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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98화


모나고 작은 언덕 위에 두 소녀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모두 성숙기에 접어든 십대 후반의 여인들이었다. 아름답다라고 말하자면 단연 오른쪽 소녀가 빛을 발했지만 수수한 얼굴의 왼쪽 소녀는 무언가 묘한 끌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장은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보면 볼수록 끌리는 매력을 가졌다고나 할까. 문득, 왼쪽 소녀의 어깨가 움찔했다고 보였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한 가닥 수심이 걸렸다.

‘꿈에서라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도망칠 수가 없다. 지금의 현실 또한 그러한 것…….’

그녀는 자신과 나란히 앉아있는 여인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곳에 온지 어언 7년. 분명 새 삶을 살아가고는 있지만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하다. 그나마 이 애가 점점 이지를 회복해가고 있어 다행이기는 하지만 혼자라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외롭고 슬프게 한다.’

그때 오른쪽 소녀가 살며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흐릿한 듯 보이는 눈동자는 수심에 찬 그녀의 눈을 아릿하게 찔러 들어왔다.

“초혼. 온다.”

“응? 초혼이?”

무미건조한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난 왼쪽 소녀는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조용히 걸어오고 있는 초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따라 일어난 오른쪽 소녀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초혼. 초혼.”

수수한 용모의 소녀는 아름다운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뭔가 모자라 보이는 소녀에게 차분히 대꾸해주었다.

“알았어. 이제 나도 봤으니까 그만 해.”

오른쪽 소녀는 그 말을 듣자 소리를 죽이고 혼자 중얼중얼거렸다. 아마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들에게 다다른 초혼이 왼쪽의 여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여기에 계셨군요.”

그가 아가씨라 한다면 1년 뒤 소문주로 자리매김을 하게될 강소홍(姜小紅)을 일컫는 것이리라. 그리고 틀림없이 강소홍인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우울함을 털어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초혼을 대했다.

“지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요?”

초혼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침추대가 당하고 돌아왔답니다.”

소홍은 대번 눈살을 찌푸렸다.

“사부 님께서 분명 진노하셨겠네요.”

“분명 그러하셨습니다. 그래서 문주 님께서는 이번에 아가씨를 지목하셨습니다.”

갑자기 소홍의 눈이 똥그래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죠? 나를…, 나를 지목하셨다니요?”

초혼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가씨가 너무 들떠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굳게 닫힌 철문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가 거칠었던 아가씨의 숨결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자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문주 님께서는 원수 같은 암흑마교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한편, 아가씨의 성취를 확인하시고자 이번 임무를 맡기신 듯 합니다.”

소홍은 상기된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요.”

초혼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자 소홍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커졌다.

“아니에요!”

초혼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자신이 생각하고있던 바를 꺼내들었다.

“자신감이 부족하실 뿐 실력은 이미 갖추고 계십니다.”

“…….”

소홍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인 것이다. 그녀의 실력은 주위의 고수들과 비견해도 쳐지는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웠다.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한 생명을 앗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도 싫었다. 어렸을 땐 그것을 못 느꼈지만 커가면서 그것을 인식하자 하나 둘 두려움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것이 그녀의 내부에 가득 들어차게 된 것이다. 언제고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너무 빠르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정한 법.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있던 초혼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있는 아가씨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만일을 위해 제가 곁에서 보필해드릴 터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이고싶지 않았던 소홍은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초혼이 같이 가주신다고 하니까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때 소홍의 옆에 있던 소녀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소홍은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문영아, 왜 그래.”

문영이라고 불린 소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어린애가 보채듯 행동했다.

“꼬르륵. 꼬르륵.”

소홍은 문영이가 뜻하는 바를 알 수가 없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꼬르륵이라고? 너 배가 아프니?”

문영이는 좌우로 딱 한번씩만 고개를 돌렸다.

“배고파. 꼬르륵.”

소홍은 문영이가 어디에서 꼬르륵이라는 뜻을 알아낸 걸까 궁금했지만 지금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미소를 머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홍은 모처럼 되살아난 이 기분을 망치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우선 지금의 상황만을 즐기고 싶었다.

“호호, 그래? 그렇다면 어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 하지만 너무 많이 먹지는 말아. 오늘은 아주 매운 사천식 음식이 나온다고 했으니까. 네 입에서 불이라도 나면 상당히 볼만하겠지만 당사자인 너는 매우 고통스럽지 않겠어? 호호호!”

문영이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입에서 불이 난다는 비유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소홍은 그런 문영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아, 어서 가자. 배고픈 것은 참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까. 아참? 초혼도 같이 먹겠어요?”

아가씨의 살아난 모습에 저으기 안심하고있던 초혼은 생각지도 못했던 초대에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찰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소홍은 탓하지 않았다. 원체 상대방의 어투가 그랬으므로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같이 먹겠다면 저로서는 대환영이에요. 그러나 그냥 먹는다면 재미없지 않겠어요?”

“무슨…….”

한쪽 검미가 살짝 이지러진 초혼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웃음을 유발시켰다. 물론, 소홍에게만 그랬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두려움에 떨 것이 분명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다소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초혼에게 한가지 제의를 했다.

“방금 들어서 알았을 테지만 오늘 점심은 사천의 요리예요. 맛은 충분히 느낄 수 있겠지만 내공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화기를 억누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먹는다면 진정 사천요리를 먹었다고 할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러니까 먹기는 먹되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본래의 사천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자는 말이에요. 당연히 저도 내공을 사용하지 않겠어요. 어때요?”

초혼은 참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맛을 느끼기만 하면 되었지 식도락가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모처럼 웃고있는 아가씨의 앞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소홍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약속한 거예요. 나도 절대로 내공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 초혼도 내공을 사용해서는 안 되요.”

초혼은 무언가 있다고 느꼈지만 원체 차분한 성격의 아가씨이고, 상식 이하나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확실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아가씨와 약조한 것을 감히 어길 리 있겠습니까.”

그녀는 문영이의 팔짱을 끼고 즐거워했다.

“호호,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죠. 그렇고 말고요. 아? 우리 문영이가 배고프다고 했지? 초혼, 어서 가볼까요?”

소홍의 신형이 살짝 땅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일직선으로 쭈욱 달려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초혼이 그녀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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