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9화
동천은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뒤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뒤통수가 미미하게 간질간질 거리는 듯한.. 즉,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그때, 동천의 머릿속에 갑자기 사부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사부님.
-뭐냐?
-단전의 용도는 알겠는데 신.. 신.. 뭐더라? 어쨌든 상단전의 용도는 어떻게 되나요?
-신정혈 말이냐? 으음.. 그것의 용도(用度)라..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예지력(豫知力)과 감지력(感知力)이 그것이다.
-예지력과 감지력이요? 그게 무슨 얘기예요?
-그건 말이다. 처음에 내가 말했듯이 상단전은 정신적인 능력을 말한다. 내가 우리 문파의 경공술은 도주용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예.
-사실 도주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너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음.. 속도(速度)가 아닐까요?
-흘흘흘.. 맞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으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라.. 에이, 잘 모르겠는데요?
-하하..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보호본능(自己保護本能)이라고 할 수 있다.
-예? 그게 무슨 뜻이예요?
-무슨 뜻이냐하면.. 아무리 경공술이 빠른 자라 할지라도 암살(暗殺)에는 배겨낼 인물이 없다는 뜻이다. 즉, 네가 말한 속도는 상대방의 위협을 알아챘을 때의 얘기이고 만약에 자객(刺客)이나, 너보다 훨씬 강한 인물이 낌새를 죽이고 네가 모르는 사이에 다가와서 너를 암살한다면 네가 꼽은 첫 번째인 속력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다.. 이거다. 알겠냐?
-아아..!
-그런데 만약에 상대가 너보다 강하더라도.. 암살을 준비하는 자객이더라도, 네가 미리 알아챌 수가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너의 장점인 경공술로 무사히 도망을 칠 수가 있겠지? 그런고로.. 상단전의 능력 중 하나인 감지력(感知力)은 상대가 아무리 낌새를 죽여도.. 암살자가 완전히 살기를 감춰도.. 시선(視線)이 너에게 집중이 되는 한 알아차릴 수가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은 크게 네 가지 범위를 들 수 있는데 일단 내공이 생성되면 일 갑자 이하로는 방원 이장(6M)까지 감지할 수가 있고, 일 갑자에서 삼 갑자 이하로는 방원 오장(15M)까지.. 삼 갑자에서 오 갑자 이하로는 방원 십장(30M)까지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인 사 단계는 귀영약문(鬼影藥門)이 창시된 이래로 아무도 십이 성 대성하지 못한, 꿈의 경지인 육 갑자 이상에서는 초오감력(超五感力)을 얻을 수가 있다고 전해진다.
-초오감력이요? 그게 무슨 능력이에요?
-쯧쯧! 성질이 꽤 급하구나. 네가 보채지 않아도 다 말해 줄 테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라. 초오감력(超五感力)이란 말 그대로 오감(시(視)·청(聽)·후(嗅)·미(味)·촉(觸))을 초월한 능력을 말한다. 그 능력에 관해서는 아직 네가 알 필요가 없다.(사실은 역천도 초오감력이 있다는 것만 알뿐 자세히는 모른다.) 그리고 상단전의 능력 중에 또 하나가 예지력인데, 이것은 아무리 정신적인 능력을 극대화 시킨다고 해도 체질에 안 맞는 사람은 예지력이 발생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귀문의 수많은 선대분들 중에서 예지력이 나타나신 분은 딱! 세 분밖에 없다고 전해진다. 이 능력은 말 그대로 미래(未來)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일단 이 능력이 나타난다면 처음에는 극히 짧은 미래를 볼 수가 있겠지만 수련을 통해서 점점 그 내용을 길게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의 내용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가는 우리 귀문이 지금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도 명심할 것은 너에게 어느 날 예지력이 불현듯 생길지라도 그 능력을 아무에게도 얘기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그리고.. 그 내용은 불확실한 내용을 동반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예측을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예지력이 나타났던 분들께서도 나중에는 예지력이 가끔 나타나도 그냥 무시하셨다고 한다….
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동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지력(豫知力).. 감지력(感知力).. 설마.. 지금의 느낌이 그런 건가? 그렇다면 지금 내 내공이 이십 년 안팎이니까… 이장 정도 안에서 어떤 새끼가 나를 보고 있다는 얘기인데… 나를 몰래 볼 사람은 아까 방광인가 탄광인가 뭔가 하는 늙은이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울렁거리던 느낌은 혹시, 예지력이 아닐까? 음..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니까..’
생각을 마친 동천은 급히 실행에 옮겼다.
“에이.. 그러나 그러면 안 되지. 나같이 착한 애가 그럴 수가 있겠어? 그럼, 내가 누구 아들인데..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아둬야겠다.”
