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60화
서장(序章).
그가 찾아온 것은 운명의 그날이었다.
“당신이 천마(天魔)시오?”
키는 8척에 달했으며 두 눈에 갈무리된 신광은 그가 가히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허나, 그렇다 하여 본 천마가 위축됨을 보여줄 리 만무한 법.
“그렇다. 본좌가 바로 마의 하늘이니라. 그러는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는 나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고수하던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치우(蚩尤)!”
3년 전.
어느새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생명들이 조심스레 그 날개를 펴고 약동하는 시기. 그러나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힘없는 듯한 목소리가 대청마루 위에 앉아있는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2년이라…….”
노인의 낮은 목소리는 거칠게 잠겨있었다. 무의미한 시선으로 그저 먼 산만을 바라보던 노인은 등 뒤의 미약한 인기척을 느끼곤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다 끝난 게냐?”
소연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공님. 언제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진심이 서려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차분하고 온화한 자태가 느껴졌다. 이제 그녀의 나이 14살. 다소 철없고 울기만 잘했던 그녀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훌쩍 커버린 것이었다. 감송은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허, 이 늙은이가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마누라 등살에서 벗어나겠느냐. 내 누누이 말했거늘 너 또한 참으로 끈질기구나.”
소연의 볼이 사르르 붉어졌다.
“사공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소녀 또한 부끄럽습니다.”
그러자 감송이 재빨리 일어났다.
“내 더 이상 말했다간 너의 그 부끄러움이 하늘을 찌르겠구나. 허허, 잠시 마누라를 떠나 있어 즐거웠건만 이젠 그것도 끝인가? 허허허.”
감송의 말대로 소연의 얼굴은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뒤에서 지금 상황을 다 엿듣고 있을 사부에게 민망했던 것이다.
“그럼, 소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끄러웠던 그녀는 경공을 사용해 도망치듯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감송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신형을 돌렸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키에 연자줏빛 경장을 입고 있는 민소희가 조용히 그를 반겼다. 그녀는 2년 전보다 오히려 더 젊어져있는 듯했는데, 아마도 소연 덕택에 피의 섭취량이 충분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소연이도 그렇지만 당신도 참 끈질기군요. 언제나 나를 들먹이며 같은 대답을 들려주니 말이에요.”
감송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뭐라고요?”
부인의 언성이 높아지자 찔끔한 감송은 급히 얼버무렸다.
“내가 뭐라고 했소? 그냥 그렇다는 게지.”
민소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젠 면역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작정한 그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소문주님에 관해 알아오신 것은 있나요?”
감송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약전주의 말로는 흔적을 찾아서 뒤를 봐주고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게 자세한 정보는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소.”
민소희 또한 어두운 기색을 보였다.
“아직도 우리를 경계하는 건가요?”
감송은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나마 소연을 제자로 맞아들여 끈을 이어놓긴 했지만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아. 역시 소문주님의 행방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는가?”
민소희는 자신의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전 같이 갈 수가 없어요.”
감송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밀려왔다.
“알고 있소. 소연이는 적어도 3-4년을 더 배워야 한다는 것을…….”
수긍하는 듯했지만 감송의 노안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민소희는 자신의 태도가 남편의 심경에 위해되는 일이 없도록 좋게 이야기를 끌어갔다.
“소문주님의 행적이 정확하다면 저도 따라가겠지만 아시다시피 그렇지도 못한 상황이잖아요. 더군다나 요새 교주 측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감송은 깜짝 놀랐다.
“아시었소?”
민소희의 얼굴에서 잠시 어두운 그늘이 걷혔다.
“그럼요. 제가 아무리 8할의 내공을 소실했어도 한때는 독살(毒殺)인 당신에 버금가는 위명을 떨쳤던 단묘(短猫)라고요. 요 근래에 기척을 죽인 자들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왔다갔다하지를 않나, 간간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색한 연기를 펴내지를 않나. 호호, 당장에 쳐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 상황이 분할 뿐이죠.”
어린아이의 손만큼 앙증맞은 그녀의 주먹이 심정을 대변하듯 으스러져라 쥐어졌다. 부인이 아직까지는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감송은 이제 이야기하기가 훨씬 편해졌다고 생각했다.
“좋소, 좋아. 당신을 염려하는 마음에 숨기려고 했지만 알고 있다니 지금 상황을 간추려 들려주겠소.”
민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감송의 말이 이어졌다.
“소문주께서 계실 때에는 언제나 멀리서 숨어 지켜보던 자들이 그분께서 나가시고 1달이 지나면서부터 우리들의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주시하기 시작했소. 그러나 섣불리 나서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지. 왜냐하면 청뇨로명단을 만들 때 내가 꽤 쓸만한 놈을 죽여놨기 때문이오. 실력을 알았으니 이곳의 거물급이 아닌 이상은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게야. 그런데 그들이 대놓고 나선다면 이곳 약전주의 시야에 걸릴 테고, 그럴싸한 변명을 댄다고 해도 꽤나 복잡하게 얽히겠지. 또한 나중에 가서 그 교주 놈의 비리가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후후, 모르긴 몰라도 강직한 부교주와 틀어질 게 뻔한 일.”
민소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냉소천에 대한 복수는 우리 문주님께서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질문의 요지는 방금 감송이 말했던 것처럼 교주와 부교주의 사이를 급격히 틀어지게 만들어 분열시키는 방법은 써먹지 않을 거냐는 것이었다. 이에 감송은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물론! 그 방법은 문주님께서 직접 쓰신 후 이곳을 독으로 물들여야 하오. 나와 당신은 문주님께 모든 비밀을 말씀드린 다음 잔혹한 복수극의 한 축을 맡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민소희는 남편이 너무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 문주님의 복수를 위해 수하인 그들이 밑거름을 미리 뿌려주면 오죽 좋으랴. 허나, 모든 복수는 문주님께서 직접 손을 쓰셔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니 어찌 그녀가 답답하지 않겠는가. 이럴 때 소문주님이라도 계셨다면 좋은 방도가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부인인 그녀로서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휴우, 좋아요. 상황이 이렇게 급박한데 그렇다면 이젠 어떻게 대처하실 거죠?”
감송은 잠시 침묵을 고수했다. 무슨 낌새를 느낀 것일까. 민소희의 주름진 눈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설마……, 결심하신 건가요?”
감송의 고개가 비장하게 끄덕여졌다. 그는 눈을 감고 나서야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그렇소. 이제 떠나야겠소.”
표정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민소희의 음성은 차분했다.
“시기는 언제인가요?”
“일주일 뒤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