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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07화


그것을 본 사람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오직 중소구만이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눈초리로 동천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얼떨결에 업혀버린 추연은 발갛게 익어버린 얼굴을 하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빠드득.

그 순간 동천이 이를 갈았고, 찔끔한 추연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동천이 냉랭해진 원인이 모두 자신의 탓인 줄 알고 있었다.

‘아아,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화가 나셨나 봐. 어떻게 하지?’

미미를 향한 불만이 한도 끝도 없었던 동천은 살기 어린 눈으로 어딘가에 있을 황룡미미를 죽일 듯이 씹어 삼키고 있었다.

‘저만 아는 심술보 계집애 같으니라고. 오려면 지 혼자만 올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추연이를 동반해 데려와? 만나기만 해봐라. 똥구녕을 찢어줄 테다!’

정작 만나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심정은 그러했다. 추연은 동천이 자신을 업고도 생각 외로 빠르게 걸어가자, 떨어질까 무서워 동천의 목을 꼬옥 끌어안고 있다가 깜짝 놀라 팔을 풀며 괜스레 혼자 무안해했다.

“저, 저기. 무거우시면 내려놓아도 되는데요.”

“안 무거워.”

“네에….”

옆에서 주군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던 도연은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알긴 아네?’라는 말들을 늘어놓았을 것이 분명한데 의외로 진지한 주군의 행동이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는 진짜로 화를 내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는지라 주군이 새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여하튼 그 뒤로 추연은 입을 다물고 푹 고개를 숙였고 일행은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산을 벗어나 멀리 보이는 마을의 초입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옳지. 저기 보이는 객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만한상이 장춘에게 의견을 구하자 장춘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의외로 중소구가 자신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았음에도 잠잠했었는데 그 이유는 경비를 모두 만한상이 부담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저곳으로 가 오늘 하루 묵기로 하지.”

예상외로 시간이 지체된 탓에 때는 자정을 훨씬 넘어선 상태였다. 마을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사람들은 없었고 오직 집 지키는 강아지들만이 간간이 밥값을 하느라 짖어댈 뿐이었다. 쉴 곳을 찾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일행의 걸음걸이는 자연스레 빨라졌고 업혀있던 추연은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듯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공자님. 이제 내려주심이…….”

“응? 그래, 그러지 뭐.”

동천은 순순히 허락했다. 드디어 동천에게서 떨어진 추연은 그동안 호강하던 발들이 땅을 디디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눈물을 찔끔했다. 하지만 그녀는 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머, 먼저. 드, 들어가세요.”

그녀의 찡그려진 얼굴을 봤는지 도연이 물었다.

“괜찮겠어?”

추연은 황급히 허리를 펴고 씩씩하게 말했다.

“네. 네에, 보다시피 괜찮아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번 이를 갈고 일행을 따라 들어간 동천은 잠에서 덜 깬 점소이가 하품을 쩍쩍해가며 남아도는 방의 번호를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암, 그러니까 5호실하고 7호실. 그리고 7호실 바로 옆에 특실이 하나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뭐, 특실이라고 해봐야 그게 그거지만 그쪽은 목욕할 때 향료(香料)가 무료로 제공되니까 묵고 싶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도통 의지가 없어 보이는 점소이를 뒤로하고 만한상이 자신의 의견을 내비쳤다.

“5호실과 7호실은 떨어져있고 7호실과 특실은 붙어있으니, 붙어있는 쪽으로 두 개의 방을 잡는 것이 어떻겠는가들.”

장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한 방에 들어갈 사람들은 어떻게 짜는 것이 좋겠습니까?”

중소구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냐며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모두 여섯이니 아이들 셋. 어른 셋. 이렇게 방을 잡읍시다.”

장춘은 그런 중소구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아이들끼리 재웠다가 불의의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그런 의견을 내놓으셨소.”

“엉? 그게 또 그러네?”

“나 참, 그러지 말고 한 방은 어른 하나에 아이 둘을 맡고, 다른 한 방은 어른 둘에 아이 하나를 맡아서 자기로 합시다.”

중소구는 쾌히 승낙했다.

“좋아, 좋소! 그럼 본 대인과 도 소형제는 같이 자기로 낙찰된 것이니 우리들은 아무 곳에나 끼워 주시오.”

도연은 언제 그런 낙찰이 이루어졌냐는 듯 중소구를 바라봤지만 뭐라 말하진 않았다. 여기서 반박하면 중소구가 무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러자 도연의 침묵을 허락으로 생각한 장춘은 동천과 추연을 지목했다.

