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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18화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이야기에 한 노사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는 다소 흥미 있는 눈초리로 도연을 직시했다.

“나는 그 아홉을 지켜볼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러나 본 늙은이의 밑으로 들어와 학문을 쌓는다면 차근히 지켜보며 추후 나머지 아홉을 평가하도록 하지.”

도연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언급했다면 한 노사 또한 그것에 반격을 가한 셈이었다. 여유가 있는 한 노사와는 다르게 흐린 안색을 하고 있던 도연은 섣불리 내릴 수 없는 결론을 잠시 미루고자 했다.

“그것은 제 권한 밖입니다. 도련님과 상의 후 말씀을 드려도 되겠는지요.”

“물론이다.”

한 노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천이 들어왔다. 밖에서 이미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노사님. 밖에서 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시간이 너무도 촉박하여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입장이오니, 다른 현명한 고견을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천이 정중하게 폼을 잡았지만 한 노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네가 시간이 촉박한 이유를 대보아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천은 대번에 쌍판을 구겼다.

‘에이 씨, 늙은 게 호기심은 많아 가지고.’

그걸 호기심이라 생각한 동천이 잘못된 거였지만 동천이 이러는 것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어쨌든 대번에 머리를 굴린 동천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제게 강호 삼 년 행(江湖三年行)을 명하셨는데 올해가 바로 그 삼 년째라 노사님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었습니다.”

한 노사는 동천이 아닌 도연에게 확인차 물었다.

“사실이더냐?”

도연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주저했으나 그것을 눈치챈 동천이 전음으로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다.’라고 시전하자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차분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이번 여름이 지나기 전에는 돌아가야 합니다.”

한 노사는 믿는 듯 차분히 날짜를 계산했다.

“흐음, 오늘이 사월 엿새니 앞으로 삼사 개월이 남은 셈이로군. 뭐, 저 아이의 사정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네가 마음에 들어 따로 방도를 마련해보마.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오너라.”

도연이 기뻐하여 상체를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동천은 자신의 사정을 상관 않는다는 한 노사의 말에 기분이 무척 상했으나 여기에서 실수하면 여태껏 공들인 것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다. 도연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는 꼴 같지도 않은 한림서원에서 멀어지기가 무섭게 분기를 터트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이 한 노사를 찾아갔을 때 그가 제시한 방법은 동천을 비롯한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짓게 하였다. 한 노사가 제시한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했으니…….

“나를 웃겨라.”

“에?”

동천은 기가 막혔다.

‘웃겨? 이 몸이 너를? 이 늙은이가 미쳤나.’

그도 그럴 것이 광대 짓은 미천한 것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인 시절의 동천이었다면 군말 없이 요상한 몸짓으로 웃음을 유도할 수도 있었으나, 지금의 동천은 신분의 맛을 들인 상태라 심한 치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는 궁금하여 같이 따라온 부진한조차 심하다고 느낄 정도였기에 그는 일이 더 확산되기 전에 마무리를 짓고자 했다.

“어르신. 이 방법은 너무 심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은 어떨는지요.”

한 노사는 피식 웃었다.

“뭔가 착각하고들 있군. 본 늙은이의 말인즉, 재미난 이야기로 웃겨보라는 것이야. 요즘 웃을 일이 없어 아주 따분하고 심심하거든.”

그제야 모두의 반응이 차분해졌지만 오직 중소구만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다행히 동천은 그런 중소구를 못 봤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난 또 뭐라고. 그 정도야 쉽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오묘한 깊이와 해학이 담겨있는 웃음을 선사해드리죠.”

자신만만한 동천의 태도에 한 노사가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어디 그 오묘한 깊이와 해학이 담겨있는 웃음을 선사해보려무나.”

한 노사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동천은 자신이 있었다. 예전에 절친했던 표사 강진구가 ‘이 이야기는 참으로 유쾌하고 해학이 넘치며 뜻깊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란다.’라며 들려주었던 비장의 한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때 동천이 웃지 않았다는 거지만 강진구가 웃긴 거라고 하기에 ‘아하? 나는 너무도 어려서 이해를 못하나, 어른들에게는 이게 웃긴 건가 보구나.’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강진구의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좀 위험했지만 그것을 알 리 없었던 동천은 드디어 옛날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옛날 한 옛날 육십을 넘은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엄청난 갑부였고, 다른 한쪽은 뼈 빠지게 가난한 집안이었죠. 하루는 이 가난한 친구가 부자 친구에게 간청하길 ‘집에 쌀이 부족하니 30문만 빌려주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자 친구가 화를 내길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런 것은 자네의 아들에게 해결하라고 하게!’라며 면박을 주었답니다. 당연히 가난한 친구는 큰 수치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오 년여가 지나자 형세가 뒤바뀌어 가난하던 친구는 기대도 않던 사업이 잘 돼 큰 부자가 되었고, 부자였던 친구는 아들놈이 엄청난 사기를 당해 집까지 팔아넘길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쉬움에 쪼들린 부자 친구가 가난했던 친구에게 찾아가 ‘내 바보 같은 아들놈이 사기를 당해 집까지 날릴 지경이라네. 조금만 도와줄 수 있겠는가?’라고 간청하자 이때를 벼르고 있던 가난했던 친구가 미리 써둔 서찰을 건네주며 말하길 ‘거참 딱하구먼. 여기에 분명 도움이 되는 글이 쓰여져 있으니 집에 가서 펴보시게.’라고 했답니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와 서찰을 펴든 부자 친구는 그 내용을 보고 깊은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인즉,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런 것은 자네의 아들에게 해결하라고 하게!’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 년 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가 말이죠. 그 서찰에 크게 깨닫게 된 부자 친구는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하고, 가난했던 친구는 오래도록 잘 살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다 듣고 난 한 노사는 참으로 묘한 표정으로 동천을 주시했다. 웃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생각 없이 주절거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허나, 끝이 너무도 부실하여 실소가 나올 지경이니……. 오죽하면 ‘허탈한 웃음을 유도했는가?’라는 생각까지 했겠는가. 너무도 썰렁한 이야기에 모두들 몸서리를 치는 가운데 중소구가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동천에게 말했다.

