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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02화


잠시 후, 그런 이유로 해서 다시 동전을 던진 붕걸은 동전의 앞면이 나오자 훈보를 내려보내기로 했다.

“참으로 정당한 방법이었으니 자네의 불만은 없으리라고 보네.”

훈보의 불만은 치솟다 못해 터져 버릴 정도였으나 암흑마교라는 곳에서 여지껏 살아 남아있는 만큼 경거망동 없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당연히 이의는 없습니다. 자세한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붕걸은 별 말없이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군. 무턱대고 가면 안 되지. 우선 내려가서 나로 위장하게. 그리고 적당히 싸우다가 도망쳐 버리도록 하고. 우리는 이곳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협곡 부근에서 자네의 무사한 귀환을 기다리고 있겠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붕걸의 흉내를 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명령이 있었기에 우선은 해봐야 하는 것.

“명심하고 해내겠습니다!”

훈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붕걸에게 직각으로 고개를 숙이고 싸움이 한창인 곳을 향해 신속하게 달려갔다.

“부단주님, 아무래도 훈 단장 혼자서는 무리라고 봅니다만.”

붕걸은 고민구와 시선을 맞추고 씨익 웃었다.

“물론, 그렇겠지.”

“그렇다면 역시 훈 단장은…….”

“미끼였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후훗, 아니야. 나는 분명히 적당히 하고 도망치라고 말해주었네. 관건은 훈 단장이 어느 선에서 도망치냐는 것이겠지. 그리고 맞붙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그의 생사가 달라지겠고.”

비록, 자신 대신 내려가긴 했지만 고민구는 훈보가 살아 돌아오길 바랐다.

“훈 단장은 조금 고지식한 면이 있는데 잘 해낼지 모르겠군요.”

붕걸은 뭔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모르는군.”

“예?”

고민구의 반문에 붕걸은 쯧쯧거린 뒤 입을 열었다.

“고지식한 면이 있으니까 내가 한 말을 충실히 이행할 거라는 말일세.”

그제야 이해가 됐는지 고민구가 낮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고지식하니까 부단주님의 말씀대로 적당히 하다가 도망칠 거라는 말씀입니까?”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가. 하하하!”

크게 웃던 붕걸은 채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신법을 사용해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고민구도 황급히 그를 따라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렸고, 훈보는 내심 ‘제기랄!’ 거리며 칼부림이 한창인 곳으로 뛰어들었다.

“이놈들! 이 붕걸이 상대해주마!”

소홍의 곁에서 유령처럼 가만히 서있던 초혼은 붕걸이라는 소리에 그곳으로 차가운 눈을 돌렸다.

“왔는가.”

토악질을 하던 소홍은 그의 무심한 읊조림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에 젖어 애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죽인 거지요?”

소홍의 물음이 초혼에게는 공허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는 단 한 올의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싸늘히 말했다.

“아가씨가 죽이지 못한다면 제가 죽여야 하니까요.”

소홍은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꼭,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에요! 산 채로 잡아들여 이들의 진정한 목적으로 알아내는 방법도 있었다고요!”

그러자 초혼의 입에서 다소 흥분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보기엔 아가씨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가씨의 주장대로라면 조무래기들을 잡아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자들은 하나면 족합니다. 저는 적들을 상대할 때마다 혈도만 제압하는 아가씨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다 초혼의 말이 맞아요! 그러나…, 그러나 난, 난 정말로…….”

그다음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았다. 허나, 곁에 있었던 초혼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

곧이어 들려오는 소홍의 흐느낌은 말없이 서있는 초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흐느낌이 마치, 방금 전의 중얼거림으로 변해 그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두려워요. 두려워요. 두려워…….

‘제길!’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소홍의 인생은 한없이 추락할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인재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므로. 그래서 그녀를 아끼는 초혼으로서는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먹빛으로 물들어있는 그의 양손이 더할 수 없이 진해져만 갔다.

“크하하하! 내가 붕걸이다! 네놈은 누구냐!”

이때 재수 없게 칼을 들이대는 훈보. 그는 지금의 칼부림을 끝으로 도주하리라 마음을 먹고있는 상태였다. 초혼은 귀찮은 벌레를 떼어내듯 한쪽 손을 뿌렸다.

퍽!

그 소리와 더불어 훈보는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터져 버렸으니까.

‘…….’

지금의 상황과는 별개로 싸움은 계속 진행되었고, 초혼은 주저앉아있는 소홍을 더할 수 없이 자상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가씨.”

소홍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초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초혼이 웃는 것을.

‘아?’

소홍은 멍한 모습으로 초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평소의 무표정하고 냉랭한 초혼이 아닌 더없이 자상하고 따스한 얼굴의 초혼. 완전히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초, 초혼.”

초혼은 그 미소를 지우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두렵습니까?”

끄덕끄덕.

“그렇다면 문영이가 아가씨의 곁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십시오. 그리고, 그 옆에는 제가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뭔지는 몰랐다. 그러나 소홍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고, 그녀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내 곁에는 문영이와 초, 초혼이…….”

초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자아, 일어서십시오. 두려움이란 누구에게나 있는 법. 그러나 저와 문영이는 언제나 아가씨를 지켜드릴 겁니다.”

소홍은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 초혼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하지만 쓰러지기 전의 소홍과 손을 잡고 일어난 지금의 소홍은 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잡고 있던 초혼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초혼은 한순간 흠칫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이어 그녀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초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한발 물러섰다. 소홍은 이를 악물고 이제 끝나가고 있는 싸움을 주시했다.

‘피, 살육, 비명. 일방적인 도살.’

용기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고 이내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는 문영이와 초혼을 번갈아 보았다.

‘도망칠 수는 없다. 난…, 난!’

드디어 결심을 내린 듯했다. 불끈 쥔 소홍의 두 주먹은 무엇이라도 으깰 듯 단단해졌고, 보보(步步)마다 내딛는 그녀의 걸음은 막힘없이 뻗어나갔다.

‘난 만독문의 소문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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