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09화
“아하암, 쩝.”
진한 하품을 뒤로하고 동천은 깨어났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은 그가 성의 없게 쓰다듬자 어느 정도 형체를 유지하며 어깨 너머로 랑거렸다. 고개를 돌린 동천은 옆 침대에서 아직까지도 잠들어있는 추연을 볼 수 있었다. 혼혈을 집을 당시, 금세 풀어질 정도로 세기를 조절했는데 풀린 뒤에도 깨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녀가 그 당시 얼마나 피곤에 절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명백한 증거였다. 즉, 혈도가 풀렸어도 잔 김에 깨어나지 못하고 그냥 디비잤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추연에게 다가가 대각선으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려 잘 덮어주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응? 그나저나 장 어르신은…….”
이리저리 둘러본 동천은 이내 장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구석진 곳이었고, 장춘이 그곳에서 세상을 다 산 듯한 몰골로 쭈그리고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분위기상 괜히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봐버린 상태에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저기, 잘 주무셨어요?”
“…….”
허무한 장춘의 눈동자는 영 되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그것을 본 동천은 찜찜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파고들진 않았다. 아는 척을 했으니 자신의 입장에서는 예의를 다한 셈이니까. 괜히 건드려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그에게 관심을 끊어버린 동천은 눈을 뜨면 늘 그렇듯 슬슬 배가 고파지는 것을 느꼈다.
‘저 인간이 뒈지던 맛이 가던 알 바 아니지만 배고픈 것만은 도저히 못 참겠다.’
동천은 식사를 하러 문을 열어젖히고 일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자 뒤쪽을 향해 신형을 약간 비틀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만한상이었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만한상은 동천의 아침 인사에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래. 간밤에 시끄러웠을 텐데 너도 잘 잤느냐?”
세상모르고 꿈나라에 빠져 있었던 동천으로서는 뜻밖의 이야기였다.
“시끄러웠다고요? 저는 전혀 못 느꼈는데?”
간밤에 애꿎은 벽에 머리를 처박던 장춘이 급기야는 ‘나 같은 건 죽어야 해!’라며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만한상과 중소구, 도연은 물론이고, 투숙하고 있던 모든 손님들까지도 깨어나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었는데 동천이 그것을 못 들었다고 하자 기가 막히는 만한상이었다.
“허? 정말로 못 들었단 말이냐?”
동천은 내심 짜증이 일었다.
‘이 노친네가 귀가 먹었나.’
그건 도리어 만한상이 생각해야 했다. 아무리 잠귀가 어둡다 해도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그 난리를 쳤는데 깨어나지 않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못 들었다는데 그가 어쩔 것인가. 또 못 들으면 어떠한가. 그로서는 장춘의 치부를 가릴 수 있어 오히려 잘된 일이지. 여하튼 동천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대꾸는 해줘야 했다.
“정말로 못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깨어났을 때 장 어르신께서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만한상은 어제의 일을 굳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라, 모른다고 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단다. 좀 피곤해서 그런가 보구나. 그리고 어제의 소란은 별것 아니었단다. 못 들었으면 그걸로 된 거야.”
담담한 만한상의 어투에 동천은 ‘정말로 별것 아니었나 보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배가 더욱 고파짐을 느꼈다.
“제가 지금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는 중인데 괜찮다면 같이 하시겠습니까?”
말이 괜찮다면이지 그 속내는 ‘안 처먹을 거면 꺼져!’라는 싸가지 없는 말이었다.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살아왔던 만한상으로서는 그러한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걸걸한 웃음을 뿌렸다.
“허허, 먼저 내려가 자리를 잡고 있거라. 나는 사람들을 깨워서 같이 내려갈 터이니.”
동천은 경로우대사상에 입각하여 자신이 나서 사람들을 깨우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동천의 생각을 빌리자면,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인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경로우대란 말인가.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 다른 분들 것도 시켜놓을까요?”
“그래주겠느냐?”
“예, 어르신. 시켜놓을 테니 다녀오십시오.”
대화를 나누고 재빨리 내려온 동천은 신속하게 음식을 시킨 뒤 이제나저제나 시킨 것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으으, 왜 이렇게 안 나와? 이것들이 오늘을 끝으로 장사 때려치우고 싶나.’
그가 흐르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을 때 나오긴 나왔다. 문제는 그게 사람이라는 것이었지만.
“아직 안 시키셨습니까?”
힐끔 쳐다본 동천은 내려온 인간이 도연 하나뿐이자 본래의 말투를 사용했다.
“왜 너만 내려오냐? 나머지는 안 처먹겠대?”
도연은 마주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 소란을 피우셨던 장 어르신께서 아직까지 침울해하시자 중 대인과 만 어르신께서 모시고 내려오시기 위해 특실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만 먼저 온 것입니다.”
아까는 그러려니 넘어갔었던 동천이었지만 다시 그 문제가 거론되자 이번에야말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장 영감이 약간 이상했다면서? 이 몸은 하도 피곤하게 주무셨는지라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니까 자세히 말해볼래?”
도연은 기억을 더듬어 차분히 말해주었다.
“별 내용은 없습니다. 제가 나왔을 때는 장 어르신께서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소리를 치시는 것밖에 못 봤죠. 그리곤 사람들이 나오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셨고 그게 끝입니다.”
동천은 대번에 인상을 구기며 거북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맛탱이가 간 영감하고 같은 방에서, 더군다나 한 침대에서 잤다고 생각하자 과히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이다.
“그 외에 별다른 난동은 없었고?”
“예.”
더 없다고 하는데 동천이 뭐라 하겠는가. 그는 그렇게 넘어갔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헌데, 바로 그때 불현듯 동천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가만, 나 같은 건 죽여야 한다고 지랄을 했다고?’
뭔가 불길했다. 그런 쪽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추연이의 침대가 흐트러져 있었다. 설마…….’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긴 동천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리요.
‘마, 맞아! 앞뒤가 딱 맞아. 아닌 밤중에 기어 나와 자책감에 몸부림을 쳤다던 장 늙은이, 흐트러진 추연의 침상. 구석에 처박혀있던 그 늙은이의 절망 어린 눈동자! 아아, 이를 어찌할꼬!’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확신으로 굳혀버린 동천은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추연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크윽, 다 이 몸의 불찰이로다. 추연아!”
도연은 자신의 주군이 황룡세가의 시녀를 부르며 괴로워하자 그 또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계셨던 걸까?’
주군이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것을 풀어주는 것 또한 수하의 임무. 도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아이를…….”
도연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식사를 하던 손님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입구 쪽으로 향해 있었는데 마침 두리번거리던 도연도 그쪽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터져 나오는 탄성.
“아?”
망상에 빠져 있던 동천은 주위의 소란스러움을 감지하곤 고개를 쳐들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왜들 그러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뭐야, 불이라도 났어?”
동천은 자신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도연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동천의 고개도 뒤로 돌아갔고 그는 입구 쪽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