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17화
매섭게 찢어진 눈매에 얄팍한 입술을 소유한 염소 수염의 노인은 동천에게 두 번째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인간은 제대로 생긴 줄 알았는데 전형적인 사기꾼 영감같이 생겼던 것이다. 여전히 붉힌 얼굴을 복귀시키지 못한 부진한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재빨리 인사를 올렸다.
“진한이옵니다.”
안면이 있었던 듯 노인은 단번에 부진한을 알아보았다.
“자네구먼. 헌데, 뒤에 따라오신 분들은 뉘신가?”
중소구는 언제나 그렇듯 한발 앞서 자신을 소개했다.
“험! 이 몸은 대인 중소구이고, 이쪽의 잘생기고 믿음직한 소년은 도연이라 하외다. 그리고, 그 옆에 놈은……별로 소개하고 싶지 않소이다.”
노인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아니, 왜?”
어째서 소개하고 싶지 않느냐는 물음에 중소구의 입이 마지못해 열렸다.
“왜긴 왜겠소. 하는 짓이 몹쓸 맞고, 조잘대는 주둥아리마다 하등의 배울 게 없으니 그렇지.”
안 그래도 매섭게 생긴 노인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지자 더욱 날카롭게 보여졌다. 노인은 동천을 향해 물었다.
“사실이더냐?”
분기를 참을 수 없던 동천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저분께서 그렇게 보셨다면 그런 것이고, 도연도 그렇게 보았다면 그 또한 그런 것이겠지요.”
노인의 물음이 이번에는 도연에게로 이어졌다.
“너 또한 그렇게 생각하느냐?”
도연은 언뜻 보아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중소구가 이미 판을 벌여 놓았는지라 지금에 와서 주군의 편을 들어주면 중소구가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틀린 말도 아니기에 도연의 입은 선뜻 열리지 못했다.
“이 문제는…, 감히 나서지 못하겠습니다.”
“어째서?”
“제가 저분을 보필하는 입장이라 그렇습니다.”
노인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좋게 말해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
도연이 단호히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중 대인께서 거짓말을 한 것이 되기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노인도 상황을 대충 이해했는지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긴 왜 왔는가?”
본의 아니게 한동안 소외당하고 있었던 부진한은 이때다 싶었는지 재빨리 나섰다.
“다름이 아니라 동철이라는 이 소년이 노사께서 고문자 해석에 탁월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뵙고자 해서 왔답니다.”
노인은 자못 못마땅한 얼굴로 동천을 바라봤다.
“네가?”
그런 노인의 시선에 당연히 기분이 나빠진 동천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위아래로 동천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일없어.”
“예?”
노인은 황당해하는 동천에게 다시 한번 인식시켜주었다.
“너에게는 해석해줄 수 없어.”
그리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짝을 닫아버렸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저러는 거지?”
동천으로서는 이런 의문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었다. 안 그래도 중소구가 개떡같은 이야기를 해대서 화가 치솟아 있었는데 이제는 사기꾼같이 생긴 노인네까지 그를 열 받게 한 것이다. 옆에서 코를 후비고 있던 중소구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왜 저러겠어. 네놈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단번에 거절한 것이지.”
“뭐요?”
중소구는 기회를 포착했다 싶어 씨익 웃었다.
“어쭈, 감히 본 대인에게 대드는 것이냐?”
잠시 이성을 잃었던 동천은 그제야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닫고 한 발 물러섰다. 지금으로서는 중소구를 억누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 그럴리가요. 하하, 제가 잠시 경솔했습니다.”
“왜? 좀 더 입을 놀려 보시지?”
“아닙니다. 입을 놀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 하하.”
주군이 궁지에 몰리자 하는 수 없이 도연이 나서게 되었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찾아온 보람도 없이 퇴짜를 맞았으니, 왜 퇴짜를 맞았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천은 도연이 준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중 대인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중소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흥, 궁금하진 않지만 도 소형제가 원하니 이쯤 해두마.”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갑작스러운 부진한의 말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부진한이 뭔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들 중 제일 다급했던 동천이 재빨리 물었다.
