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96화
“자아, 급할 테니 빨리 가세나.”
중소구는 끝까지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큭큭, 그렇게 급하냐? 큭큭큭!”
그러자 보다못한 도연이 나섰다.
“대인께서 계속 웃으시면 도련님께서 무안하실 테니 이쯤에서 그만 참으시지요.”
“그럴까? 큭큭. 알겠네. 허험! 자아, 이제는 안 웃겠네.”
한순간의 소란이 잦아지자 총관은 남모르게 이를 갈고있는 동천을 어서 이끌었다. 하는 수 없이 동천은 따라갔고 사람들이 안 보이는 구석으로 가자마자 총관의 물음을 받게 되었다.
“이제 말해보게나. 무엇을 알아냈다는 겐가.”
아직은 말해주기가 곤란했다. 지금 말해주고 되돌아가면 가주 님과 도연이 어딘가에서 돌아오는 장면을 목격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동천은 좀더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는 불안해서 대답을 드릴 수가 없어요. 좀더 안전한 곳을 가면 안 될까요?”
총관은 양미간을 가느다랗게 모았다.
‘어린놈이 되게 재는군. 그러나 그만큼 소득이 있을 것이니 참아야한다.’
생각을 마친 그는 마지못해 동천의 청을 받아주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불안하다면 인적이 드물고 안전한 곳으로 가주겠네. 그곳으로 가면 되겠는가?”
동천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총관 님. 물론이죠.”
다짐까지 받아둔 총관은 건너편 건물 뒷담으로 걸어 들어간 뒤 동천을 세워뒀다.
“이쯤이면 안전할 것 같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설마, 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건 아니겠지? 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동천은 다시 옮길 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이죠. 저도 이곳이 참으로 적당하다고 봅니다.”
안심을 한 총관은 비밀을 공유하기 좋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었다.
“장소도 마련이 되었으니, 어서 말해보게. 그래, 무엇을 알아냈는가.”
일순 장난기가 오른 동천은 급히 표정을 바꾸어 두려워하는 척했다.
“저기, 너무 음침하게 말씀하셔서 꼭 그 복면 인이 나타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좀 밝게 말해주실 수는 없나요?”
‘끄응!’
절로 열이 받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뒤로 가면 살심(殺心)이 일어날 정도로 분노를 머금게 된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하하, 알겠네. 그게 뭐 어렵겠는가? 자자, 이젠 웃으며 말하니까 되었지?”
동천은 되었다는 듯 밝게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실, 이걸 말하면 그자가 눈에 불을 켜고 저를 어떻게 할까봐 두려웠거든요.”
총관은 조바심이 날 정도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어떠한 것을 알고있기에 그 정도로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지금의 상황에 처한 자라면 모두 총관과 똑같은 궁금증을 떠올릴 것이 분명했다.
“괜찮네. 그때는 그자가 운이 좋아 뚫고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무려 두 배의 경비를 강화했다네. 절대로 자네를 해할 수 없을 것이야. 더군다나 내가 있지 않은가. 어떠한 일이 생겨도 내가 꼭 지켜줄 터이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네가 알게된 그 사실을 말해주게나.”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짓던 동천은 결심을 한 듯 입술을 열었다.
“그자는…….”
동천은 그것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답답해진 총관은 기다릴 수가 없는지 그새를 못 참고 재촉했다.
“어서 말해보게. 그자가 뭐 어떻다는 말인가?”
입술을 잘근 깨문 동천은 자신의 맡은 바를 훌륭히 소화해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자는 말이죠…….”
“그래, 내가 있으니 안심하고 말해보게!”
마침내 동천이 끝을 맺었다.
“저보다 컸어요.”
“…….”
한순간 정적이 일어났고, 고조되었던 긴장감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이건 해도 너무했던 것이다. 자신도 그 정도는 아는지 동천은 조심스럽게 총관의 상태를 주시했다. 혹시, 지랄 발광을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총관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럴 염려가 없을 것 같았다. 넋이 빠진 흐리멍텅한 눈으로 어딘지 모를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순간 동천은, 총관의 머리위로 희뿌연 무언가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는데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그것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총관의 초점이 맞춰지는 것도 그때였다. 혼백이 빠져나갔을 정도로 극심한 충격을 입었던 총관은 천진한(?) 미소를 띄고있는 동천의 목을 사알짝 졸라주고 싶은 충동감을 느꼈다. 정말로 사알짝 모가지를 꺾었으면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 하. 자네의 농담도 그만하면 수준급이구만. 지금 그 말 농담이었지? 그렇지?”
동천은 좀더 놀아보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더욱 놀린다면 칼부림이 날것만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작정했다.
