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92화
도연에게 다가온 황룡굉은 그의 놀라운 솜씨를 보았던 터라 아주 흥미로운 눈길로 물었다.
“실로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무공이더구나. 네 사문은 어디이더냐?”
도연은 공손히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밝힐 수가 없습니다.”
황룡굉은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 않았던 듯 도연의 말 못 하는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무림세계에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신분을 숨기거나 사문을 숨기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까.
“사람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는 법이지.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 딸과 비무를 하게 된 것이냐.”
잠시 동천과 황룡미미의 안색을 살펴보던 도연은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요점만 간추려 자세히 말해주었다. 가만히 듣고 난 황룡굉은 도연에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졌다고 생각하느냐.”
동천은 내심 소리쳤다.
‘당연히 이겼죠! 누가 봐도 승기를 잡은 건데 가주님이 끼어든 거잖아요!’
황룡굉의 저의를 몰랐던 도연은 황룡미미가 무안해하지 않을 선에서 마무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비무가 끝나지 않았는데 중단되었으니, 서로 비긴 것이라 생각됩니다.”
비록, 서로 비긴 것이라고는 했지만 비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은 다시 속개해도 자신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고개를 끄덕인 황룡굉은 시선을 돌려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의 딸에게 물었다.
“미미야, 너는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졌다고 생각하느냐.”
황룡미미는 굳어있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버지가 어떠한 대답을 원하고 있는지 짐작했던 것이다.
“…….”
“왜 대답이 없느냐.”
결국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가…. 제가 졌습니다.”
황룡굉은 흡족한 얼굴로 패배를 인정한 딸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딸아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준 그는 마지막으로 동천에게 시선을 건넸다.
“동철이라고 했던가?”
두 부녀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동천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자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뒤늦게야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예? 예에, 그렇습니다.”
“이 비무에서 딸아이가 졌으니 약속대로 한 가지 일을 청해보거라.”
이미 간땡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동천이었지만 황룡굉의 면전에서 미미에게 곤혹스러운 종류의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내심 비무에서 이기면 황룡미미에게 절을 받겠다던 큰 포부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황룡미미는 안 그래도 분해 죽겠는데 상대가 뜸을 들이자 표독스러운 얼굴로 재촉했다.
“빨리 말해주길 바래요!”
순간 황룡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에는 인자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굉장히 무서워지는 황룡굉은 제일 어려웠던 패배 시인조차 잘 극복했으면서 마지막에 와서 실수를 저지른 자신의 딸에게 엄한 질책을 보냈다.
“어허, 그게 무슨 말버릇이더냐! 이 아비가 너를 그렇게 키웠더냐? 당장 무례를 사과하거라!”
아버지의 호된 질책에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황룡미미는 동천에게 굽히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행동으로는 어쩔 수 없이 보여줘야만 했다.
“……무례를 범했군요. 사과하겠어요.”
이럴 땐 기뻐해야 정상이건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질책하지도 않았건만 괜시리 황룡굉의 기세에 쫄아버린 것이다. 동천은 황송하다는 모습으로 어정쩡하게 황룡미미의 사과를 받았다.
“괘, 괜찮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느낀 총관은 재빨리 나서서 침체되는 눅눅한 공기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했다.
“하하! 이제 다 되었으니 자네는 요구 조건을 말해보게나.”
총관은 동천을 부를 때 ‘너’에서 ‘자네’로 호칭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동천을 낮추어 불렀지만 중소구에게 어느 무가의 자식 같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내심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었던 황룡굉도 머뭇거리는 동천에게 웃음 띈 얼굴로 재촉했다.
“그렇게 해라. 그래야 우리 미미도 돌아가 안정을 취할 것이 아니겠느냐.”
모두들 재촉하는 통에 뭐라고 하긴 해야겠지만 갑작스러운 일이라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너무 간단한 것을 부탁하면 장난 하냐고 뭔 소릴 들을 것 같고, 허황된 것을 부탁하면 겨우 진정된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질 것 같으니……. 으윽! 뭘 말해야 하는 거지?’
