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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93화


“잘 알았다. 내 그 소개장을 써줄 터이니 잠시 따라오너라.”

동천은 깜짝 놀랐다.

“예? 저 혼자요?”

지레 겁먹은 동천의 놀람에 황룡굉은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그렇긴 한데 왜 놀라느냐? 소개장을 받으려면 당연히 네가 받아야지.”

같이 있기가 껄끄러웠던 동천은 이럴 때만 믿음직한 대리인을 내세웠다.

“그런 거라면 도연이를 보내겠습니다. 저는 좀 피곤하여…….”

주인이 아랫것을 보낸다는데 황룡굉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는 별말 없이 동천의 의견에 따랐다.

“그럼 그렇게 하고, 총관 자네는 저 아이 혼자서는 찾아가기 힘들 테니 같이 동행하여 거처로 바래다주는 게 좋겠군.”

총관은 그 말에 따랐다.

“예, 가주님. 이보게 따라오게나.”

총관과 같이 가기 전 황룡미미에게 겉치레 인사라도 건네려던 동천은 그녀가 싸늘한 안색으로 돌아서는 통에 추연에게로 그 대상을 바꾸었다.

“본 공자는 먼저 가마. 흐음, 심심하면 놀러 오거라.”

추연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총관님과 가주님도 살펴 가시기 바랍니다.”

동천은 쫄랑쫄랑 황룡미미의 뒤를 쫓아가는 추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총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가야지요?”

총관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쩔쩔매던 녀석이 갑자기 돌변하며 당당하게 나서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태까지의 행동이 황룡굉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어쨌든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동천의 물음에 대꾸했다.

“그러도록 하지. 허허.”

동천을 데리고 용연각 밖으로 나온 총관은 그 동안 생각해두었던 것이 있었던지 대뜸 물어보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그 침입자와 마주쳤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나?”

‘윽?’

뜨끔해진 동천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 오만가지 인상을 다 그려냈다.

‘이 새끼는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왜 쓸데없는 것을 물어보고 지랄이야?’

동천이 말이 없자 총관이 다시 말했다.

“본가에서 소동이 일어난 그 즉시 추적에 나섰지만 전혀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네. 더군다나 그 방안에서조차 아무런 흔적이 없더군.”

고개를 원상복구 시킨 동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럴 수밖에 없지요. 창문 밖에서 엄청난 기도로 저를 꼼짝 못하게 해놓고 가벼운 손놀림만으로 방안의 온갖 물건들을 때려 부수었으니까요.”

듣고 있던 총관은 흠칫거렸다.

“강기를 내뿜어 가구들을 박살내었다는 말인가?”

작게 몸서리를 친 동천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듯한 연기를 펼쳐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그는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저보고 소리를 치라고 했어요. 그렇게만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까 다른 동조자와 양동작전을 펼쳐낸 것이 아닐까 싶어요.”

총관은 한 방 먹었다는 기색과 함께 심각한 얼굴을 만들었다.

“자네에게 듣고 보니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 듯하구만.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없으니…….”

동천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상대가 검은 복면을 착용한 덕택에 특별한 인상착의는 알 수 없고요. 목소리가 탁했던 것이 특이했다면 특이할까요?”

총관은 별 도움이 못 되었던 듯 고개를 살짝 저어댔다.

“아닐세. 목소리가 탁했다면 십중팔구 변조를 했을 게야.”

동천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만 용의선상에서 빠져나오면 장땡이었다. 그러니 그 장땡을 거머쥔 지금, 천재적인 자신의 위기탈출 솜씨가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과연, 하늘이 내린 솜씨로다. 이히히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총관을 내버려두고 한참을 즐거워하던 동천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심심하고 따분해졌다. 참으려고도 해봤지만 한번 따분해진 동천에게는 참는다는 시도 자체가 무리였다. 결국 그는 나란히 걷고 있던 총관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요. 제가 2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황룡세가의 장노삼(長路三) 할아버지와 친했거든요? 그 할아버지는 아직도 정정하신가요?”

그제야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총관은 기억나질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은근히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장노삼? 장노삼이라. 거 참, 누구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걸?”