“이유를 알고 계시군요.”
부진한은 다소 씁쓸한 기색을 짓다가 중소구를 힐끔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네. 그 이유는 방금 중 대인의 말대로 한 노사께서 자네를 좋지 않게 보았던 것일세. 그분께서는 상대가 하류배라 생각하시면 절대 상대하지 않으시거든.”
동천은 이게 뭔 개소린가 했다. 하류배라니. 자신의 어디를 보고?(전부를 보고) 자신이 어디가 어때서?(당사자만 모른다)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어디 믿을 놈이 없어서 중소구의 말을 믿는단 말인가.
“으으, 그 말이, 그 말이…….”
너무도 분노한 탓인지 채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 건드리면 중소구고 뭐고 본능에만 따를 정도로 동천의 위험 수위가 차 올라 있었다. 도연조차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위험 수위였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의 사태를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중소구가 비아냥거리기 전에 재빨리 주군의 신경을 분산시켜야만 했다.
“저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직접 들어가 확인하겠습니다.”
그 소리에 귀가 쫑긋해진 동천은 혼탁했던 이성이 점차 맑아짐을 느끼곤 환한 얼굴로 도연을 대했다.
“오오, 네가 뭘 아는구나! 흑흑, 역시 이 몸에게는 너밖에 없어. 그런 의미에서 이거 먹을래?”
도연은 주군이 눌러 붙은 엿 조각을 건네주려 하자 정중히 거절하였다.
“괜찮습니다. 그건 도련님께서 아껴 드시던 것이 아닙니까.”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동천은 ‘하마터면 이 아까운 것을 이놈에게 줄 뻔했구나.’라는 생각에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빨리 들어가서 확인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도연을 고생시킨다고 생각한 중소구는 뚱한 어조로 말했다.
“하여간 가지가지 속 썩이는 놈이로다.”
중소구가 아직 동천의 경공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지, 쫓아가는 것이 아닌 직접 맞닥뜨릴 때의 동천은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비록, 결정타가 없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폐혈서생 때처럼 철경을 무기로 삼아 후려친다면 결정타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신의 무공에 확신이 없었던 동천은 도주용이라는 사부의 위대한(?) 가르침 덕분에 궁지에 몰리지 않는 이상, 아직까지는 도망치는 데만 사용할 따름이었다. 이야기가 잠깐 새어나갔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 도연을 고생시키는 것은 동천이 아니라 중소구 자신이라는 이야기였다.
“확인해 봤자일 텐데…….”
도연은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부진한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짐짓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한 노사가 굳게 닫아버린 방문 앞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대답을 않던 한 노사는 도연을 나쁘게 보지 않았던 듯 잠시 후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몸가짐을 바르게 한 도연은 떨어질 듯 위태위태한 방문을 조심스레 다루며 안으로 들어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 노사는 그런 도연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이야기는 다 들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더냐.”
도연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지만 그의 눈빛만은 강렬한 빛을 발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도연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진한 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말씀인지요.”
한 노사의 얇은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렇다. 본 늙은이는 천박한 자와 사악한 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도연이 반박했다.
“어찌 한순간의 이야기만 듣고 상대를 단정 지으시는지요.”
“내가 단정 짓는데 너도 협조하지 않았더냐. 이제 와 딴소리인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면이 있다고 긍정했을 뿐 도련님의 모든 것이 천박하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한 노사가 듣고 보니 그 또한 그랬다. 동천의 천박함을 긍정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라는 대목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성깔이 있는 법. 인정은 하면서도 자신의 결단에는 잘못이 없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래, 물론 그랬지. 그렇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네 도련님이라는 아이 또한 그럴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에는 무리가 없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도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곤 의아해하는 한 노사에게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아직 못 보신 아홉을 차분히 지켜보시는 것은 어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