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68화
화정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안고 있는 작은 주인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녀로서는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내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소연은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감송이 떠나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밤새 잠을 설친 그녀는 푸석푸석한 얼굴을 대충 정돈한 뒤 사부님과 함께 조용히 배웅을 나갔다.
“무사히 도착하세요.”
가벼운 짐 꾸러미만 어깨에 메고 있었던 감송은 가볍게 소연의 인사를 받았다.
“허허, 알겠다. 너도 그동안 할머니를 잘 모셔라.”
옆에 서있던 민소희는 걱정 말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신도 참. 소연이가 어련히 잘 하려고요.”
“그런가? 허허! 알겠소. 내 빨리 가서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리다.”
위험한 길을 떠나는 사람과 배웅하는 사람치고는 대단히 담담한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여기에서 연륜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인데 연륜을 따지기에도 부족했던 소연은 걱정 반 두려움 반이 섞여 유난히 튀어 보였다. 그것을 느낀 감송은 안심해도 된다는 얼굴로 소연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 나갔다. 앞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선 그는 의미 없이 하는 행동처럼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린 후 무언가 뿌리듯 손을 휘젓고 난 뒤에야 다시 발길을 옮겼고, 그의 행동이 끝나는 시점에서 어디에선가 무거운 것이 쿵 하고 떨어졌다.
“좀 쉬게나. 아니, 그동안 수고했으니 영원히 쉬게. 허허.”
아마도 감시자를 제거한 듯싶었다. 그 후로 바삐 신형을 옮겨 약재 창고로 걸어간 그는 대여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끼어들었다.
“제가 좀 늦었지요?”
2년 전 새로 바뀐 창고지기는 선두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감송을 대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그걸 알면 빨리빨리 왔어야지! 자네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야 쓰겠어?”
감송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간만에 이런 일을 맞아서 그만 늦었습니다.”
창고지기는 어느 정도 위신이 섰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추궁은 없었다.
“자자, 그건 넘어가고. 이제 모두들 모였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세들. 이번에 우리가 캐와야 할 약재들은 비교적 고급 약재에 해당하는 것들일세. 그것들은 본 암흑마교 내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은 특별히 전주님께서 영기(靈氣)가 강한 산을 찾아 캐오라는 명이 계셨으니 아무 곳에나 캐왔다간 큰일이 날 거라는 것을 명심들 하게. 알겠는가?”
약초꾼들은 저마다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송은 같이 끄덕이며 아직 틀어진 계획이 없다는 것에 만족해했다.
‘그동안 나를 감시하던 두 놈들은 하루에 여섯 시진씩 번갈아 가며 교대를 했는데, 내가 두 식경 전에 교대한 녀석을 죽였으므로 다른 놈이 그 사실을 통보하려면 적어도 여섯 시진이 지난 후이다. 으음, 이렇게 냉소천의 꼬리는 일단 끊어놨지만 앞으로 역천의 꼬리는 어떻게 끊을지 좀 더 두고 봐야겠군.’
“이봐, 늙은 신참!”
누구를 지칭하는지 몰랐던 감송은 계속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옆 사람이 자신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나서야 늙은 신참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창고지기는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왜 긴 왜야! 잘 알아들었어?”
감송은 대답하기에 앞서 저런 놈에게까지 굽실거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다고 스치듯 생각했다.
“허허, 물론이지요. 영기가 충만한 산에서 약초를 캐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딴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여 못 들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알아들은 것 같자 창고지기는 헛기침을 한 후 어서 떠나라고 명했다. 그러자 감송을 합쳐 총 다섯 명인 약초꾼들은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이는 바쁜 감송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보시오. 좀 빨리 가면 안 되겠소?”
그러자 선두의 사내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거 참. 남는 게 시간인데 빨리간들 뭐 달라지는 거라도 있겠소?”
그들 딴에는 그도 그랬다. 개중에는 딸린 식구가 몇몇 있는지라 빨리 갈 명분이 있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몇십 번의 길을 수시로 떠났던 경력의 그들이 매번 서둘러 돌아오고 싶겠는가?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마누라와 자식 등살에서 벗어나겠는가. 그들의 생각을 어렴풋이 나마 헤아린 감송은 소매에서 동전 마흔 냥을 꺼냈다.
“실은 내가 빨리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아주 급하다네. 밖에 위급한 친동생이 있는데 이번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전갈이 와서 빨리 가봐야 해. 약소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하고 서둘러들 주세나.”
약초꾼들은 이게 웬 횡재냐는 듯 서둘러 받아들었다. 그들은 대번에 만족해져 그러겠다고 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송에게는 여전히 느리게만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래도 벌어 놓은 여섯 시진을 그대로 까먹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성의를 보여 갈 길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다시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 새삼 마차가 그리워지는 감송이었다. 결국 다섯 시진에 걸쳐 검문소에 다다른 그들은 험악하게 생긴 검시원에게 다다를 수 있었다.