동천은 말을 하면서도 긴가민가하면서 두 권의 책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은 후 옆에 제쳐 두었던 돌을 들어서 홈에 맞춰 끼운 다음에 다시 밀어 넣어 원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흠..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왜 안 오는 거야?”
이때 동굴의 어둑어둑한 곳에 숨어서 동천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항광은 내심 실소(失笑)를 터트렸다.
‘허허허.. 할아버지라고? 하하하하.. 천하의 만독노조 항광이 이름 모를 촌부로 전락되는 순간이군..’
항광이 내심 실소를 하고 있을 때 동천도 동천 나름대로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음.. 아닌가? 그럼 그렇지..! 나한테 예지력이니 감지력이 나타날 리가 있겠어? 아마, 사부님이 나한테 말했던 것은 뻥이었나 보다. 하지만 뻥이라도 어때? 나는 조금만 있으면 환골탈태를 할 수 있을 텐데.. 히히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째지는데?’
동천은 속으로 마음껏 기분을 낸 뒤 아래에 놓여있는 직사각형의 돌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한번 꺼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동천에게는 관심 밖의 물건이었다.
“아.. 심심해라. 그 할아범은 아직도 안 오고..”
‘윽, 하.. 할아범? 저런.. 고약한..!!’
할아버지에서 할아범으로 전락해버린 항광은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뛰쳐나간다면 자신이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들킬 수가 있었기 때문에 애써 분을 삭혔다.
항광이 혼자 속으로 지랄발광하고 있을 때 동천은 동굴 벽 뒤편에 거의 백여 권이나 차곡차곡 쌓여있던 책들을 하나둘씩 훑어 보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굉장히 어려운 책들인데? 그 할아버지 머리가 꽤 좋나 보네?”
동천이 놀람에 감탄사를 연발함에 따라 항광의 얼굴도 차츰 풀려갔다. 사실 거기에 쌓여있던 책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냉소천이 무공 실력이 녹슬지 말라고 심심할 때마다 보내준 희생양(?)들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모아둔 것들이었다.
‘역시 저 책들을 폼으로 모아두길 잘했어..’
그 책들 덕분에 할아범에서 다시 할아버지로 한 단계 상승하자 기분이 좋아진 항광의 생각이었다. 그때 동천은 또 다른 책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어? 호기심천국(好奇心天國)? 이게 무슨 책이지? 어디 보자. 여자들은 왜 밤을 그리워할까? 여자들은 왜 남자들보다 성 욕구가 강할까? 왜 남자들은 빨리 끓어오르고, 왜 여자들은 좀처럼 식어버리지 않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필독(必讀)하기 바란다…??”
잠시 훑어본 동천은 어른들이 말하던 빨간책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책을 그대로 땅바닥에다 내팽개쳤다. 동천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런 것에는 별 흥미(興味)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씨팔.. 이 늙은이 혹시 변태(變態) 아냐?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따위 꺼나 보고 있는 거야? 지금쯤이면 서지도(?) 못할 텐데? 하긴.. 내가 이해해 주자. 그 나이가 되면 옛날에 한창이었던 때가 어찌 그립지 않겠어? 휴.. 나는 커서라도 이런 것은 배우지 말아야지.”
지금 항광은 개거품을 물고 있었다.
‘이.. 이번에는 벼.. 변태(變態) 늙은이로 전락해… 버리다니.. 으으으으으….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그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의 경공술을 발휘해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동천은 그 후로도 꽤 많은 책들을 들춰서 읽었다.
“에이.. 이런 머리가 어지러운 책들도 계속 볼 게 못되네.. 그냥, 드러누워 자야겠다.”
그러고는 짐승의 가죽 위에 털썩! 하고 엎어져서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욱! 냄새..! 웩! 넘어올 거 같네… 내가 그 늙은이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더러울 것 같더라니만.. 이거 한 몇십 년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던 거 아냐..?”
동천이 그렇게 투덜대고 있을 때 동굴 밖에서 누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터벅.. 터벅..!”
소리의 근원을 찾아가던 동천은 곧 그게 누구의 발걸음인지 알 수가 있었다.
“어? 할아버지! 꽤 일찍 왔네요?”
항광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얼굴을 굳힌 채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싸가지 없는 꼬마 자식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
항광의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동천은 어색한 말투로 물어보았다.
“왜..! 왜 그.. 래.. 요?”
동천의 모습에 이러고 있으면 아무래도 자신이 쪼잔한 놈이 될 것 같기에 항광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음..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단환은 잘 흡수했느냐?”
그 말에 신이 난 동천은 한껏 떠들어댔다.