바로 그때 동천의 뇌리를 강타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 생각났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어떤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그게 아주 오래된 글이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주석이 달아져 있긴 있었는데 중반부부터 지워져서 도저히 해석 불가능이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고문자(古文字)를 해석할 수 있는 유능한 학자 분이나 그와 비슷한 분을 알고 계시는지요.”
자신의 권한 밖이라고 생각한 황룡미미의 시선은 절로 아버지인 황룡굉에게 향했다. 일단 그녀가 황룡굉을 쳐다보자 모두들 그가 동천의 질문에 마땅한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흐음. 고대의 문자라.”
이런 류의 부탁을 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황룡굉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동천에게 물었다.
“지금 해석이 불가능한 글자라면 적어도 고대로부터 천 년 전까지의 물건이라는 뜻인데. 그것을 내게 보여줄 수가 있겠느냐?”
미쳤다고 동천이 그것을 보여주겠는가? 황룡굉만 아니었다면 별의별 욕이 다 튀어나왔겠지만(속으로) 동천은 정말 죄송하다는 얼굴로 사양했다.
“그게 좀 곤란합니다. 본가의 물건이라서 외부인에게는 공개가 어렵겠습니다.”
“거 참. 적어도 어느 시대의 글자인지 확인을 해야 그에 적당한 분을 소개해 드리련만.”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옆에서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총관이 낮은 탄성을 발했다.
“아? 적당한 분이 있습니다.”
황룡굉은 반색을 했다.
“정말인가? 그래, 어느 명사(名師)이신가?”
총관은 일단 자신 있게 운을 띄워놓긴 했지만 무언가 찜찜했던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5년 전쯤에 제갈세가에 한 기인께서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신기(神奇) 제갈여휘(諸葛呂揮)님의 명성을 듣고 실력을 논하고자 오신 거죠.”
황룡굉은 같은 오련에 속해 있으면서도 처음 듣는 일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래서?”
총관은 얼른 말을 이었다.
“예, 그런데 아시다시피 22년 전에 사라지신……. 그러니까 그때로 치면 17년 전에 사라지신 제갈여휘께서 그곳에 계실 리 만무했지요. 제갈세가의 가주이신 제갈운(諸葛雲)께서 ‘지금은 아니 계시니 훗날 찾아오시지요.’라고 정중히 의사를 표명하셨는데 그 괴짜 양반이 이르길 ‘그런가? 그럼 그분이 올 때까지 내 이곳에 머물겠네.’라며, 강짜를 부리셨고 오늘날 아직까지도 그곳에 머물고 계시답니다.”
“허허, 거참 괴짜 양반이로고. 헌데 그분의 학문 실력은 확실하고?”
“물론입니다. 제갈세가의 안쪽에 자리를 잡고 한림서원(漢林書院)이란 곳을 세웠는데 짬짬이 세가의 자제분들을 가르치시며 이미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고대어에 해박하시다고 합니다.”
황룡굉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대단한 제갈세가의 자제들까지 인정한다는 말인가?”
총관은 상체를 약간 수그렸다.
“예, 가주님.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총관의 말을 듣고 결심을 내린 황룡굉은 동천에게 말했다.
“네가 들었다시피 제갈세가를 찾아가면 한림서원이라는 곳이 있다는구나. 만일 찾아갈 용의가 있다면 내가 소개장을 써주겠다. 가보겠느냐?”
제갈세가라면 동천도 귀가 따갑게 들었던 곳이었다. 일명 천재들의 집합소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제갈세가였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보름 정도면 당도할 수 있을 거리에 둥지를 틀고 있어 찾아가기에는 그리 어려운 곳이 아니었다. 동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찾아간다고 가정했을 시에만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동천은 머뭇거릴 것도 없이 동의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찾아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