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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90화


동천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곤란한 질문을 받아서가 아니라 황룡미미가 무공에 대해 언급을 하자 철경이 떠올랐던 것이다.

‘에이 씨! 겨우 기억에서 지웠는데……. 하여튼 도움을 안주는 년이라니까?’

황룡미미는 동천이 우물거리고 있자 정말 숨기는 것이 많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비밀인가요?”

“예? 아…, 그렇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다른 것은 몰라도 무공만큼은 밝혀보고 싶었던 미미는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비해두었던 물건을 추연에게 시켰다.

“추연아.”

추연은 아가씨의 부름만 듣고도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어김없이 진행했다. 잠시 나갔다 되돌아온 그녀는 두 자루의 목검을 대령했다. 황룡미미는 그것들을 받아들자 흡족한 기색을 보였고, 동시에 도연의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발했다. 황룡미미는 의아해하는 동천에게 한 자루의 목검을 건네주었다.

“정히 그러시다면 제가 실력으로 알아볼 수밖에 없네요.”

단순했던 동천은 선물인 줄 알고 절로 웃음을 머금었다.

“뭘 이런 걸 다. 하하,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룡미미는 동천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목검을 선물로 착각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럼, 넓은 앞마당에서 비무를 해볼까요?”

황룡미미를 따라 벌떡 일어나던 동천은 중간에 뚝 하고 멈추어버렸다. 갑자기 비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당황한 것이다.

‘비무? 갑자기 웬 비무?’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눈알을 떼구르르 굴리던 동천은 잠시 후 가지고 있던 목검을 도연에게 건네주었다.

“너 가질래?”

도연은 군말 없이 받아들었다.

“미력하나마 욕됨은 보이지 않겠습니다.”

황룡미미는 언뜻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비록, 동 공자님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저 아이도 나름대로 실력이 높아 보이니 허락하겠어요. 하지만 밋밋한 비무는 재미없지 않겠어요?”

동천은 저년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다. 그러나 답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물론이지요. 그것에 대해 생각해두신 바가 계십니까?”

자신의 계략에 걸렸다고 생각한 황룡미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호호, 다름이 아니라 이 비무에서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어때요?”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그만두기로 했다. 만일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큰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거절하려고 입을 열던 동천은 자신의 뒤통수를 쿡쿡 찔러오는 강렬한 시선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도연은 주군이 자신을 돌아보자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맡겨두십시오.”

잠시 황룡미미와 도연을 저울질한 동천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냥 가자.”

“…….”

도연은 한순간 기운이 빠졌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주군의 명이니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황룡미미는 순순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비무에 응하고 그것을 하인에게 떠넘기기까지 했으면서 금세 거부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만 둔다고? 이제 와서?”

그녀의 반말 비슷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동천을 찔끔하게 했지만 그는 못 들은 체 도연을 거느리고 밖으로 나갔다.

‘헹! 내가 미쳤냐? 그런 조건이 달렸는데 비무에 응하게?’

한데, 절대로 비무에 응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성큼성큼 나아가던 동천은 욕에 익숙하지도 않은 황룡미미에게 치명적인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사내가 꽁무니를 빼다니. 쪼잔하기 그지없군요.”

우뚝!

갑자기 동천의 신형이 멈추었다. 남아가 꽁무니를 뺀다는 소리를 들어서? 아니었다. 바로 쪼잔하다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쪼잔…쪼, 쪼잔……쪼자자아아안? 쪼잔이라고? 감히 이 동천님에게 쪼잔이라고?’

분노로 뒤엉킨 동천의 머리는 한순간 3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동천이 쪼잔하다는 말을 싫어하게 된 치욕스러웠던 과거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옥수수를 맛있게 먹던 동천은 하천이 찝쩍대자 신형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네 건 벌써 먹었잖아. 가서 사이좋은 춘천한테 달라고 해 임마.”

가주님 사건으로 한바탕 싸웠던 뒤라 동천과 하천의 사이는 으르렁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괜히 동천의 심기를 건드려 본 하천은 쌍판을 구기며 동천을 비꼬았다.

“두 개나 있으면서 안 주겠다고? 쳇, 쪼잔한 놈.”

몸을 돌려 아구아구 옥수수를 돌려먹던 동천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욕을 얻어먹자 하천을 향해 쌍심지를 켰다.

“쪼, 쪼잔한 놈? 이런 하천에 대갈통 처박고 뒤질 놈을 봤나? 너 죽을!”

퍽!

“으아악! 죽어…….”

퍽!

“끄아아아! 씨부라알…….”

퍼퍽!

“흑흑, 나중에 두고 보자.”


결국 힘의 우위를 버텨내지 못하고 피 같은 옥수수 두 개를 빼앗겨 버린 그 치욕스러웠던 과거. 빼앗겨버린 옥수수 생각에 사나흘 동안 잠도 못 이뤘던 분노의 과거! 그 과거를 되살린 동천은 싸늘한 눈빛으로 황룡미미를 주시했다.

“지금, 쪼잔이라고 했냐…소이까?”

대충 분위기를 탐지한 황룡미미는 흠칫하면서도 드러난 결과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물론이에요. 그러나 이 비무에 응하시면 제가 했던 말은 당연히 취소되겠죠?”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천이 소리쳤다.

“도연!”

도연은 약간 앞으로 나섰다.

“예, 도련님.”

“이길 수 있겠지?”

도연은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맡겨주십시오.”

도연의 어깨 위에 한 손을 얹은 동천은 굳은 결의가 담긴 어조로 명했다.

“본 전의 위신을 생각해라.”

“옛!”

목검을 쥐고 앞마당 정 중앙으로 자리를 옮긴 도연은 황룡미미가 마주설 때까지 침묵을 일관했다. 막상 비무가 이루어졌어도 방심할 수 없었던 황룡미미는 여유로움을 가장한 채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실력을 겨루는 만큼 살수는 피하도록 하자.”

도연은 가벼이 동의했다.

“저도 뜻하는 바입니다.”

황룡미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도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네가 사내이니 삼 초는 양보해주겠지?”

듣고 있던 동천은 피식 웃었다.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가 했던 것이다.

‘히히, 미친 년. 누가 미쳤다고 삼 초를 양보하냐?’

그러나 도연은 늘 그렇듯 동천의 예상을 깨트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슈우웃!

도연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황룡미미는 기습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날카로운 검세가 허리를 찔러 들어오자 당황한 도연은 급히 좌측으로 신형을 틀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압!”

태의 무공 중 제 5초식인 태산중편월(太山中片月)을 펼친 도연은 맹렬히 찔러오는 황룡미미의 검 날을 아래에서 쓸어 올리듯 작은 곡선을 따라 웅혼한 기파로 튕겨냈다. 황룡미미는 그 강렬함에 못 이겨 목검을 놓치고야 말았다.

“윽?”

시큰거리는 손목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튕겨나간 목검을 재빨리 잡아챈 그녀는 당혹감과 수치심에 물든 얼굴로 도연을 노려보았다.

“분명 삼 초를 양보해준다고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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