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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03화


나를 웃겨라.

똑―, 똑…….

어두운 밀폐된 방안. 천장 어딘지 모르게 물이 새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한구석 벽에 두 손을 묶인 채 매달려있는 세 사람 모두 말이다. 제일 좌측의 인물은 사십 대 중반의 사내로서 머리카락이 거의 빠져나간 모습이었고, 중간의 밋밋한 용모의 소년은 아직 청년이라고 하기엔 좀 모자란 듯한 앳된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오른쪽에 묶여있는 소년은 중간의 소년과는 반대로 냉철한 눈빛과 강인한 인상 덕택에 스무 살 안팎의 연령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모두들 거지같은 몰골에 거의 벌거벗다시피 했고, 그나마 천 조각으로 아래의 중요한 치부만을 겨우 가리고 있는 상태. 그들은 많이 지쳐있는 듯했다.

“크크크큭, 이히히히!”

갑자기 중간의 소년이 음산하게 웃었다. 그러자 우측의 청년이 힘들어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주군…….”

주군이라 불린 소년이 약간 맛이 간 듯한 매서운 눈동자를 홱 돌렸다. 허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청년의 동공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마주 보던 그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시기에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그리고 중간의 소년이 방금 전과는 다르게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연아, 난 말야. 예전에 어떠한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어.”

그가 도연이라면 그의 주군은 당연히 동천. 그렇다면 좌측의 인물은 이변이 없는 한 중소구. 아니,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중소구가 맞았다. 그런데 이들이 어째서 이런 곳에 묶여있는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우선 동천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제목은 ‘내일을 향해 쏴라.’였지. 뭘 쏘는지는 지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책 속의 주인공이 부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했었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라고 말이야. 그때 나는 ‘미친놈, 삽질하네…….’라고 말한 뒤, 집어던졌던 걸로 기억해. ……그런데 말야. 흑흑, 이제야 나는 깨닫고만 거야. 그래, 너나 나나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어. 그 책의 주인공은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아아, 그때 그 주인공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지금 나의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만은 않았을 텐데…….”

듣다 듣다 도저히 못 참겠는지 좌측의 중소구가 고깝다는 눈으로 동천을 째려보았다.

“이놈아! 네가 지금 책 속 주인공의 심정을 헤아려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한 소리 듣게 된 동천은 열받은 얼굴을 하곤 다리로 중소구를 걷어차려 했다. 아쉽게도 다리에 묶인 쇠사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뭐? 이 미친 대머리야! 그게 내 맴이지 네 맴이냐? 내가 내 맴 가지고 내 맴대로 하겠다는 데, 네 맴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내 맴을 네 맴의 잣대로 가늠하려고 한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내 맴이 네 맴에게 꿀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시점에서 어디 그 뚫린 입으로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중소구는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동천이 옳은 소리를 줄줄 쏟아 부어서가 아니라 워낙 헷갈리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정리를 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이놈의 자식이!”

그때 도연이 또다시 반복되려는 쓸데없는 소모전을 미리 차단시켰다.

“그만들 하시지요. 서로 힘을 모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 무슨 경거망동한 행동들입니까.”

중소구는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고, 동천은 혼자 씨부렁거린 뒤에야 잠잠해졌다. 그로 인해 한동안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궁금한 것이 있었던 듯 동천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야. 그 여자애는 누구였을까?”

동천은 당연히 도연에게 물었고 도연 또한 자신인 줄 알고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있잖아. 5년 전, 그 객점에서 만났던 여자애. 정화에 비견될 정도로 굉장히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즘 들어서는 가물가물해진 탓인지 그 애의 생김새가 기억이 안나. 넌 기억 나냐?”

도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도연의 머뭇거림과 평범한 천재인 자신조차 기억이 흐릿하다는 것 때문인지 동천의 눈살은 잔뜩 찌푸려졌다.

“진짜 그 애의 말대로인가?”

자연스레 도연의 고개가 주군 쪽으로 돌아갔다.

“뭐가 말입니까.”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했던 말, 말야.”

“예?”

도연이 의아한 반문을 했지만 동천은 이미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든 뒤였다. 이럴 때엔 맞아야만 정신을 차리는 동천인지라 그럴 사람이 없기에 도연은 하는 수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동천의 뇌리는 점점 그때의 일로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야.”