“농담이라니요. 그 복면 인이 저보다 작은 자라, 어린애로 화해서 도망갔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시면 섭섭합니다.”
총관은 울컥했다.
‘으으, 뭐 이런 또라이 자식이 다 있어?’
그는 도저히 이 어린놈과 상대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여기까지 올 필요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으음! 참으로 좋은 정보를 주어서 고맙네. 이야기도 끝났으니 이만 가세나.”
총관은 매정하게 돌아섰고 동천은 그런 총관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총관은 지극히 짜증스러운 얼굴로 신형을 돌렸다.
“또 뭔가?”
“헤헤, 진짜로 그게 마려운데요.”
“…….”
한편, 주군이 총관과 함께 모퉁이로 사라지자 기회를 노리고있던 도연은 아직도 웃음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황룡굉에게 다가갔다.
“가주 님.”
황룡굉은 너무도 웃겨 찔끔한 눈물을 닦아내곤 도연을 바라봤다.
“허허, 그래 말해보거라.”
주위의 눈을 의식한 도연은 되도록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룡굉은 의외였던지 도연과는 반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에게?”
도연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황룡굉과 자신에게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도연에 관해 제일 관심이 많았던 중소구는 빠지고싶지 않았던 듯 재빨리 끼어들었다.
“도 소형제. 무슨 일인가?”
아무 것도 모르는 황룡굉은 자신에게 물어본 것도 아니면서 즐겁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도연이가 본인에게…….”
다급해진 도연은 재빨리 전음을 사용했다.
<말하시면 안됩니다!>
흠칫!
황룡굉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도연을 응시했다. 설마 전음을 보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이럴 수가! 지금 저 아이의 경지가 어느 정도이기에 전음을 사용할 줄 안다는 말인가?’
황룡굉이 말을 잃고있는 사이, 멀거니 대답을 기다리고있던 중소구는 답답했는지 성급하게 물었다.
“황룡가주 님, 말씀을 하시다 중간에 그만 두시면 어떻게 합니까.”
황룡굉은 다급히 정신을 차리고 도연의 전음을 의식해 적당히 둘러대었다.
“이 아이가 글쎄 중 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 그때 마셨던 설향차를 좀 주십사 하더군요. 그러니 제가 어찌 유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오! 그렇습니까? 도 소형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까?”
중소구는 기쁨에 물든 기색이 역력했다. 설향차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연이 그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고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괜히 으쓱해진 그는 좋아라 떠들어댔다.
“하하, 도 소형제가 원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지요. 주인은 그렇지가 않은데 어찌 이렇게 착실하고 올바른 소형제가 그런 놈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제가 단언하건대 도 소형제는 분명히 성공할 것입니다! 아암! 그렇고 말고요!”
시간이 촉박했던 도연은 더 이상 중소구의 주절거림을 듣고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중소구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가주 님. 도련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빨리 받아오고 싶습니다. 가능하겠는지요.”
황룡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란다. 자아, 가보자꾸나.”
그는 일부러 경공을 사용해 자리를 떴다. 물론, 도연이 따라올 정도로 말이다. 약 삼성(三成)의 내공을 사용했던 황룡굉은 따라붙는 속력이 줄어들지 않자 좀더 내공을 끌어올렸다. 오성(五成)정도가 되자 도연이 점점 뒤처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 보아 뒤처지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듯 보였다. 도연의 실력을 가늠한 그는 천천히 보조를 맞추어주었다.
“실로 대단하구나. 어찌 그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냐.”
“좋은 스승이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황룡굉이 보조를 맞춰주기 전이었다면 말하기에도 힘겨웠겠지만 그나마 속력이 줄어든 덕분에 숨을 고르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지금 정도의 실력을 갖추려면 좋은 스승이 있어야겠지. 하지만 네 경지가 나이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구나. 네가 곤란해할 것 같아 잠자코 있었지만 사문을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도연은 속이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말해야 할 것과 감춰야 할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지금 인정에 이끌려 우를 범하고싶진 않았다. 대신 일부분만을 들춰주었다.
“죄송합니다. 그것만은 곤란합니다. 하지만 제 스승님은 한 분이 아니라 네 분입니다. 그리고 제 내공이 또래보다 뛰어난 것은 제 자질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분들께서 환골탈태 시켜주신 덕분에 그런 것입니다.”
