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06화
바둥거리던 여자아이는 울먹이는 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죄, 죄송해요, 좌태상 어르신. 제가 다 잘못했어요.”
만한상은 자신을 알고 있는 여아가 의외였는지 약간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나를 아느냐? 넌 누구냐?”
만한상이 손을 놓자 여아는 두려운 듯 멈칫멈칫 거리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여아의 용모를 확인한 장춘이 소리쳤다.
“아니? 넌 아가씨의 몸종인 추연이 아니더냐!”
눈물에 범벅인 얼굴로 떨고 있던 추연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자 참고 있었던 울음을 터뜨렸다.
“와앙! 죽을 죄를 졌어요. 흑흑, 아,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만한상은 그런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자자, 침착하고 울음을 그쳐라. 여기 아무도 너를 혼내지 않을 것이니.”
자애로운 목소리 덕분인지 한도 끝도 없이 울어댈 것만 같았던 추연의 울음소리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흑, 훌쩍. 훌쩍.”
중소구는 아직 확실한 것을 모르겠던지 한마디 물었다.
“아가씨라면 황룡세가의 그 넷째를 말하는 것이오?”
장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순히 넷째라는 말이 듣기에 거북했던 모양이다.
“그 넷째라니. 당신 혼자나 본가의 사람들이 없는 데에서는 뭐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본 장로나 좌태상 어르신 앞에서는 말조심하시오.”
자유분방했던 중소구의 입장에서는 장춘 못지않게 거슬리는 말이었지만 그도 예의라는 것을 알기에 퉁명스럽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알았소이다. 내 잠시 말이 헛나왔소. 됐소이까, 육 장로님?”
만한상은 욱하는 장춘을 제지시키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추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혼자 왔느냐.”
순간 추연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 그게……. 훌쩍.”
만한상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 신형을 돌렸다.
“우선 따라오너라.”
장춘과 중소구는 왜 여기에서 물어보지 않는 걸까 의아했지만 이내 무방비로 놔두고 온 아이들이 떠오르자 먼저 움직여 동천과 도연이 있는 곳으로 냉큼 달려갔다. 그새 도연을 꾸짖고 있었던 동천은 사람들이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밝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떻게 됐어요? 누가 있긴 있었습니까?”
중소구가 도연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장춘이 가르쳐주었다.
“허허,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글쎄 미미 아가씨의 몸종인 추연이라는 아이가 여기까지 따라왔지 뭐냐.”
동천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추연이요?”
“왜, 알고 있느냐?”
순간 부인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녀가 온다면 다 밝혀지는 일인 고로,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그럼요. 엊그제 미미 아가씨를 뵐 기회가 있었는데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 말씀하신 추연이 맞죠?”
장춘은 ‘옳거니.’ 하고 말했다.
“그 아이가 맞다. 그리고 저기 좌태상님과 같이 오는구나.”
동천이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탓에 용모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과연, 자기 또래의 여아가 언뜻 비추는 달빛 사이로 드러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만한상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2장 여의 거리를 사이에 둔 시점에서야 동천은 그녀의 용모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진짜네. 근데 쟤가 여기는 어떻게 왔지? 헉! 서, 설마 나에게 반해서?’
택도 없는 상상으로 대가리를 채운 동천은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모습을 보고 더욱 확신을 굳혔다.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하지만 난 이미……. 아아, 잘생긴 것도 죄로다.’
그때 도연이 물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애꿎은 손톱을 깨물며 괴로워하던 동천은 급히 제정신을 차렸다.
“응? 으응, 아,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쓸 거 없어.”
중소구는 그런 동천을 보고 말했다.
“저 녀석 저러는 거 한두 번 보는가? 신경을 끄게.”
맞는 말이었지만 듣는 동천은 엄청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지가 어쩌겠는가. 그는 그저 ‘때는 온다.’라는 것만 중얼거리며 내심 이를 갈 뿐이었다. 동천이 그러고 있는 사이, 추연을 데려온 만한상은 그녀에게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너 혼자 오지는 않았을 터. 아가씨는 어디에 계시느냐.”
움찔한 추연은 다시 울음 섞인 어투로 찔끔찔끔 대답했다.
“그,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가, 같이 오, 오시긴 오셨는데…….”
추연의 말은 이랬다. 가주님 몰래 일행을 따라나선 황룡미미는 만한상 일행의 뒤를 봐주고 있는 특수부대인 전룡대(電龍隊)의 눈에 띄어, 그만 황룡세가로 돌려보내지게 되었는데 같이 대동한 대원 두 명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빙 돌아서 만한상 일행을 좇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추연이 잘못으로 나뭇가지를 밟아 들키게 되자 그녀를 놔두고 먼저 몸을 숨겼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게 된 중소구는 ‘그 아가씨 참으로 대단하군.’이라며 은근히 비꼬았고, 만한상과 장춘은 얼굴이 달아올라 할 말을 잃었다. 상황이 대충 이해는 가지만 자신의 몸종을 미끼로 삼아 몸을 숨겼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러웠던 것이다. 옆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던 동천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도연에게 전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따라오고는 싶은데 잡히면 또 전룡대의 경우처럼 송환될까 봐 제갈세가로 도착하기까지는 몸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냐?』
『엉뚱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렇습니다.』
도연의 확답까지 듣고 난 동천은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재수 없게 시리 그년은 왜 또 따라오고 지랄인 거지? 씨팔, 콱 잡혔어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중소구가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본래의 신분이 들통나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본심이 어떠하든 표면상으로는 걱정스러운 모습을 했다.
“어르신들.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한상은 난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야지. 헌데 아가씨의 성격으로 봐서 안정적인 영역 권까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셨을 텐데, 지금 이 한밤중에 어떻게 찾는다. 허, 이것 참.”
그때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던 추연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기, 아가씨께서 만일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머물게 되는 객점이나 주루의 창가에 붉은 수건을 걸어 놓으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흐음, 그렇다면 애써 아가씨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이대로 걸어가 인근 마을에서 제일 처음 보이는 곳에 머물러야겠구나.”
만한상과는 반대로 장춘은 이대로 가는 것이 찜찜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만약 자신이 찾는다고 나섰다가 아가씨께서 눈치를 채시고 더 멀리 달아나면 일이 더 꼬일 수도 있는 것을……. 어쩔 수없이 그도 수락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좌태상 어르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제 마을은 얼마 안 남았으니 모두 박차를 가하도록 합시다.”
일동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서둘러 얼마 안 남았다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일각 여를 걸어갔을까? 힐끔 추연을 살펴보던 동천은 그녀의 걸음걸이가 이상하여 자세히 눈여겨보던 중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가만? 쟤는 무공을 모르잖아?’
그렇다.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그녀가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죽을 고생을 하며 따라왔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이도 아니고 저만 아는 황룡미미가 뒤처지는 그녀에게 얼마나 모진 재촉을 했었겠는가. 그런 생각에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동천은 집게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보았다.
“아아….”
아니나 다를까. 추연은 슬쩍 건드린 것만으로도 균형을 잃고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그녀가 쓰러진 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렸고, 동천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추연에게 등을 보인 채 무릎을 꿇었다.
“업혀.”
추연은 흠칫했다.
“예? 아, 저기.”
추연이 어쩔 줄을 모르고 굳어있자 동천은 이제껏 보인 적이 없었던 싸늘함을 내비쳤다.
“업히라고 했지.”
그의 싸늘함은 추연이 아닌 황룡미미에게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신에게 화가 난 줄 알았던 추연은 자신도 모르게 업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