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99화
요전강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있던 천인흑랑단(千人黑狼團)은 이번 3번째의 싸움에서 다소 피해를 입은 터라 하는 수 없이 진영을 물러 산중으로 장소를 옮겨야만 했다. 아마도 침추대주가 그냥 패하고 돌아온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나무를 베어와 간단하게 목책을 쌓고 그 안에 자리를 마련한 소면살귀 붕걸은 2백 명의 수하가 거진 절반으로 줄어든 이 현실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미소를 얼굴에서 떼어내지 못했다.
“흐응, 이번 접전은 꽤 흥미로웠지 않나?”
이번 임무에 영문도 모르고 참가하게 되었던 육 단장(六團長) 고민구(暠敏鳩)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죽고싶지 않았기에 그저 웃는 낯으로 동의해야만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부단주 님의 탁월한 지도력이 빛을 발한 덕분에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미천한 아랫것들이 방심하지만 않았어도 피해가 훨씬 적었을 게 분명하고요. 하하, 어쨌든 그놈들도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렸을 겁니다.”
붕걸은 눈웃음을 치며 고민구의 아부를 가만히 듣고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는 덕분에 소면살귀라는 외호가 붙어버린 붕걸. 예전에 적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할 때, 비명을 지르면서도 웃는 얼굴이어서 상대편 고문사를 질리게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의 웃는 얼굴은 유명했다. 그런 그의 웃음이 상대편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적합하다는 그 이유하나 만으로 일개 대원에서 영약과 비급을 하사 받고, 천인흑랑대의 부단주로 승격이 된 아주 특이한 승진사례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어.”
고민구는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돌연 긴장하여 물었다.
“때가 되었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없이 고민구와 눈을 마주치던 붕걸은 갑자기 대소를 터트리며 손뼉을 마주쳤다.
“푸하하! 그랬지? 하하,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번 임무가 무엇인지 몰랐겠군!”
그동안 궁금해서 안달이 나있었던 고민구는 드디어 이번 임무의 목적을 듣게 될 것 같자 조심해가며 붕걸을 띄워주었다.
“저같이 미천한 것이 어찌 그런 임무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아부가 주효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붕걸이 웃는 것은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 했으면 잠잘 때도 웃는다는 소문이 나돌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붕걸의 웃음은 하급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아,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야. 다음부터는 좀 자신감을 가지게나.”
‘그러다 죽으면 어쩌라고?’ 라는 말이 고민구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허나, 그 말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만족한 붕걸은 의자에 앉은 뒤, 양손을 깍지끼고 느긋하게 신형을 뒤로 젖혔다.
“좋아. 기왕 떠나는 마당이니 이번 우리의 목적을 말해주겠네. 사실 3년 전에 감송이 이곳으로 탈출하고 난 후, 교주 님께서 상당히 진노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걸세.”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자 고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놓쳐 치욕을 느낀 독전의 전주가 스스로 5년 동안 근신을 하겠다고 했었으니까. 암흑마교와 만독문이 틀어진 이유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극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언가 중대한 비밀을 듣게 될 거라는 생각에 절로 긴장이 되는 고민구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독전주님의 명예가 상당히 실추되었다지요?”
붕걸은 얕게 웃었다.
“후훗, 정확하네. 그 내막은 나도 상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번의 지시로 보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가 있게 되었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니 말은 않겠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번 임무를 가르쳐주겠네.”
고민구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붕걸의 입술을 주시했다. 과히 보고싶지 않은 입술이었지만 앞으로의 처신에 따라 생명이 왔다갔다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붕걸의 입장에서는 고민구의 행동이 재미있었던지 잠시 그의 행동을 즐겨보다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우리의 목적은 몰사(沒死)라네.”
언뜻 이해를 하지 못했던 고민구는 뭔 소린가 하다가 경악하고야 말았다.
“저, 적들의 몰살이 아니라, 우리 단원들의 몰사란 말입니까?”