“허가증(許可證).”
간단한 말과 함께 손을 내민 검시원은 선두의 약초꾼에게 붉은 인장이 찍힌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암흑마교 내에서는 신분의 한계만큼 아무 곳에나 돌아다녀도 되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는 일이라면 그에 합당한 사유와 소속 기관의 허가증이 있어야만 했다. 물론, 고위급은 그런 절차가 필요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고위급이 아닌 관계로 이렇게 허가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인을 마친 검시원은 귀찮은 듯 빨리 가보라는 표시를 했다. 굽실거린 약초꾼들은 줄을 맞춰 차례차례 검문소를 지나갔다.
“휘유, 나는 이곳을 지나칠 때면 언제나 긴장이 된다니까? 자네는 안 그런가?”
선두 사내의 물음에 약간 뒤처졌던 사내가 얼른 맞장구를 쳐줬다.
“말도 말게. 나는 저 검시관이 제일 무섭다니까?”
그들의 대화가 터져 나오자 저마다 하나둘씩 떠들기에 바빴다. 그리고 감송은 이들 중 역천의 끄나풀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 중으로 찾지 못한다면 어쩔 수가 없지.’
감송은 말없이 조용히 그들을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이 못내 걸렸는지 처음 돈을 받아든 선두의 사내가 넌지시 물었다.
“이보슈, 영감님.”
“무슨 일인가.”
감송은 아까부터 위급한 동생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일부러 초조함을 내비쳤기 때문에 급한 모습이 자연스레 묻어 나왔다. 사내의 이야기로 인해 모두들 잠깐 멈춰 섰다. 선두의 사내는 약간 간사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아까 돈을 좀 받았지만 그리 나쁜 놈은 아니오.”
감송은 자연스레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네.”
그러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풀었다.
“헤헤, 그러니까 우리가 동생을 찾아가기 위해 이렇게 나선 영감님께 돈을 받았는데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 무슨 소리긴 뭐가 무슨 소리예요. 보아하니 약초를 캔다고 우리와 같이 갔다가 동생을 만나보고 되돌아올 모양인데 기왕이면 서로 좋고 좋은 게 좋지 않겠소?”
어렴풋이 이 사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좀 꼬아서 말한 덕에 헷갈렸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감송은 방심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사내는 감송의 말을 그대로 끊어버렸다.
“바로 그거요!”
뭐가 바로 그렇다는 건지 확실히는 몰랐지만 감송은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영감님은 원래의 목적대로 동생분을 만나고 오시란 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영감님의 약초분을 대신 캐줄 테니까.”
감송은 내심 당황했다. 역천의 끄나풀이 있어 자신과 같이 동행할 줄 알았는데 이들의 눈치를 보니 그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접고 한번 더 운을 띄웠다.
“정말 그래주겠는가? 내 그렇게만 해준다면…….”
“알겠소! 내 다 알겠소! 헤헤, 영감님은 그저 약간의 수고비만 주시면 되는 것이오.”
가만히 간사한 사내의 눈빛을 들여다본 감송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자네들도 그러한가?”
모두들 기분 좋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물론이오!”
돈이 들어오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으리오. 감송조차 만족의 미소를 띄웠다. 그는 품속에서 어린애 주먹만한 은덩어리를 꺼낸 후 작은 손칼로 정확히 4등분했다. 그러자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비록 나누긴 했지만 아까 받은 금액도 적지 않은 금액인데 각기 은자로 두세 냥 정도가 다시 생길 것 같자 횡재하기에 앞서 은근히 두렵기까지 했다. 그 증거로 말을 꺼냈던 선두의 사내가 쉬이 받으려 하지 않았다.
“저, 정말로 이것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오?”
감송도 뒤늦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동안 내가 꾸준히 모아온 돈들일세. 그러나 이것들이 내 동생보다 귀하겠는가? 적어도 아우가 떠나는 모습을 봐줘야 하는 게 형님으로서 도리가 아니겠는가. 내 이 정도로 급하니 제발 좀 잘 처리해주게.”
서로들 눈치를 보던 약초꾼들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어오자 감송에게 미안한 감이 있으면서도 군말 없이 은덩이들을 집어갔다. 사실 무단이탈이 얼마나 중죄인지는 그들도 알고 있었기에 그 정도 감수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험! 영감님의 우애가 그토록 깊은 줄 몰랐소. 영감님은 정말 착하신 분이오. 그런 영감님에게 이렇게 돈을 받아 미안하긴 하지만 대신 일 처리는 깨끗이 해주겠소. 그러니 마음 놓고 갔다 오시오.”
감송은 일일이 약초꾼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럼 나는 서둘러 가봐야겠네. 부디 잘들 해주게나.”
약초꾼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헤어졌다. 촌부처럼 엉거주춤 달려가던 감송은 그들과 멀어지게 되자 걸음을 멈추고 약초꾼들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허허, 나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네.”
그 말을 끝으로 감송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