“예?”

“야.”

“예.”

“야.”

“예.”

“야.”

“…….”

“…….”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동천과 도연은 영양가치가 전혀 없는 말들을 늘어놓다가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동천은 뒤따라오는 성가신 것들 때문에 큰소리로 고함을 칠 수 없는 자신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뒤, 둘만이 알아들을 정도로 아주 자그맣게 말했다.

“소구는 그렇다 치고, 저 인간들은 왜 우리하고 같이 가는 거지?”

동천이 말하는 저 인간들이란 황룡세가에서 파견이 된 좌태상과 육장로였다. 중소구도 짜증이나 죽겠는데 그들 덕분에 시야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계속 유지시켜야 한다는 현실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심중을 눈치챘는지 도연이 공손하게 대답해주었다.

“어제 저분들께서 우리가 제갈세가로 향한다는 것을 아시고,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시더군요. 제가 도련님께 말씀을 드려보겠다고 했는데 중 대인께서 그새를 못 참고 허락을 내리신 터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순간 날카로운 동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이야?”

“정말입니다.”

도연의 말이 끝나고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동천의 경우는 침묵이라고 다 같은 침묵이 아니었다.

‘소구야, 소구야. 잠시 풀어줬더니 네가 이젠 발정 난 개새끼처럼 사사건건 다 끼어드는구나.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 아아, 정녕 그러한 것인가? 좋다. 그렇다면 네 제삿날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동천. 그러나 그의 얼굴은 뒤로 돌려지는 그 순간 장로들에게 새하얀 웃음을 띄웠다.

“하하, 이제야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같이 가주신다니 저희로서는 든든합니다.”

중소구와 예의상 몇 마디 주고받고 있었던 좌태상 만한상(滿罕祥)은 허허롭게 웃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본 늙은이로서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이 간단한 대화를 끝으로 동천은 그들에게 신경을 끊었고, 평소 중소구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육장로 장춘(張椿)은 이 기회에 중소구와 떨어지려는 듯 사색에 잠겨있는 동천에게 다가갔다.

“네 이름이 동철이라고?”

“개새끼는 아무래도 초복보다 말복이…….”

육장로는 이놈이 뭔 소리를 지껄이나했다.

“으응? 난데없이 무슨 소리더냐?”

소구의 제삿날을 점지하고 있었던 동천은 얼른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예? 아, 그게에에……. 하하, 복날의 개는 말복에 잡아야 맛있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르는 바람에 저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쓸데없는 거니까 육장로님께서는 그러려니 하십시오.”

아무래도 이상하여 역팔자로 눈썹을 휘저은 장춘. 그러나 그는 한 문파의 장로답게 금세 평상심을 되찾은 뒤, 휘휘 손을 저어댔다.

“육장로라고 하면 너무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군. 그러지 말고 장 어르신이라 부르거라.”

장춘의 말이 뭔가 이상했는가? 앞 머리칼에 가려진 동천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뭐야, 이 할아범. 나하고 언제 친했다고 이러는 거지? 설마, 내 정체를 알아내고 싶어서 먼저 친근하게 구는 건가?’

장춘의 노련함은 동천의 이러한 생각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보았고, 그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제갈세가까지는 적어도 열흘. 이번 우리의 임무가 신분을 내놓고 나다니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지라 그동안 조심하자는 취지에서 그렇게 불러달라는 것이니라.”

그제야 동천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허허, 그렇지.”

그때, 1장 간격으로 뒤따라오던 중소구가 지레짐작으로 소리쳤다.

“이놈아,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

부르르르.

동천의 신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소구가 자꾸 그의 성질을 박박 긁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뭔가 잘못 보여 그런 줄 알았다. 허나, 이제와 생각하면 그게 아니라 심심풀이 땅콩처럼 입이 근질거릴 때면 한마디씩 툭툭 쏘아대는 것 같았다.

‘으으, 내 저놈의 개새끼를…….’

그때였다.

“저 정신 나간 인간의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없단다.”

장춘이 내뱉은 위의 이야기. 장춘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동천에게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오오, 이 감로수 같은 이야기는 그 어느 고인의 읊조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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