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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97화


서장(序章).

마침내, 공명(共鳴)의 한계가 찾아오고 생사가 갈리도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생명연장의 회의감…….

저 하늘에 반짝이는 샛별들은 하릴없이 처연하고, 환상 좇는 내 인생은 추하고도 추하구나.

그의 분신 간데 없고 인재조차 씨가 없네. 아아, 그 누군들 이 고통을 알아주리오!

천기가 보이지 않으매, 한탄에 한탄만을 거듭하도다.


시작(始作).

쾅!

분노에 찬 손아귀가 탁자를 내리쳤고, 그것은 곧 시작을 의미했다.

“가는 족족 실패했단 말이냐!”

항광의 분노 어린 시선이 쩔쩔매고있는 사내에게로 향해있었다. 그러자 오십 줄에 달한 바싹 마른 사내가 넙죽 엎드리며 처절한 음성을 토해냈다.

“죽여주십시오! 제가 다 못난 탓이옵니다!”

“알긴 아는구나!”

암흑마교의 단(團)급 부대가 만독문 오십 리 밖의 요전강(耀佺江) 어귀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하들을 급파한 것이 벌써 3번째였다. 상대는 침공의 목적으로 왔다고 보기에는 그 수가 적었고, 견제를 위해 왔다고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어중간했다. 또한 정탐을 하러 왔다면 그들의 위치를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상대의 반응을 확인할 목적으로 30명의 인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고작 11명.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아울러 죽여달라고 비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2차로 두 배인 60명을 보냈지만 그들 역시 패하고 돌아오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상대를 너무 얕보았기에 주력을 투입하지 않은 탓도 있다. 허나, 이번에 투입한 침추대(沈追隊)는 만독문에서 중간급 정도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부대였다. 그런데도 패해 돌아왔으니 어찌 항광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 고작 네놈의 실력이 그 정도밖에 안되었단 말이냐? 그러고도 침추대의 대주를 맡고 있단 말이냐!”

침추대주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나마 변명이라 할 수 있는 변명을 시도했다.

“크흑!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상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딪혔는데, 천인흑랑단(千人黑狼團) 중 일부와 부단주인 소면살귀(笑面殺鬼) 붕걸(鵬傑)이 와 있을 줄은…….”

“닥쳐라!”

침추대주를 향한 항광의 지금 분노는 그가 패해 돌아왔다는 것이 아니었다. 천인흑랑단도 암흑마교에서는 중간급이고, 침추대도 만독문의 중간급이었는데 자신의 수하가 패퇴해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상대편은 단주가 아닌 부단주가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문밖의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

그 와중에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를 감지했던 모양이다. 항광의 허락이 떨어져 안으로 들어온 자는 흑의로 온몸을 둘러싼 삼십 대 초반의 사내였다. 무심한 눈길이 인상적인 이 사내는 특이하게 양손이 먹을 들인 것 마냥 검게 물들어있었다. 언뜻 보아도 거부감이 일 정도로 말이다.

“문주 님을 뵙습니다.”

새로 등장한 사내로 인해 약간의 안정을 되찾았는지 항광의 구겨진 안색이 차츰 원래의 모습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초혼(草魂), 무슨 일이냐.”

바닥에 엎드려있는 침추대주를 잠시 내려다본 초혼은 시선을 올려 항광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아가씨께서 힘들어하십니다.”

항광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참으라고 해.”

뒤이어 항광보다 더욱 무심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종류가 아니라 당신의 무공에 대해 진정한 실력을 확인할 길이 없어 힘들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을 급격히 찌푸린 항광은 가만히 뒷짐을 지며 물었다.

“그것은 네가 보고 판단한 것이냐.”

초혼의 고개가 살짝 내려갔다 원위치 했다.

“그렇습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 이유가 없었습니다.”

초혼의 대답에 항광의 입술이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처럼 목석 같은 놈이 여자아이의 마음을 얼마나 안다고?”

초혼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감히 문주의 앞이라 말대꾸를 못하는 것인지, 맞는 말이라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항광의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백 날을 기다려도 초혼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항광이 입을 열어야만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네가 찾아온 용건은 그것이 끝이냐?”

“물론 아닙니다. 그런고로 이번에 사태도 있고 해서 아가씨를 요전강으로 보내주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소홍(小紅)이를?”

조금 놀라하는 것으로 보아 의외였던 듯 싶었다. 초혼은 바로 대꾸했다.

“이 기회에 실전을 통해 경험을 쌓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아가씨께서 심성이 너무 여리신 탓에 이대로 가다가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것조차 두려워하시게 될지도 모르니,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생각됩니다.”

심성이 여린 부분만큼은 항광도 나름대로 고민하고있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차분한 척을 하지만 금새 본모습을 들키고 마는지라 항광의 입장에서는 과연 그 아이가 이 만독문을 이어갈 재목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흐음, 그건 그렇지. 소홍이가 그렇기는 해.”

복잡한 생각을 하는 동안 잠자코 입을 다물고있던 항광은 왔다갔다 좌우로 움직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소홍이와 함께 독랑대(毒狼隊)를 이끌고 가보겠다는 소리냐?”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항광은 뭔가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까지 나설 정도는 아니다.”

만독문 내에서 독랑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3할을 웃돌았기에 고작 암흑마교의 천인흑랑단 중 일부를 쳐부수는데 독랑대를 보낸다는 게 항광의 자존심을 긁었던 것이다. 그런 문주의 마음을 알았음인지 초혼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첫 전투를 임하실 때, 적어도 제가 곁에서 보조를 해줘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는 것입니다.”

항광은 내심 수긍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자존심이 아직까지도 용납하지 못하고 있나보다.

“문영(雯泳)이가 곁에서 잘 보살펴 줄 터인데…….”

문주께서 어느 정도 승낙했다고 생각한 초혼은 신속한 결정을 부추겼다.

“그 아이로 아가씨를 보필하는 것은 아직 미흡합니다. 정히 그러시다면 일선에서 물러나 만일의 사태에만 대비를 하겠사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한 고집하는 초혼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자 문주인 항광으로서는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자신의 제자인 강소홍을 위해서 나서주겠다는데 그 충심을 어떻게 내친다는 말인가. 존심이 상해 괜히 삐딱하게 나갔던 항광은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도 찡그린 인상을 펴지 않았다.

“만독문에는 그리도 인재가 없더란 말인가? 에잉!”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자 초혼은 말없이 장읍을 취했고, 엎드려있던 침추대주는 문주 님의 마지막 소리에 절로 찔끔하여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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