“추연은 본가의 아이니 마땅히 내가 도맡겠소. 동철 너는 어떠하냐. 본 할아비와 같이 자겠느냐?”

장춘과 같이 안 자면 그대로 중소구와 자게 되는데 미쳤다고 동천이 반대하겠는가? 그는 소구와 따로 잔다는 사실에 기분이 째졌지만 실실 웃으면 중소구가 꼬투리를 잡고 나설까 봐 차분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장춘은 그러한 동천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사이 상황을 정리한 만한상은 점소이에게 방값을 내주었고, 일행들은 아직도 하품을 해대는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이층으로 올라갔다.

“허허, 특실은 여아인 추연이 끼어있으니 장춘 자네가 묵게.”

“알겠습니다. 만 어르신도 푹 쉬십시오.”

“자네도 편히 쉬게나. 자아, 중 대인과 도연이도 들어가십시다.”

도연은 중소구를 따라 들어가며 동천에게 고개를 숙였고 눈짓으로 인사를 받은 동천은 점소이에게 목욕물을 시킨 뒤, 말만 특실인 곳으로 들어갔다. 헌데, 내부는 그런대로 넓었지만 곤란하게도 침대가 둘 뿐이었다.

“허어, 이거 어쩐다?”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추연은 자청해서 사양했다.

“저, 저는 미천한 것이오니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그러자 동천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다가는 피로가 겹쳐서 큰일이 나서 안돼! 차라리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네가 침대에서 자!”

기겁을 한 추연은 바닥에 엎드렸다.

“예? 어떻게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명을 거두어주세요.”

장춘도 동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추연의 말이 옳았다. 황룡세가의 장로 신분인 그가 바닥에서 자는 것도 말이 안 될뿐더러 추연은 일개 하녀였으니까 말이다. 이 상황에서 하녀가 바닥에서 자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철아, 네 맘은 알지만 저 아이의 신분은 하녀다. 침대가 세 개라면 모를까 감히 하녀가 본 장로나 손님의 침대를 빼앗을 수는 없는 법이지.”

추연은 엎드린 상태에서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저는 바닥에서 자는 것이 이력이 났사오니 동 공자님께서는 전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수긍할 수가 없었던 동천은 고민 끝에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뭘 말이냐.”

“다름이 아니라 장 어르신과 제가 같은 침대를 쓰고 저 아이가 남은 침대를 사용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추연은 아예 고개조차 못 들고 애원하듯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나중에 세가에 알려지면 어떠한 벌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제 신경은 쓰지 마시고 제발 편히 주무세요.”

“안 된다고 했지! 그리고 누가 세가에 발설하겠느냐, 장 어르신이? 저분께서 그럴 분이라고 생각해? 아니지? 그럼 잔말 말고 있어!”

목욕물을 나르던 점소이는 저것들이 뭔 짓을 하나 의아해하면서도 계속 따뜻한 물을 퍼 날랐고, 두 아이의 고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장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모두들 조용히 해라. 휴우, 좋다. 동철이 네 뜻대로 하자꾸나.”

“감사합니다, 장 어르신!”

“허허, 살다 이런 일을 다 겪는구나.”

장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동천은 어리둥절해하는 추연에게 말했다.

“이제 장 어르신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군말 없을 것이다. 설마 윗분의 명령을 거역할 만큼 간이 큰 건 아니겠지?”

추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어찌.”

그때 자기 할 일을 다 끝마친 점소이는 얼른 자고 싶은 마음에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손님, 다 퍼 날랐습니다.”

“그래? 가봐.”

시큰둥하게 대답한 동천은 이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궁시렁대며 나가는 점소이를 불러 세웠다.

“이봐, 그러고 보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어. 별것 아니지만 받아.”

갑자기 밝아진 점소이는 있는 대로 굽실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즐겁게 주는 것을 받아든 그는 손안이 끈적여지자 이상한 마음에 손을 펴보았다. 그러자 눅눅해진 엿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순간 점소이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엿 먹어라.

“…….”

동천은 아직도 안 가고 있는 점소이에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뭐야, 더 달라고? 안돼, 그게 다란 말야.”

어처구니가 없어야 할 사람은 도리어 점소이였다. 그는 한쪽 이마에 핏대를 팍팍 세우며 어눌한 어투로 말했다.

“하, 하하. 됐습니다, 손님.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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