내심 장 할아버지의 근황을 기대하고 있던 동천은 순간, 등골이 쭈뼛! 일어나는 듯한 전율감을 맛보았다.

“흐윽?”

아울러 몸이 경직되고 뒷목까지 뻣뻣하게 굳어갔다. 당황한 총관은 멀쩡하던 놈이 갑자기 몸을 떨며 고통스럽게 뒷목을 부여잡자 재빨리 부축해주었다.

“왜 그러나! 어디가 아픈 겐가?”

자신의 몸에 총관의 손이 닿자 화들짝 놀란 동천은 급히 그의 손을 뿌리치곤 멀찌감치 물러섰다.

‘허억, 헉. 저 총관 자식은 부, 분명히 가짜야. 생각해보니까 지금 것도 그렇고 어제부터 분명히 저 자식이 같이 있을 때만 기분 나쁜 예지력이 발동되었어! 아아, 이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말인가.’

물론 예지력이 발동된 것과 총관이 가짜라는 것에는 상관관계가 부족했다. 그러나 동천이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 할아버지와 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어. 저 총관 자식이 2년 새에 치매에 걸리지 않은 이상 모를 리가 없다고. 으으, 그럼 나는 말로만 듣던 인두겁을 쓴 첩자와 같이 가고 있는 거야? ……아니지. 그게 아니라 저 총관 자식이 변심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여기에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언급하자면 인두겁이 아니라 인면피구였다. 동천이 워낙 지 맘대로 부르길 좋아하는 바람에 인면피구를 인두겁이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동천은 이내 자신이 판단 착오를 깨닫게 되었다.

‘으윽? 그럼 어째서 장 할아버지를 모르는 거야!’

동천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총관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군.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복면인에게 당한 것일 수도 있으니 가서 진찰을 받아보는 게 어떤가? 내가 안내해주겠네.”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낸 동천으로서는 총관의 호의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씨, 씨팔 놈! 이 몸을 어디론가 끌고 가서 생매장을 하려는 거지? 안 봐도 다 알아!’

너무 앞지르는 생각이 아닌가 싶었지만 동천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그 누가 말리겠는가. 그런 동천의 행동이 수상했던지 총관의 얼굴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

그런 총관의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버린 동천은 멈추어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퍼부어야만 했다.

‘침착하자. 치, 침착해! 우선 저 총관 새끼는 이 몸께서 자신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이 몸이 평소와 똑같은 행동만 한다면 무사하다는 말씀!’

겨우 진정을 한 동천은 숨을 깊게 들이내쉰 후, 목 언저리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냈다.

“정말 죄송합니다. 먼저 사정을 말씀드리자면 복면인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오랜 고질병이 있어서 때가 되면 발작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제 몸을 만지면 심한 닭살 증세를 보이는지라. 헤헤.”

총관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놈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지라,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정말 걱정하는 듯한 어조로 동천의 상태를 눈여겨보았다.

“저런? 그런 몹쓸 병이 있다면 어서 고쳐야지. 본가에는 뛰어난 의원들이 있으니 지금에라도 당장 가보세나.”

따라가면 그날로 죽음이라고 생각한 동천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거절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날고 긴다는 저희 집 의원들조차 못 고친 병인 걸요.”

총관은 예사 가문이 아닌 듯 보이는 동천의 집안에서조차 못 고쳤다는 소리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알겠네. 그럼, 이제는 괜찮아진 건가?”

“물론이죠. 때때로 발작을 하긴 하지만 죽을병은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게 걱정하진 않아도 돼요.”

총관은 그제야 안심을 했는지 큰 소리로 웃어댔다.

“하하, 자네 때문에 깜짝 놀랐지 뭔가? 그렇다면 어서 휴룡각으로 가세나.”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동천의 눈매는 날카롭게 변했다.

‘으음…!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과 같이 간다고 하면 의심을 받겠지? 하는 수 없군.’

동천은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했지만, 총관이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면 자신의 감각이 신호해줄 것이라 믿고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뒤따라갔다.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기만 해봐라. 아가리 한 방을 날린 다음 발가벗겨 똥통에 처박아 버릴 테다!’

동천은 내심 그렇게 외쳐대며 휴룡각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총관의 뒤통수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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