꼈다. 콧속이 뜨뜻했던 것이다. 곧이어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이 비록 복면에 가려 보이질 않았으나 당사자가 못 느낄 리 없었다. 복면인은 갑자기 가슴속에서 묵직한 그 무언가가 뚫고 올라옴을 감지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하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푸헉! 쿨럭! 커어어! 웩!”

한 움큼의 검은 핏물이 그의 입안에서 튀어나와 바닥을 적셨다.

치이이이! 치익!

타들어 가는 소리. 피가 바닥을 적셨다고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 리 없었다. 복면인은 찢어질 듯 동공을 확대시켰다.

‘독?’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피를 쏟아냈다.

“우웩! 웩!”

어느새 그의 칠공에서 피가 넘쳐나고 있었으나 감각은 이미 죽어있었다. 그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허나, 부질없는 짓. 그의 실낱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눈앞이 흐려지더니 종래에는 시야가 차단되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희미해지는 그의 뇌리 속에서 무언가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렇게 말했다.

-내 별호는 독살(毒殺)이네. 기억해두게. 적어도 누구에게 죽어야 하는지는 알아야 덜 억울할 게 아닌가?

‘독살, 독…….’

풀썩!

그는 그렇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의 숨결이 점점 희미해져 갈 때쯤, 한 사내가 소리도 없이 방안에 나타났다. 그는 복면인의 몸 상태를 간단히 점검해 본 뒤 들쳐업었다.

“운이 좋으면 살릴 수 있겠군.”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이내 종적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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