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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94화


제갈세가(諸葛世家)로.

휴룡각에 도착해 총관과 헤어진 동천은 허둥지둥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재빨리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제길, 대 황룡세가에 감히 첩자 놈이 침투하다니. 아아,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세가를 떠나지만 않았어도…….’

누가 안 들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가주님께만 알리면 모든 사건은 종결! 그래, 이 몸이 아니면 그 누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랴.’

내심 각오에 각오를 다지던 동천은 순간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가만…, 안 믿어주면 어떻게 하지?’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별로 신용이 안 가는 어린애가 ‘총관은 가짜입니다.’라고 귀띔을 해주었을 때 그 말을 믿을 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자 동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게 또 문제네? 이를 어쩐다.’

그가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황룡굉에게 다녀온 도연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군, 다녀왔습니다.”

“…….”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버린 동천의 의식은 외부와 단단하게 차단되었는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유심히 살펴보던 도연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듯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한편, 잠시 생각이 끊겼다가 이어진 동천은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언놈이 이렇게 심각한 순간에 코를 골아?’

“드르릉, 드릉!”

코 고는 소리는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 찢어지는 소리는 고막까지 쳐들어왔다.

‘으으, 이런 개새끼를 봤나. 도대체 누구야?’

참다못해 눈을 뜬 동천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분명 언놈이 코를 골았는데?”

잠시 고민하던 동천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지자 억지로 결론을 끌어내렸다.

“그래! 내가 너무도 열심히 고민하다 보니 환청이 들렸던 거야. 맞아, 틀림없어. 히히!”

동천이 이곳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대낮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동천이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시간이 흘러도 너무 흐른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것일까? 갑자기 눈을 똥그랗게 뜬 동천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재빨리 일어난 동천은 밖으로 나가서 저녁 식사를 시켰다.


와구와구! 냠냠쩝쩝! 꾸울꺽!

순식간에 게눈 감추듯 식사를 끝마친 그는 포만감에 가득 찬 모습을 하곤 소매 속에서 이쑤시개를 찾았다.

“어디에 있더라……. 옳지, 여기에 있다. 츱츱! 히히, 하마터면 저녁을 늦게 드실 뻔했잖아?”

똑똑!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진작에 감지하고 있었던 동천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도연입니다.”

상대가 도연임을 깨닫자 동천은 엄청 기분이 나빠졌다. 도연에게 존댓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야! 두드리기 전에 이름을 먼저 밝혔어야지!”

“다음부터 그렇게 하겠습니다.”

묵뚝뚝하게 대답한 도연은 주군에게 길다란 봉투를 내밀었다. 가로 네 치, 세로 여덟 치 정도의 밀봉된 갈색 봉투였다. 잠깐 성질을 죽인 동천은 물고 있던 이쑤시개를 왼쪽 끝으로 돌린 뒤, 뚱하게 받아들었다.

“이게 뭐냐?”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물어본 것이다. 도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황룡가주님께서 써주시겠다고 했던 소개장입니다.”

요리조리 돌려보던 동천은 소개장을 뜯으려고 했다. 내용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자 도연이 재빨리 막았다.

“뜯으시면 안 됩니다. 겉봉이 뜯겼다가 다시 붙여진 흔적이 있으면 위조가 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니 그대로 두시라고 황룡가주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동천은 같잖다는 듯 손을 휘휘 내둘렀다.

“괜찮아. 다른 봉투로 바꿔서 새로 붙이면 되잖아. 너는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

도연은 강인한 목소리로 동천의 무지를 일깨워주었다.

“그 겉봉의 앞면 하단 부를 보시지요.”

“응? 하단부?”

날카로워진 동천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다 도연이 지적해준 곳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제갈세가(諸葛世家) 친전(親展)이라고 쓰여진 글씨들 밑에 구름 사이로 승천하고 있는 황금색 용이 인장 대용으로 찍혀져 있었다. 결국 새로 종이를 바꾸어도 그 문양이 찍혀져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뒤늦게 깨닫게 된 동천은 잠시 갈색 봉투를 주시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훗, 이런 건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개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은 듯했다.

‘그냥 뜯어서 본 다음, 이 집에 확! 불을 지르고 태워 먹었다고 해버릴까? 그럴까? 그런 다음 새로 하나 받아낼까?’

참으로 엄한 생각까지 한 동천. 그러나 그는 곧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아주 심각한 일이 있는데 그걸 여태껏 제쳐두고 있었다니!”

도연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그 심각한 일이 뭡니까?”

동천은 말하기에 앞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기척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제일 안전한 수법을 써야만 했다. 바로 전음을 사용하는 것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아주 중요하고도 심각한 내용이니까. 아까 전에 총관이랑 같이 오는데 말야…….』

주군이 전음까지 사용할 줄 몰랐던 도연은 잠깐 놀라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린 뒤 숨을 죽이고 들었다. 확실히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된 그는 주군의 말씀을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이군요.”