황룡굉의 눈에 언뜻 놀람이 비추어졌다. 자신의 첫째 아들인 황룡건(黃龍乾)조차 자신을 포함해 모든 장로들이 합심하여 겨우 환골탈태를 시켜주었건만 도연이라는 아이는 고작 네 명의 사부로 환골탈태를 했다하니 놀랄 수밖에. 물론 좌태상과 우태상이 있었다면 장로들도 필요 없이 황룡굉을 포함해 단 셋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님의 지우(知友)들 이셨기에 차마 부탁할 수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도연의 사부들이 새삼 궁금해지는 황룡굉. 만약, 넷이 아닌 단 두 사람만으로 환골탈태가 이루어졌다고 했다면 그는 어떠한 표정을 지을까? 고개를 절레 내두른 그는 겸손해하는 도연을 칭찬해주었다.
“하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무리 좋은 신체조건을 가지고있어도 그만큼의 노력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자기 자신의 능력을 알고 그것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도 하나의 공부니라. 그러니 자신을 너무 깎아 내리는 것은 삼가도록 해라.”
도연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황룡굉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룡굉은 빙긋 웃더니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설향차를 가져온다 했는데 우리가 직접 가져오지 않는다면 중 대인께서 의심을 할 것이 아니냐.”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것을 미처 생각 못했던 도연은 조용히 황룡굉을 따랐다. 마침 가까운 곳에 이 장로의 거처가 있어 그곳을 찾아간 그들은 손쉽게 설향차를 얻고 나올 수가 있었다. 황룡굉은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원통을 도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분량이니 중 대인도 만족할 것이다. 뭐 그 덕분에 이 장로의 차를 거덜냈지만 말이다. 하하하!”
고맙게 받아든 도연은 그것을 한쪽 팔에 끼고 나머지 손으로는 서찰을 꺼내는데 사용했다.
“제가 전해드릴 것은 이것입니다.”
“응? 이것은 서찰이 아니냐?”
도연은 펴보려는 황룡굉을 점잖게 말렸다.
“지금 보신다면 필시 화를 내실 게 분명하니, 가지고 계시다가 나중에 혼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어린아이가 준 것이라 해도 그것을 소홀히 대할 수가 없었던 황룡굉은 호기심이 치솟음에도 불구하고 웃어른답게 참을 것은 참았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하구나. 알겠다. 내 혼자 있을 때 읽어보도록 하마.”
도연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내용상의 문제를 언급해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 도련님께서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황룡굉은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호오, 특이한 능력이라고?”
도연은 지금 자신의 말이 득(得)이 될지 실(失)이 될지 몰랐지만 적어도 이 사람에게만큼은 진실이라는 것이 통할 것만 같았다.
“그렇습니다. 그 전에 되돌아가며 말씀을 드리고싶습니다만…….”
돌아가는 것을 깜빡했던 황룡굉은 받아든 서찰을 얼른 품속에 집어넣고 도연의 말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잠시 네 이야기에 빠져 돌아가는 것도 잊어먹었구나. 하하.”
황룡굉과 나란히 달리던 도연은 잠깐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지우곤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도련님의 특이한 능력은 바로 예지력입니다.”
황룡굉의 신형이 다소 늦추어졌다가 다시 원래의 속도를 찾았다.
“예지력?”
“그렇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일들을 살피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일어날것만 같으면 그때그때에 반응하여 순간적으로 미리 알려주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하, 그것참 재미있구나!”
도연은 힐끔 황룡굉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가 어떠한 생각으로 웃었는지 알고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연이 내린 결론은 적어도 비웃음이 아닌, 어느 정도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그것만 믿어주시면 됩니다.”
도연이 너무 진지하다는 것을 감지한 황룡굉은 즉시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전방에 시선을 고정시킨 도연의 옆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고를 예측해주는 예지력이라…….’
왠지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지는 황룡굉이었다.
뿌직뿌직! 뿌우우웅!
동천이 큰 것을 보는 소리였다.
“으으으!”
분기를 억누를 길이 없어 이를 악물고있는 총관의 억눌린 소리였다.
‘들어가서 깜깜 무소식이기에 한소리 하려고 했더니 똥을 싸? 빠득, 아주 죽여버리고 싶구나.’
반각 전, 근처 하인들의 집으로 동천을 데려간 그는 뒷간을 찾아 들여보냈다. 그런데 작은 것을 보러 들어간 놈이 때가 되어도 안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상히 여긴 총관이 문을 두들긴 뒤, 왜 안나오는 것이냐고 물어보자 안에 들어갔던 동천이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총관 님께서도 언젠가 겪어보셨을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요. 오줌을 누려고 바지를 까 내리는데 갑자기 큰 것이 나오려고 하는 때 말이에요. 총관 님도 겪어 보셨죠오오옹?”
뿌지직!
“흐윽?”
