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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00화


이틀이 지났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소리 없이 움직이는 일단의 무리들. 검은 옷차림의 무리들은 그 수가 삼십을 넘지 않을 듯 싶었다. 대략 스물 다섯에서 여섯 명 정도? 거의 두 시진을 소비해가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요전강.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들. 요전강은 성인의 허리까지 차 오르는 수심을 가지고 있어 무림인이 건너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어 보였다.

“조금 더 상체를 숙이고 달빛에 반사되지 않게 조심들 해라.”

이 무리의 통솔자가 신중한 주의를 주자 뒤따라오던 사내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통솔자는 그들이 자신을 지나쳐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중간쯤에 끼어들었다. 그리곤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처럼 왜소한 인영과 나란히 보조를 맞춰주었다. 그러자 불편함을 느낀 그 인영이 섬세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됐어요. 지금부터 이럴 필요는 없어요.”

바로 문영이와 나란히 도강(渡江)하고있는 강소홍이었다. 그렇다면 사내가 초혼일 확률은 거의 구할. 아니, 확률을 따질 필요도 없이 그가 초혼임이 확실했다. 어쨌든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것이 제 임무입니다.”

소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데 그녀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혼이었기에 말이다.

“좋도록 해요. 하지만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요?”

전방의 사태를 주시하던 초혼의 눈길이 자연스레 소홍에게로 돌려졌다.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까?”

대답하는 소홍의 목소리가 다소 상기되어 나왔다.

“난 내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에요. 더군다나 적들도 없는 상황에서는 말이죠.”

초혼은 아가씨가 상당히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하기에 그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이럴 때에는 그저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던 그는 별말 없이 아가씨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적의 진영에 가까워지면 다시 오겠습니다.”

소홍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초혼은 물길을 헤쳐나가 선두에 복귀했다. 앞서나가는 초혼의 뒷모습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받아들이고있는 소홍의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피……. 언젠가 다가오리라 생각했던 살인. 싫다. 두렵다. 난…, 난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일까?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그때 하얀 손길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흠칫!

깜짝 놀란 그녀는 이내 상대를 알아보곤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왜 그래, 문영아?”

“차가워.”

문영의 대답에 소홍은 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물 속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 지금에야 차갑다고 말한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나보다. 허나, 문영이의 특성상 주인인 그녀가 감내해야 할 부분인지라 그러려니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곧 밖으로 나갈 거니까 참아.”

알아들었는지 문영이가 생긋 웃었다. 그러자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가 소홍의 짓눌린 가슴을 조금이나마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도강은 막바지에 달해 있었다. 강물 밖으로 나오기에 앞서 신중히 주위를 살피던 초혼은 손을 들어 앞으로 까딱거렸다. 나와도 된다는 신호인 듯 하나 둘 물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차례를 지키고있다 나온 뒤, 땅을 밟고 몇 발자국을 걸어가던 소홍의 얼굴은 뭔가 불쾌해 보였다.

‘아래가 찜찜해.’

물 속에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밖으로 나와보니 상당히 질척거리고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가 곁에서 머물러있는 문영이가 그녀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쉬이…….”

“뭐?”

소홍이 못 알아듣자 그녀는 다시 반복해서 말했다.

“쉬 마려워.”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난 소홍은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강에서 뭍으로 바로 나온 터라 숨어서 볼일을 볼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갈대 숲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토질이 안 좋아 사람이 숨어 볼일을 보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더구나 단 둘이라면 모를까 주위에 사내들이 있는 터라 상황은 최악이었다. 물론, 모두 등을 돌리게 한 뒤 볼일을 보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허나, 소리는 감추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 귀를 막으라고 해도 그들은 모두 고수들. 그녀는 하필이면 이때 오줌이 마렵다는 문영이를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안았다.

‘아아, 내 불찰이야. 이곳에 오기 전에 문영이의 볼일을 해결을 했어야 했는데 여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그런 소홍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바로 사건의 발단인 문영이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떤 후에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안 마려워.”

“…….”

소홍은 ‘설마?’ 했다. 문영의 특성상, 오줌이 마렵다고 했는데 참아서 안 마렵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기색으로 문영이의 하체를 살펴보던 그녀는 주춤거리며 물어보았다.

“싸, 쌌어?”

문영이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은 것처럼 가뿐하게 대답했다.

“응.”

순간 소홍의 두 주먹이 불끈거렸다. 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창피해 얼굴을 붉힌 그녀는 매섭게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들어가.”

그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문영이 꺼리는 얼굴로 미적거렸다.

“저긴 추워.”

“들어가.”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문영이는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곤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문영이를 잠시 동안 지켜보던 소홍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나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곤 자신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초혼에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됐어요. 가도록 하죠.”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있었던 초혼은 비록 어두워서 확인할 순 없지만, 지금 아가씨의 얼굴이 극에 달할 정도로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배려하는 마음에 모르는 척 아무 말도 안 했다.

“이각 정도면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적들이 경계를 넓게 잡아 놓을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가 적 진영이라 생각하시고 주의를 기울여주십시오.”

초혼의 말로 인해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목적이 떠오르자 소홍은 밀려오는 두려움에 작은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뿐이었다. 두려운 현실을 자신의 신분으로 밀어낸 것이다.

‘난 앞으로 만독문을 이끌어가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어. 절대, 절대로 여기에서 굴하면 안돼!’

그녀가 다부진 결의로 눈을 들어올리자 자신을 지켜보던 초혼이 이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듯한 인상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보고있었으면 있었던 거지 굳이 물어볼 것이 뭐 있겠는가. 그녀의 침묵과 더불어 전 인원이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나아갔다.

바스락!

전방에서 갑작스레 수풀이 움직이자 모두들 신형을 낮게 숙였다. 오직, 문영이만이 멀뚱히 서있었지만 그녀의 문제는 소홍이 끌어당겨 해결해주었다. 그때, 나직한 초혼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 어제 먼저 내보냈던 정탐 조입니다.”

초혼이 수신호로 그들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도 알아들었는지 초혼과 비슷한 손동작을 하며 서로의 신분을 확인했다. 총 세 명이었던 정탐 조는 재빨리 다가와 부복했다. 초혼은 그들에게 물었다.

“적의 상황은?”

삼각형 모양으로 부복해있던 사내들 중 제일 선두에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연전연승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탓인지 술을 마시고 놀며 방어에 소홀히 하고있습니다. 듣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 나태하게 행동하여 뭔가 미심쩍었지만 저희들이 그들과 어울려본 결과,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행동하시려면 지금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보고를 듣고 난 초혼의 얼굴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눈만 빼고 말이다. 잠시 후 신형을 돌려 소홍에게 다가간 그는 이 일의 총 책임자인 그녀에게 의사를 물었다.

“좀 더 지켜볼까요, 아니면 지금 시작할까요.”

입술을 꼭 다물고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의 모습은 철부지아이가 장난을 쳤다가 어른에게 야단맞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은 길어졌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는 자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권리가 당연히 있기에.

“소홍, 소홍.”

너무도 조용하여 문영이가 이상했나보다. 그녀가 소홍의 팔을 잡아당기며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생각에서 깨어난 소홍은 말문을 열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결단을 내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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