동천은 초조한 듯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심각한 정도가 아냐 임마. 이 몸께서 처리해주지 않고 떠난다면 이 황룡세가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헌데,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믿을 것 같지가 않으니…….”

도연은 주군이 황룡세가를 지극히 아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 모습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저것이 주군의 참된 모습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 가지 대안을 마련한 도연은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맞다.”

동천은 급히 물었다.

“뭐야,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어?”

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중소구님께 부탁을 드려보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러자 곧바로 동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소구?”

“예. 연장자이시니까 충분한 설명이 된다면 어느 정도 납득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동천은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보란 듯이 키득거렸다. 그리곤 갑자기 돌변한 얼굴로 도연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이 병신아! 너 같으면 본인이 데려온 아이 중 예지력을 가진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하는 말인 즉, ‘총관이 첩자래요~.’라고 말하면 ‘오오, 그렇소이까?’ 하고 납득할 것 같냐? 엉? 것도 아니면 ‘이 중소구가 보기에 총관은 첩자 같소.’라고 무턱대고 말하면 땡인 줄 알아? 증거가 있어야지 증거가!”

도연은 맞은 부위를 비비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셋 중 하나겠군요.”

한 가지 대안을 생각하기도 힘든데 도연이 세 가지 경우까지 생각해냈다고 하자 동천은 의심하고부터 보았다.

“뭐가 그렇게나 많아?”

도연은 방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첫째는 황룡가주님의 방안으로 몰래 들어가 익명의 서찰을 남기는 방법이고, 둘째는 지금이라도 총관이 첩자라는 물증을 잡는 방법이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믿던 안 믿던 우리가 이곳을 떠나면서 가주님께 은밀히 서찰을 건네주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방법은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눈여겨보기는 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동천은 다른 것을 다 내버려두고 그나마 행하기 쉬운 세 번째 방법을 걸고넘어졌다.

“흐음, 네가 생각해낸 것치고는 나름대로 괜찮았어. 근데 말야. 어째서 떠날 때 서찰을 건네주는 거냐? 그전에 건네줘도 되는데?”

도연은 주군의 질문이 떨어진 동시에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피력했다.

“그것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거죠. 보는 이 앞에서 건네주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여 찢어발길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혼자서 읽게 되면 그럴 확률은 대단히 적어집니다. 찢어지게 될 것을 적어도 구겨지는 것으로 면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내부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은 모두 총관을 초점으로 대입되게 되는데, 거기에서 의심이 될 만한 것들이 발견된다면 다행인 것이고, 아니라 해도 매사에 신중하게 될 것이니 언젠가는 꼬리가 잡힐 것이 분명하다는 가정 하에 제시해본 방법이었습니다.”

“…….”

할 말을 잃고 도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동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흐느적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곤 벽에 착 달라붙어 입을 쩌억 벌렸다. 도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주군의 행동인 것이다.

“뭐 하시는…….”

무슨 짓이냐고 굳이 묻는다면 별것 아니었다. 그저 너무도 치밀한 도연의 이야기에 자신이 놀랐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니까. 여하튼,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동천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원래의 그로 되돌아왔다.

“후후, 그렇단 말이지? 좋아좋아. 지금 당장에 쓰지 뭐.”

방안을 뒤져 문방사우를 찾아낸 동천은 먹과 벼루를 도연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쓰윽. 스윽.

먹이 갈리는 담백한 소리가 먹빛 향기와 함께 방안을 감돌았다. 약간의 시간 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던 동천은 고새를 못 참고 또다시 잠들 뻔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아…갈았느냐.”

도연은 벼루를 주군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됐습니다.”

감았던 눈을 뜬 동천은 거만한 자세로 붓끝에 먹물을 묻히더니 힘차고 남성다운 필치로 서슴없이 한 줄을 써 내려갔다. 동천이 가지기엔 아까운 필치였지만 그보다 정작 분노케 하는 것은 그 대단한 필치로 써내린 문장에 있었다. ‘총관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고 적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본 도연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쓰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 문장은 전혀 진지하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나름대로 멋있게 적었다고 내심 감탄하고 있었던 동천은 갸우뚱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냐?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전혀 괜찮지가 않습니다. 제대로 적어주시지요.”

동천은 도연을 흘겨보았다.

“알았어 임마. 재촉하지 말어.”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생각한 동천은 예지력에 관한 부분을 쓸 수가 없기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만 했다.

“으음. 음, 음. 으으음! 됐다!”

주군이 쓴 내용을 자세하게 검토해본 도연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이제 떠날 때 남들의 눈에 안 띄고 이것을 어떻게 전해주느냐가 문제이군요.”

동천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분명 총관이 따라 나올 텐데 건네주는 장면을 목격하면 나중에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쓸 때까지는 기분이 좋았다가 막상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 생각이 미치자 금세 기분이 잡치는 동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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