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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89화


“…저기요.”

문을 두드린 사람은 수줍어하는 도연 또래의 소녀였다. 당연한 거겠지만 도연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말씀하시지요.”

말하기에 앞서 도연의 어깨 너머로 잠시 살펴보던 추연은 이내 동천을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동 공자님.”

다소 허술하게 눈앞을 가리고 있었던 동천은 급히 머리카락을 손질한 후 마음에도 없는 예의를 차려야 했다.

“아니, 네가 여긴 어떻게 찾아왔느냐?”

자신이 너무 반가워했다고 생각한 추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라 아가씨께서 점심을 대접하시고 싶다고 하셔서요.”

동천의 면상은 대번에 일그러졌다.

‘윽! 그년이 또 뭣 땜시 이 몸을…….’

추연은 대답이 없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얼른 정신을 차린 동천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본 공자는 생각이 없구나.”

그러자 추연은 부끄러워하던 것을 거두고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안 돼요. 아가씨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자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도연은 동천 쪽으로 다가가려는 추연을 막아섰다.

“도련님께서 생각이 없으시다 하니 그만 나가주시지요.”

“하지만…….”

동천은 추연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자신이 안 가면 미미 성격에 얼마나 들볶겠는가. 다시는 그 호랑이 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옛 애인(?)의 불행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동천은 그 둘 사이로 끼어들어가 갔다.

“됐다. 마침 식사 때도 되었으니 같이 가주마.”

대번에 환해진 추연은 감사에 감사를 거듭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용연각으로 들어가게 된 동천은 어쩐 일인지 몸소 마중 나와 반갑게 맞이하는 황룡미미를 대할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동천은 살짝 목례를 취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호, 별 말씀을. 헌데, 같이 오신 분은…….”

도연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도련님을 보필하고 있는 도연이라고 합니다.”

하인이라고 하자 황룡미미는 도연이 무안할 정도로 신경을 꺼버렸다. 그녀는 동천의 곁으로 다가가 친근하게 대했다.

“사실 그때 제가 무례를 범한 것 같아, 오늘 이렇게 사과를 드릴 겸 식사나 같이 하자고 부른 거예요.”

동천은 그러시냐고 대답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 잘못은 아네?’

“하하, 그렇다면 비밀이 많은 저를 용서해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황룡미미는 하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웃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어요. 호호호!”

그녀는 입술을 가리는 척 손을 들어 올리며 작은 미풍을 동천의 얼굴에다 뿌렸다. 바람으로 동천의 진면목을 확인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도연의 손날이 그녀의 미풍을 날카롭게 베어버렸다. 멋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란 동천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무, 뭐야?”

황룡미미를 응시하던 도연은 곧이어 주군에게 사과를 올렸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날파리가 스치기에 잠시 손을 썼습니다.”

남들의 눈치가 있었던 동천은 화도 못 내고 억지로 대범한 척을 해야 했다.

“괜찮다. 숙녀 분들을 위해서 그랬을 거라고 믿겠다.”

황룡미미는 다소 굳은 얼굴로 도연을 주시했다.

‘이 자…….’

그러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호호, 본녀도 때마침 그것이 신경 쓰였었는데 처리해주어서 고맙구나.”

가식적인 황룡미미의 칭찬에 도연은 간단히 대꾸했다.

“아닙니다. 실은 저도 신경이 쓰였거든요.”

의미심장한 대답에 눈 꼬리를 파르르 떨던 황룡미미는 말없이 내실로 들어갔다. 그것을 본 동천은 도연의 쓸데없는 행동에 좋던 분위기가 다 망쳐졌다고 내심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모두들 안으로 들어가자 황룡미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유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화를 내며 들어갔으면서도 순식간에 다시 웃어대는 그녀의 모습은 동천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역시 무서운 년이라고 생각했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황룡미미가 권한 자리에 앉은 동천은 따로 할 말이 없어 딱딱한 자세로 있다가 음식들이 차려지자 꿀꺽 군침을 삼켰다.

“꼭 며칠 굶으신 듯 하군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동천은 체통을 유지했다.

“하하,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차려지는 음식들이 너무도 빛깔이 고와 잠시 넋을 잃었던 겁니다.”

황룡미미는 다 아는데 무슨 헛소리냐는 시선으로 동천을 주시했다. 동천은 찔끔했지만 밀고 나간걸 지금에 와서 회수할 수도 없기에 대신 다른 화제를 일으켰다.

“듣기론 금원세가의 금장호님과 연인 사이라고 하던데 저와 이렇게 식사를 하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황룡미미의 뒤에서 시립해 있던 추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에 한 손을 얹었다.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아아, 저 공자님은 정말로 2년 전의 이야기밖에 모르는구나. 황금세가의 그 금 공자님이 아가씨와 서먹해진지는 벌써 오래전의 일인데.’

눈치가 빨랐던 동천은 추연의 행동과 황룡미미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 꺼내지 말았어야 할 화제를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에, 그러니까. 하하.”

황룡미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설프게 웃어대는 동천에게 싸늘히 말했다.

“난 강자를 사랑해요.”

동천은 내심 반발적으로 소리쳤다.

‘난 약자를 사랑한다 이년아!’

사랑하긴 사랑했다. 동천이 사랑 표현을 어떻게 해주느냐가 문제였지만. 어쨌든 황룡미미는 동천이 가만히 있자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금 공작께서는 저를 충족시켜줄 만큼 강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잠시 자숙의 기회를 갖자고 제가 먼저 제의를 했더니, 금 공작도 흔쾌히 허락을 하시더군요.”

동천은 되도록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일이……. 하지만 잘 생각하신 겁니다. 성격이 맞지 않으면 서로에게 불행이니까.”

동천은 정말 잘 생각한 거라고 칭찬했다. 미미가 아니라 금장호에게 말이다.

‘금장화, 잘 생각했다. 저년은 남자의 정기를 쪽쪽 빨아먹을 년이야. 넌 정말 탁월한 선택을 한 거라구.’

황룡미미는 얕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알게 모르게 진땀을 뺐던 동천은 황룡미미가 웃자 자신도 얼른 마무리 지었다.

“저야말로 쓸데없는 화제를 거론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호호, 말씀도 잘하셔라.”

다시 화기애애해진 두 남녀는 식사가 끝나는 내내 가식적인 웃음을 주고받았다. 눈앞에 풍족한 음식들을 놔두고 고작 한 공기만을 깨작(?)거린 동천은 그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는 도연이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하하,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 역시 깔끔하게 입가를 닦고 생긋 웃었다.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군요.”

동천은 내심 소리쳤다.

‘이년아! 방금 잘 드셨다고 말했잖아!’

실현 불가능한 욕들을 씹어 삼킨 동천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맛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 그래도 끝까지 대접은 해야겠죠? 추연아, 가서 차를 좀 내오너라.”

“예, 아가씨.”

동천이 말릴 새도 없이 쪼르르 달려나간 추연은 잠시 후 차를 가져왔다.

“감나무 잎 차예요. 다소 떫긴 하지만 그래도 마실 만은 하답니다.”

황룡미미가 먼저 마시길 권하자 혹시, 독이라도 탔을까 싶어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던 동천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에 살짝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윽! 더럽게 쓰네. 이따위로 쓴 걸 왜 처먹는 거지?’

괜히 마셨다고 생각한 동천이었지만 표정만큼은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꽤 색다르군요. 잎 차는 처음 마셔봅니다.”

황룡미미는 생긋 웃었다.

“호호, 생소하면 어쩔까 걱정을 했었는데 좋게 봐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헌데…, 동 공자님은 어느 분께 무공을 사사 받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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