“너 의외로 소질이 없구나.”

“윽? 그, 그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오자 동천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전에 가장 절친했던 강 아저씨의 말이었기에 분명히 웃을 줄 알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새삼스레 떠오르는 교훈.

‘크윽,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더니…….’

남 말할 처지도 아니면서 동천은 그렇게 강진구를 원망했다. 아울러 불 난 데 부채질을 하는 중소구를 은근히 째려보았다.

‘소질이 없어? 으으, 그런 지는 얼마나 웃길 수 있다고.’

그런 동천의 시선을 느꼈는지 중소구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한 노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사 어른. 본 대인이 웃겨도 되겠소이까?”

한 노사는 끼워줄까 말까 생각을 하다 같은 일행이라 인정하고 허락을 내렸다.

“정히 원한다면 어디 한번 해보시게.”

허락이 떨어지자 중소구는 어깨를 떡 펴고 자신 있게 말했다.

“험! 말투가 좀 거칠어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해주겠네.”

“그럼 시작하겠소이다. 어느 날, 거북이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데 그 옆을 스쳐 지나가던 굼벵이가 하는 말이 ‘햐아, 저 새끼 좃나 빠르네?’라고 하더이다. 그러자 흥이 난 거북이가 그 굼벵이를 태워주었고, 또 한참을 가고 있는데 거북이의 옆을 지렁이가 기어가는 게 아니겠소? 이미 으쓱해진 거북이는 그 지렁이도 태워주었는데 미리 타고 있던 굼벵이가 지렁이에게 왈, ‘야, 꽉 잡아. 이 새끼 좃나 빨라.’라고 하더이다. 하하, 참으로 웃기지 않소이까? 푸하하하!”

그의 말에 웃긴 웃었다. 부진한이 말이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결코 자연스러움이 배어있지 않았다. 예의상 웃어준 것이다. 그런 그의 눈빛은 ‘역시, 미친놈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라는 의미가 역력했다.

“아니? 어찌 부 형만 웃으시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웃기지 않는다는 것이오?”

사람들이 차마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못하는 가운데, 대못이 있다면 얼른 박아 버리고 싶어 하는 동천이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방금 전의 열세를 만회하려 했다.

“중 대인.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잠깐 빛을 발했다가 사라진 이야기입니다. 그런 유치한 농은 사라진 지 오래예요.”

그 소리에 중소구가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깜짝 놀라 했다.

“뭐? 그게 정말이더냐?”

“여기 아시는 분들이 대다수인데 제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으음, 그럴 수가. 예전에 가르쳐 준 놈은 이 이야기가 근자에 태산파에서만 조용히 퍼진 재미난 이야기라고 했는데…….”

동천은 내심 혀를 차곤 으스대며 말했다.

“어허! 거북이 이야기는 그 뒷이야기도 나왔건만 참으로 딱하십니다.”

중소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니,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다른 유형으로 나왔단 말이냐? 언제?”

“제가 다섯 살쯤에 나왔었지요.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중소구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빨리 말해보거라. 실로 궁금하구나.”

한 노사도 약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도 처음 들어본 것이다. 이는 도연과 부진한도 마찬가지였는데, 막상 말을 꺼내 놓은 동천은 이번 것 또한 강진구가 가르쳐준 것인지라 약간 불안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금 중 대인께서 하신 말을 아주 재미나게 듣게 된 한 부인이 너무도 재미있어 그녀의 어린 자식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자 마음을 먹었답니다. 헌데, 생각해보니 굼벵이의 욕이 너무도 과하여 잠깐 주춤했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이 꾀를 내길 ‘그래, 그 굼벵이의 욕을 어린아이가 듣기에 적당할 정도로 바꾸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자식들에게 재미나게 이야기하며 문제의 욕 부분을 ‘햐아, 이 거북이가 참으로 빠르구나.’ 그리고 ‘지렁이야 꽉 잡으렴. 이 거북이가 참으로 빠르단다.’라고 바꾸어 버렸답니다. 그랬더니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녀의 자식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사람들은 ‘글쎄.’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용기를 얻게 된 동천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부분을 아주 실감 나게 장식했다.

“‘씨팔, 좃나게 재미없네!’라고 말했답니다. 웃기죠?”

“파하하하! 재미있다! 아주 재미있어!”

격식이 없었던 중소구는 기대치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바닥을 떼구르르 구르며 배꼽을 잡았고, 나머지들도 웃었지만 동천은 전혀 흐뭇해하지 않았다. 우선순위로 웃어야 할 한 노사가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다른 사람들은 다 웃는데 노사님께서는 재미가 없나 보죠?”

동천이 조심스레 묻자 한 노사가 말했다.

“들어줄 만은 하다. 그러나 그런 질 낮은 이야기로는 본 늙은이를 웃길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또다시 실패한 동천은 한 노사가 참으로 강적이라 생각하고 좀 더 수준 있는 이야기로 재무장하기 위해 잠깐의 휴식을 원했다. 한 노사는 허락을 했고, 그날 저녁에 다시 찾아온 동천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웃겨보려 했지만 역시나 실패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그냥 밑에서 배운다고 할 걸.’ 하며 동천이 후회를 하는 가운데 어느덧 일년 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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