자신의 몸에서 배출되는 소리는 시원해도 다른 인간의 몸에서 배출되는 소리는 역겹기 마련이었다. 기겁을 한 총관은 멀찌감치 물러섰고, 그것이 벌써 반각이나 흘러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보게. 지금쯤이면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도 생각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원체 먹은 게 많아 시원하게 쏟아내고 있던 동천은 자꾸만 재촉하는 총관이 짜증스러웠다.
‘저 새끼는 나잇살을 처먹어 가지고 도무지 인내심이란 게 없네? 성질 나는데 박차고 나가서 한 대 갈길까보다.’
화가 나고 짜증도 났지만 동천은 맘 좋은 자신이 참기로 했다.
“이게 잘 안 끊겨서 그러는데 좀 있으면 다 끝나요!”
저녁 먹긴 다 글렀다고 생각한 총관은 살기 어린 눈초리로 뒷간 속의 동천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평정을 유지하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가? 허허, 그렇다해도 되도록 빨리 끝내주게.”
뿌직, 찍. 찌직.
동천은 똥 내려가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후, 몸 속의 배설물들을 남김없이 빼낸 동천은 윤기 가득한 얼굴을 하곤 구수한(?) 냄새를 펄펄 풍겨댔다.
“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다 되었으니 이제 가는 일만 남았군요.”
총관은 굳어있는 안면근육을 겨우 움직여 어설픈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군. 자네의 말대로야.”
동천은 그런 총관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며 말했다.
“근데 왜 안 가요?”
‘으아아악! 으악! 죽이고싶다!’
속으로 펄쩍 뛴 총관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보이고싶지 않은 듯 재빨리 신형을 돌렸다.
“어, 어서 가세나.”
동천은 그런 그의 뒤에서 사악한 미소를 띄웠다.
‘히히, 별것도 아닌 게 감히 이 위대하신 동천 님에게 까불고 있어.’
시간을 벌고도 남아돌아 응가 까지 싸고 온 동천은 즐거운 마음으로 총관을 따라갔다. 그들이 돌아온 것은 금새였는데 총관이 지름길을 택해 재빨리 주파해왔기 때문이다. 하도 동천이 오질 않아 성질이 나있던 중소구는 총관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문제의 그놈을 보자마자 대노하여 소리쳤다.
“이놈아! 작은 걸 누러 간 놈이 왜 이제서야 나타나?”
총관을 뭉개고 와 상승세를 타고있었던 동천은 중소구와 같이 눈알을 부라렸다.
“이게 다 중 대인 때문이라고요! 중 대인께서 큰 거냐고 놀리셔서 막상 바지를 내리니까 큰 게 나왔단 말이에요!”
고 따위로 대들고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중소구. 그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감했다. 한 대 치자니 주위의 이목이 너무도 많고 가만히 두자니 상당히 기분 나빴던 것이다.
“너, 너 이놈! 어디서 그따위 말버릇이더냐!”
동천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둘렀다.
“아아, 됐어요. 둘이 쌤쌤! 됐지요? 예?”
“그게 그러니까…….”
중소구가 당황해하는 사이 은근슬쩍 도연에게 다가간 동천은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을 사용한 것이다.
<잘 끝냈겠지?>
도연은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동천은 마음을 푹 놓고 황룡굉에게 떠나기 전 인사를 올렸다.
“가주 님, 저희는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황룡굉은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동천을 마주봐야만 했다.
‘이 아이조차 전음을 사용하다니…, 그저 놀라운 따름이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누가 길러낸 것일까?’
동천을 눈여겨보다가 전음을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듯 했다. 한편, 동천은 가주 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자 재차 말했다.
“저기, 이제 가보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황룡굉은 뒤늦게 동천의 인사를 받았다.
“이런이런.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했구나. 그래, 잘 알았다. 비록 만남은 짧았지만 그래도 찾아오고 싶거든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갑자기 코끝이 찡해진 동천은 괜시리 코를 만지작거렸다.
‘서찰을 건네주었으니 내 도리는 다 한 것이다. 장하다 동천! 아름답구나 동천!’
자신을 칭찬하던 그는 곧이어 다음 목적지인 제갈세가를 떠올렸다.
“도연아.”
“예, 도련님.”
“가자!”
“알겠습니다.”
동천과 도연은 나란히 황룡세가를 걸어나갔고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 잠겨있던 중소구는 누군가 툭툭 건드리자 고개를 돌려 그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친절한 얼굴을 한 총관이 집게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바로 동천이 떠나가고 있는 방향이었다.
“앗? 가, 같이 가야지!”
중소구는 허겁지겁 달려갔고, 남아있는 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의미로 떠나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잠했던 무림사(武林史)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사이, 본격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