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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16화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동천의 물음에 부진한이 말했다.

“우선 자네가 이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본가의 어르신께 허락을 맡아야 하므로 지금 내빈당(內賓堂)에 가는 것이네.”

처음에 부진한은 동천에게 ‘야, 너’ 거리며 하대를 해댔지만 황룡미미가 동 공자라고 하자 그제야 그도 말을 가리게 되었다. 동천으로서는 황룡미미가 한 짓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가주님은 황룡세가에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도연이 말문을 열자 부진한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지. 그래서 가주님의 아우이신 제갈공(諸葛空)께서 그동안 이곳을 맡게 되는 거란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더 이상의 말없이 부진한을 따라 내빈당에 당도했다. 손님을 앉혀놓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던 부진한은 시비를 시켜 기별을 하라 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궁금한 점들을 간간이 해소해주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부진한이 벌써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제갈공께서 오셨나 봅니다.”

동천은 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서 일어나기 싫었지만 모두들 일어나는지라, 욕을 머금고 그도 따라 일어나야 했다.

‘이따위 예의범절은 어떤 인간이 만든 거야? 에이, 귀찮아.’

동천이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 증거로 방안에 들어온 중년인에게 모두들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올리고 있었으니까. 내심 불만이 많았던 동천은 그 중년인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저게 왜 꼴아 보지?’라는 생각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오직 자신만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튀어 보이는 애새끼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 내심 당황한 동천이었지만 행동은 전혀 딴판이었다. 친근한 미소를 떠올리며 뒤늦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러자 제갈공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하, 뭔가 있어 보이는 아이로구나.”

앞쪽에 있어 동천의 행동을 보지 못했던 부진한은 제갈공에게 살며시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요.”

제갈공은 유쾌한 기색을 띄우며 한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저 훌륭한 자질의 아이들을 보았기에 절로 흥이 났을 뿐이야. 그래, 저 아이들이 한(漢) 노사님을 뵙고자 찾아왔다고?”

이때 중소구가 나섰다.

“어험! 거기에 본 대인도 끼어 있소이다.”

제갈공과 부진한의 대화 도중 중소구가 끼어든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비록, 임시일지라도 지금의 제갈공은 엄연히 가주 대리인 것이다. 제갈공의 입장에서는 불쾌할 만도 하건만 그는 개의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실례했소이다. 내 잠시 중 대인을 빠트렸구료.”

제갈공을 대신해 부진한이 인상을 쓰고 있는 가운데 중소구는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됐소이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하하!”

제갈공은 ‘듣던 대로 정도가 넘치는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며칠 머물다 갈 것이기에 그로서는 신경을 끊으면 상관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려는 듯 중소구에서 동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확인할 필요도 없지만 황룡 가주님께서 친히 소개장을 써주셨다 하니,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것을 보여주겠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동천이 건네준 것을 차근차근 읽어본 제갈공은 읽는 내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서찰을 내려놓았다.

“흐음, 잘 읽었다. 확실히 고대 문자라면 그분이 제격이지. 황룡 가주님의 소개장이 아니더라도 그런 문제라면 이쪽에서도 찬성이란다.”

허락을 맡아 기뻐진 동천은 자신도 모르게 히히거리며 웃을 뻔했다. 그는 조심 또 조심을 마음속으로 상기시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막힌 것을 풀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헌데…….”

“무슨 또 다른 하명이라도 있습니까?”

“하명이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느냐. 다만…, 아니다. 급하지 않다면 내일쯤 찾아뵙도록 하거라. 불쑥 찾아뵈어 그분의 시간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

동천은 뭔가 숨기는 구석이 있자 심기가 불편했지만 제갈공 앞이라 감히 내색하지 않았다. 욕 같은 것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해도 충분했으니까. 긍정을 표하고 밖으로 나온 동천 일행은 황룡미미와 따로 떨어져 부진한을 뒤따라갔다. 그녀는 친구로 지내던 제갈연(諸葛淵)에게 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동천은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히히, 미미 년과 떨어지니까 속이 다 후련하네.’

“뭐가 좋아서 웃냐?”

중소구가 물어오자 좋던 기분이 싹 날아가 버렸다.

‘저 새끼는 눈칫밥 먹다가 뒈진 귀신이 달라붙었나. 뭔 놈의 눈치가 저리도 빨라?’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동천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웃는 낯이어서 중소구가 눈치챈 것이었지만 지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어쨌든 동천은 솟구치는 살심을 억눌러야만 했다.

“좋은 것은 당연하지요. 드디어 그분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천이 그랬던 것처럼 중소구도 그 나름대로 동천이 못마땅했다. 그러다 보니, 동천의 가식적인 말투까지 귀에 거슬렸다.

“폼 잡지 말고 원래 말투로 해.”

동천은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이제와 저는 이런 말투가 자연스러우니 불편한 심기를 다스리시지요.”

그것을 놀림받았다고 착각한 (어찌 보면 맞는 생각이다) 중소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놈이 정말?”

그때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은 부진한이었다. 그는 ‘쉬잇!’하고 말했다.

“조용히 하시기 바라오. 이제부터는 한림서원에 들어가기 때문에 큰 소리는 용납할 수 없소이다.”

주위를 두리번둘러본 동천은 한림서원이라는 티가 전혀 안 나자 궁금해하는 얼굴로 물어보았다.

“한림서원이 어디에 있는데요?”

그의 뜻대로 조용해지자 부진한은 만족의 웃음을 띄우며 대답해주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있으니 따라오게나.”

따라오라는데 동천이 어쩌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니 그 말을 따를 수밖에. 그러나 조금만 이라던 부진한의 말과는 반대로 찾아가는 길은 꽤 걸렸고, 정작 도착한 곳에 멈춰 선 동천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게 뭐야. 여기서 사람이 살긴 사는 거야?’

동천이 이렇게 생각할 만도 한 것이 팔 병신이 지어도 눈앞의 집보다는 잘 지었을 법한 초라한 집이 담벼락도 없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고, 곳곳에 허물어진 기와 지붕은 비가 스며들기에 딱 좋은 구조로 방치되어 하늘을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런 집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한 동천이었다. 도연과 중소구의 표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그들의 생각이 일치하는 가운데 이럴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부진한은 창피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것은 사정이 있소이다. 그분께서 죽어도 자신께서 지으신 집이 아니면 안주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계셔서 저희로서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라오.”

부진한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키 작은 노인네가 문짝이 떨어져나갈라 조심스레 문을 열어 젖혔다.

“누가 오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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