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87화
“어찌된 일이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동천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깨닫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깨지고 박살나고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으으, 이것들을 다 내가 박살냈단 말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동천은 차마,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실토할 용기가 없었다.
‘차라리 확 도망쳐 버릴까? 저기 창문도 뚫렸겠다 저기로……응? 창문?’
창문을 본 순간 무언가 강렬한 사념(邪念)이 동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오, 3년 가뭄 끝에 쏟아져 내리는 시원한 빗줄기였다. 그것은 무지하고 가련한 자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늘님의 자애로움이었다. 그 하늘님의 구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동천은 갑자기 휘청거리더니 위태롭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고통스러운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아, 아주 무서운 놈이었어요.”
흠칫한 무사들은 황급히 동천을 지켜 서듯 에워싸며 물었다.
“침입자가 있었다는 겁니까?”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떨리는 손으로 망가진 창문을 가리켰다.
“저, 저곳으로…….”
“모두 추적한다!”
두 눈에 신광을 내뿜으며 여섯 명의 무사들이 창문을 통해 뛰쳐나갔다. 그리곤 삐익! 거리는 긴 피리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방 안에 남아있던 한 무사는 비실거리고 있는 동천을 조심스레 일으켜주었다.
“괜찮습니까?”
동천은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다소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예에…, 위험하긴 했지만 괜찮아요. 그보다 범인을 잡아야 하니까 어서 가보세요.”
무사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경고음이 울렸으니 제가 아니더라도 충분합니다. 그보다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에이 씨팔, 괜찮다는데 거참 말 많네. 확 조져버린 뒤 괴한이 다시 침입했었다고 해버릴까 보다.’
어쨌든 위기를 넘긴 동천은 일을 크게 확산시킬 생각이 없었다.
“운이 좋아 잘 피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다친 곳은 없어요. 다만 정신적으로 피곤할 뿐이지. 그래서 말인데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요.”
무사는 그 상황에서 어린놈이 얼마나 놀랐을까 싶어 측은지심이 일어났다. 그는 충분히 동천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도록 하죠. 하지만 이곳이 말이 아니니, 다른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혼자만 있으면 뭐든지 좋았다. 그래서 동천은 군말 없이 무사의 부축을 받고 건너편의 건물로 들어갔다. 아담한 방으로 안내된 동천은 밖에서 지키고 있겠다는 무사를 한사코 떼어낸 뒤 혼자 남아 음침한 미소를 뿌렸다.
“크크, 완전범죄! 이히히히히!”
아주아주 허점이 많은 범죄였지만 목격자가 없는 이상, 범인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끝끝내 우기기만 한다면 실현 불가능한 범죄는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심증만 갈 뿐이니까. 한번 터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리던 동천은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누군가가 급히 자신 쪽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인물은 도연이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표정 관리에 들어간 동천은 원기를 많이 소모한 사람처럼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다. 하늘이 내린 이 몸을 그 누가 앗아가겠느냐.”
그래도 멀쩡한 주군의 모습을 대하자 도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곁에 있어야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도연을 뒤따라온 중소구는 그 모습을 보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참나, 멀쩡하지 않은가?”
쳐다보기도 싫은 중소구가 등장하자 동천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동천은 뒤덮인 머리카락 사이로 중소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웃었다.
“……푸웁! 푸헤헤헤! 이히, 이히히히!”
동천의 비웃음에 심히 쪽팔려진 중소구는 시퍼렇게 멍이 든 왼쪽 눈을 급히 가렸다. 그는 붉어진 안색으로 대노해 소리쳤다.
“우, 웃지 마라 이놈아!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동천은 아픈 척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배꼽을 부여잡은 채 떼굴떼굴 구르다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일어났다.
“그게 어째서 제 탓이라는 거죠? 크크!”
그래도 웃음의 여파는 남아있었나 보다. 중소구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력만으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다.
‘아서라 중소구야. 아무리 화가 치민다 해도 어찌, 습격 당한 놈을 때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래, 대인인 네가 참아라.’
스스로 자신의 됨됨이를 위로한 그는 이때야말로 상대의 잘못을 너그럽게 포용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소구만 그렇게 생각하면 뭐 하는가. 동천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데.
“으히히히히!”
동천의 웃음소리는 대인 중소구를 점점 광인 중소구로 몰아가고 있었다.
“으으, 그만 웃어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도연은 큰일이 날 것만 같자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중소구를 달랬다.
“중 대인, 지금의 도련님은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비록, 도련님께서 잘못하시고 계시지만 대인께서 양보하시어 내일쯤 찾아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연이 예상했던 대로 중소구는 그러겠다고 승낙했다. 나가면서도 바득바득 이를 갈던 중소구는 문짝이 부서져라 닫고는 사라졌다.
“히히, 너도 그 자식 눈탱이 봤냐? 하이고 배야. 이히히히!”
도연은 도저히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살래살래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안정을 취하십시오. 몸에 해롭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배가 아파서 그만 웃으려고 했었다. 심호흡으로 호흡을 고른 동천은 마침내 웃음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휴우, 아주 웃겨서 죽는 줄 알았네. 근데 아까 그 인간이 뭐라고 지껄인 거냐?”
그 생각을 하면 자신도 웃기는지 도연은 소리 죽여 웃었다.
“오늘 새벽 주군께서는 심한 악몽에 시달리셨는데, 중 대인께서는 그런 주군을 깨우시려다 눈자위를 얻어맞으신 겁니다. 그 뒤로 끙끙 앓으시기에 이곳 의원에게 보이러 갔더니 잘못하면 안구가 터질 뻔했다고 하더군요. 여간해선 그럴 수가 없는데 아마도 주군께서 때리실 때 무의식적으로 내공을 사용하셨나 봅니다.”
듣고 난 동천은 정말 아깝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퉁겼다.
“캬아! 그럴 줄 알았으면 허리띠를 풀어놓고 자는 건데.”
“예?”
동천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네 머리로 깊게 파고들 것은 없고 나가서 밥이나 가져오라고 해. 이것들은 때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식사를 안 줘?”
주군의 성격상 식사를 마치면, 그만큼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도연은 사람을 불러 아침 식사를 시켰다. 잠시 후 배불리 식사를 마친 동천은 그사이 도연이 물고 온 소식에 쩝쩝거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안 잡혔다고?”
“예, 주군.”
동천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있지도 않은 인간을 찾아 헤매는 모습들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도연은 그런 주군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동천이 사실대로 말해줄 턱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대 황룡세가도 고작 한 명의 괴한에게는 별수 없다고 생각해서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도연은 긍정을 표했다.
“작정하고 들어온 자이니 도망치는 것 또한 작정했다면 쫓을 수가 없지요.”
멋진 말이었다. 만약 중소구가 옆에서 들었다면 ‘옳거니!’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밴댕이 소갈딱지인 동천은 도연이 자신보다 멋있는 게 싫었다. 싫은 것을 뛰어넘어 배알이 꼴리고 뒤틀리기까지 했다.
“작정하고 튀면 아무도 못 막는다고? 지랄하고 있네. 넌 황룡세가가 그렇게 만만한 곳인 줄 알아? 대 황룡세가가 어떤 곳인데, 바로 오련 중 최상의 지위를 자랑하는 곳이야. 그런 하류 잡배는 금방 잡힐 테니까 두고 보라고. 알았어? 이걸 확 그냥!”
“…….”
도연이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해하는 가운데 황룡의사청(黃龍議事廳)에 모인 황룡세가의 중추들은 심각한 내용의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