순간 웃고있는 붕걸의 눈동자가 매섭게 번들거렸다.
“바로 맞추었네. 한마디로 지금 파견된 4단과 6단은 문독문에게 위협을 가하는 한편, 그들의 시선을 이곳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일세. 그 동안 절강성의 다른……. 후후, 그 다음은 자네가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네. 내 자네를 아끼는 마음에 알아서 몸을 사리라는 뜻으로 가르쳐 준 것이니 그렇다고만 알아두게나.”
고민구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지금의 치고 빠지는 형태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더욱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러한데 왜 애꿎은 인재들을 죽인단 말인가.
“그, 그렇지만 본 단원들을 몰사시키는 것 보단 지금처럼 싸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붕걸은 예의 그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것은 물론이네. 하지만 이번 단원들의 몰사에는 또 다른 목적이 숨어있지. 바로, 만독문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그들의 이목을 본교로 더욱 집중시키게 하는 것. 오직 본교에게만 집중시키게 하는 것이라네.”
고민구의 머리로는 확실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본능은 등골을 서늘하게 하다 못해 얼어붙게 할 정도였다.
“만약에…, 만약에 그러다가 그들이 본교로 쳐들어온다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고민구의 질문에 더욱 웃음을 짓는 붕걸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좋고 말고! 아무렴! 하하하!”
어떻게 꼬이는 상황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고민구가 고민을 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욱 빠개질 뿐이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머리만 빠개진다. 쳇, 까짓 거 몰라도 된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옳은 판단이었다. 자신조차 하나의 소모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지금, 그로서는 다른 어려운 문제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생명 줄인 붕걸에게 매달려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의 극비를 알려준 지금 붕걸은 고민구를 심복으로 두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모자란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저 부단주 님께 충성을 다할 뿐이니 거두어주십시오!”
붕걸의 안면에 드디어 하나 건졌다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실, 6년간 부단주로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심복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 누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겠는가. 다른 자들의 경우, 화가 나면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에 조심하여 살아날 수도 있었지만 붕걸의 경우에는 언제 화가 났고 슬퍼하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기에 그의 심기를 건드려 당장 죽는다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경우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붕걸의 밑에는 심복이 없었고 그저 눈치만 보는 수하만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허나,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붕걸이 간접적으로나마 고민구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번 임무에서 너를 살려줄 터이니 자신을 따르라고 말이다. 그래서 고민구는 넘어왔고, 그는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 고민구에게 진심 어린 웃음을 띄워주었다.
“하하핫, 그러기로 하지! 어디 한번 열심히 해보게나!”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짐하겠습니다!”
“충성이라……. 하하하하!”
웃고있던 붕걸. 그의 마음은 이제 4단장에게로 향해있었다.
강소홍의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져있었다. 1년 전 딱 한번 먹었다가 너무도 맛이 강렬한 탓에 멀리했었던 사천식 요리. 사람의 호기심이란 게 다 그렇듯 시간이 흐르자 다시 한번 먹어보고픈 마음에 오늘 요리사에게 사천식 요리를 주문했다. 그리고 애꿎은 초혼까지 끌어들여 식사에 동참했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볼 때 매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있는 사람은 그녀 한사람뿐이었다. 초혼의 경우에는 참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문영이가 즐겁게 먹고 있는 것은 그녀로서도 의외였다. 일년 전에는 그녀도 매워서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었다.
“후아. 문영아, 너 안 맵니?”
열심히 먹고있던 그녀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안 맵다. 맵지 않다.”
소홍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초혼에게로 말이다.
“초혼도 안 맵나요?”
“당연하지요.”
당연하다는 말에 소홍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뭐가 당연하다는 말이죠?”
초혼은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뒤 말했다.
“전 사천 태생이니까요.”
“…….”
한순간 소홍의 머릿속에는 당했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진작에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런 무모한 짓은 생각조차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호, 호호호…….”
그녀는 공허한 웃음으로 입안을 달구고있던 화기를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