“예! 그거 효과가 아주! 아주우-! 좋던데요? 돌멩이들이 그냥 건드리기만 해도 팍! 하고, 부서지는 게.. 아, 내공이 이렇게나 좋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래도 자신이 만든 천약뇌수단이 효과가 아주 좋다는 동천의 말에 항광은 어느 정도 마음을 풀었다.
“흐음.. 좋다. 그렇다면 하룻동안 여기에서 계속 운기조식을 취한 다음에 환골탈태는 내일 시전하도록 하자.”
순간 동천은 다급함을 금치 못했다.
“예? 왜 오늘이 아니라 내일 한다는 거죠?”
동천은 소려산에서 사부가 기다릴 거라는 생각에 다급히 물어보았던 거지만 항광은 동천이 되도록이면 빨리 환골탈태가 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녀석, 꽤나 마음이 급한 녀석이군.”
‘이 씹탱구리 할아방구야! 내가 마음이 급하건 말건…!’
항광은 동천이 속으로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천천히 말을 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만약에 네가 지금 시술을 받는다면 네 몸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에?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항광은 동천의 질문에 자신이 평소에 즐겨 앉는 자리로 가서 앉은 다음 입을 뗐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렇지. 네가 잘 알아듣게 설명을 해 주마.”
항광의 말에 동천은 속으로 내가 못 알아듣기만 해봐라.. 하고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지가 이를 갈아 봤자지만.
“그러니까, 너의 몸을 땅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네가 그 땅 위에 집을 짓는다고 치자. 그래서 목재(木材)며, 기와며, 모든 도구(道具)들을 준비했는데, 지금 네 몸의 상태가 뼈대를 잡아 놓고, 토벽도 붙여놨지만.. 그 토벽이 마르지 않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
동천이 쉽게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동천의 물음에 항광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응? 그걸 모르겠다고? 흐응.. 어쨌든 다시 가르쳐 주마. 그러니까, 지금 네 몸에 이십 년 정도의 기운이 몸속을 돌고 있지만 아직 네 뜻대로 움직여 주질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태의 너에게 내가 환골탈태를 시전 했다가는 아직 네 몸속에 있는 내공도 네 뜻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죽으라는 소리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쓸데없이 무리를 하다가는 우리 둘 다 다시는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할 거다. 그러니까 네가 빨리 시술을 받고 싶으면 계속 운기조식을 해서 그 기운을 네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젠 정말로 알겠느냐?”
“예. 이번 거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데요.”
동천이 알아듣겠다고 하자 항광은 귀찮은 듯 바닥에 옆으로 길게 드러누우며 말을 했다.
“알았으면 나가서 운기조식을 해라.”
항광의 말에 동천은 깜짝 놀랬다.
“예? 왜요? 여기서 하면 안 돼요?”
동천이 놀란 표정으로 물어보았지만 항광은 아까 동천이 자신을 변태 늙은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심정으론 동천과 마주보고 말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몸을 뒤척여 동천에게 등을 보이며 누우더니 마지못해 말을 했다.
“네가 내공심법의 종류를 가르쳐 주기 싫다며!”
항광이 귀찮은 듯 말을 하자 동천은 이 늙은이가 아까는 웃으며 잘 나가더니 왜 들어와서는 괜히 자신한테 화를 내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까 그랬죠.”
항광은 여전히 등을 보이며 말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운기조식을 한다면 내가 알아챌 게 아니냐?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나가랴?”
“아..!”
그제서야 동천은 이해가 갔다.
“이제서야 머리가 돌아가나 보구만. 쯧쯧..! 냉소천이 불쌍하다. 불쌍해.. 저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는 자식을 키울려면 꽤나 힘들겠어? 하하하하!”
혼자 중얼거리던 항광은 어느 정도 동천을 모욕한 것 같기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항광이 무슨 맘으로 그런 말을 했든 간에 동천의 입장으로서는 기분이 나쁜 것만은 사실이었다. 여기에서 가만히 있으면 동천이 아니었다.
“그럼, 제가 나갈 테니까 거기서 재미있는 책 많이많이 보세요..! 히히히! 힘도 좋아! 히히히히!”
동천은 항광이 모르리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지만 등을 돌리고 있던 항광의 주먹은 부르르르! 떨고 있었다.
‘저.. 새끼.. 마음에 안 들어..!!’
일단 은근한 비유로 떠들어 댄 동천은 가벼운 마음으로 동굴을 벗어났다. 동굴을 나온 동천은 꽤 나왔다는 것을 알자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항광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으아아-! 개 같은 늙은이! 아니, 개보다도 못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변태를 지향(志向)하는 늙은이! 변태를 추구(追求)하는 늙은이! 에이, 지저분한 변태성욕자! 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