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65화
저녁 식사를 마친 감송은 언제나 그렇듯 마루에 나와 앉아 물끄러미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눈빛이 전과는 달리 무언가 갈구하는 듯했다.
“으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군.”
풀리지 않는 의혹을 차마 떨쳐낼 수 없었음인가? 비록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떠나기에 앞서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불안감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나는 그러한 종류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고역은 없을 것이다.
‘어찌 눈매만이 낯익을까? 마치, 복면을 했을 때 본듯한 눈매처럼…….’
갑자기 감송의 눈이 커졌다.
“복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친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허나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만큼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녀석이었단 말인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이 감송의 암수에 당하고도? 허!”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감송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분명히 죽었을 거라 자신했었는데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때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놈이 그 상태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누군가가 뒤에서 조력을 해주는 자가 있다는 소리다. 그놈이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얼마 못 갔을 것이 분명한데 그 정도의 독상을 치료해줄 인물은……. 설마, 역천!’
자신이 생각해 놓고도 불길했다. 아니, 그냥 불길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역천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호랑이 아가리에 몸을 던지는 형국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감송의 머리에서 복잡하고도 불안한 심리가 뒤엉키고 있을 때 방안에서 민소희가 조용히 나왔다.
“무슨 일이죠? 분명 복면이라고 소리친 것 같았는데.”
그제야 현실세계로 돌아온 감송은 굳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아내를 다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들어갑시다.”
민소희는 영문을 몰랐지만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준다기에 군말 없이 따라 들어갔다. 남편을 상석에 앉힌 그녀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 사이 좀 더 생각을 가다듬은 감송은 차마 해주기 어려운 말을 꺼내야만 했다.
“내가 2년 전에 소문주님께서 단환을 만드실 때 도와주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오.”
민소희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이에요.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요?”
감송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리고 그때 내가 복면을 쓴 놈을 처치했다는 말도 했을 것이오.”
남편의 이야기에 민소희는 흠칫했다. 지금에 와서 그 얘기가 다시 거두된다는 것은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자를 놓치긴 했지만 분명히 당신의 암수에 당했다고 했는데 설마 살아있다는 건가요?”
암석처럼 단단히 굳어있던 감송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그렇소.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문제는 그놈의 신분이지.”
“신분?”
의아해하는 부인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자신조차도 믿기 힘든 사실을 말해주기에 앞서 한차례 호흡을 골랐다.
“당신이 믿기 힘들 테지만 그놈의 신분은 역천의 둘째 제자라오.”
민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에서 드러난 표정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짐작할 따름이었다. 부릅뜬 눈으로 남편에게 무언의 확답을 얻어낸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곧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당신이 잘못 안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또 그가 진짜로 그 복면인이었다고 해도 약전주와 관련이 있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또한 약전주는 본 문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소문주님의 사부인데 그가 배후자라고는…….”
감송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믿기 힘들단 말이겠지?”
민소희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러나 감송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놈이 내 암습에 당했을 때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줘 봤자 일각. 그 상태에서 내공은 점점 소실될 것이고 발악을 할수록 독기는 점점 온몸으로 퍼질 것은 자명한 일. 더군다나 이곳 약왕전이 좀 넓소? 그렇다면 약왕전 내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그놈을 치료할 인간이 얼마나 있을지 생각해 보았소?”
민소희는 남편이 하고자 하는 진의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좋은 쪽으로 몰고 가고 싶었다.
“부전주도 있지 않을까요?”
감송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당치도 않은 소리. 시체 해부에 관해서 만큼은 인정하지만 내 독을 단시간 내에 치료할 만큼은 아니오.”
인정을 하듯 말없이 눈을 감았다 뜬 민소희는 차가워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역천이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대단히 크군요.”
“큰 것이 아니라 확실하오.”
감송은 확신에 찬 기색을 보였다. 민소희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기만 했다. 이는 앞으로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 전적으로 남편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 감송의 목소리가 적막해진 방안을 메꾸었다.
“일단 역천의 뜻대로 따라주는 척을 할 것이오. 그리고 나서 기회를 보아 탈출로를 찾겠소.”
민소희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일 역천이 교주와 끈이 연결되어 있다면 그들이 다시 나설 수도 있어요.”
그들이라 함은 예전에 자신들과 싸웠던 교주의 호위대인 흑혈이살이었다. 그 말에 감송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폈다.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오. 만일 교주와 손을 잡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다만 역천과 우리가…… 아니, 본 문인 만독문과 공존해서는 안될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것이 내 추측일 뿐이오.”
부부가 같이 오랜 생활을 하다 보면 습관이나 일상생활들이 닮아간다고 했는데 민소희가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방금 전 감송과 같이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가 금세 폈다.
“혹시…….”
감송은 급히 물어보았다.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라도 있소?”
민소희는 자신감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제 추측일 따름이지만 자신의 무공에 자존심이 강한 역천이 본 문의 신공을 제자이신 소문주님께서 익히시자 자존심이 깨져서 그렇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어요.”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던 감송은 무엇 때문인지 이내 그 생각을 바꾸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대대로 암흑마교 사전(四傳) 중에 약왕전과 독전은 서로 앙숙이었으니까. 그래, 그래서 역천이 독을 경시하고 증오해 우리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어! 내가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 가지 그럴듯한 대안이 나온다면 그것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절박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민소희의 추측대로 결론을 맺어버린 감송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장시간의 상의를 하다 자신의 부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럼, 이렇게 된 마당에 당신은 어찌할 것이오.”
잠시 망설이던 민소희는 고심해하는 얼굴빛이 역력한 얼굴로 겨우 말을 꺼냈다.
“저 역시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말은 꺼냈어도 결론을 짓기가 어려운 듯했다. 그래서 감송은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허허, 어려워 말고 말해보시오. 같이 가겠다고 해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테니까.”
민소희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다 결국에는 입을 열었다.
“동생인 묘희(苗希)에게 가볼 생각이에요.”
그녀의 우려대로 간만에 웃음을 떠올린 감송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다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