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19화
“하하, 웃기죠?”
“안 웃겨.”
“…….”
잠시 후.
“큭큭큭, 참으로 웃기지 않습니까?”
“안 웃겨.”
“…….”
다시 잠시 후.
“푸하하! 제가 말해놓고도 웃기네요!”
“그러냐?”
“…….”
그동안 동천이 웃겨보려고 노력한 것을 무공 수련에 반만 썼어도 도연이 감격에 감격을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동천에게 돌아오는 것은 오로지 시큰둥한 반응. 아니, 그런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말이나 안 한다. 이건 썩은 나무토막처럼 도무지 반응조차 않는 것이다.
“……정말로 안 웃깁니까.”
한 노사는 한 점의 반응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이렇게까지 나오자 동천으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온 뒤, 그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당연한 거지만 하늘에서 대답이 없자 할 일이 없어진 동천은 처량하게 서 있기도 뭐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도연에게 걸어갔다. 도연은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군에게 물었다.
“또 실패하셨습니까.”
동천은 안 그래도 화가나 죽겠는데 도연이 물어보기까지 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조용히 대답해줘야 했다.
“그래, 아무래도 저 영감이 작정을 한 것 같아.”
주군이 시무룩해 있음에도 도연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곳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복잡한 곳에 신경을 쓸 일이 없어 무공 수련에도 그만이었다. 도연으로서는 근래에 맛보기 힘든 휴가였던 것이다.
‘더 참아야 하는가? 그래야 하는가? 차라리 다른 인간을 물색해보는 건 어떨까? 그럴까? 그래버릴까?’
위의 생각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포기 상태의 동천. 지금의 그는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생활 덕분에 가까스로 참고는 있었지만 그 한계도 이제 끝을 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오죽했으면 제갈세가에 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반쯤 죽여놓고 도망칠 생각까지 했겠는가. 조금 걸어왔다고 생각한 동천은 드디어 답답했던 속내를 드러냈다.
“으아! 내가 미치겠어. 도무지 웃지를 않는단 말야! 이건 완전히 ‘너는 짖어라, 나는 안 웃겨 할 테니’라고. 도대체 이 몸보고 어쩌시란 말이지?”
다른 때 같았으면 도연이 ‘참으십시오.’라고 했겠지만 매일매일 반복해서 듣는 이야기인지라 포기했는지 근래에 들어서는 그런 말도 안 했다. 그러자 그것을 눈치챈 동천은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허나, 그에 앞서 갑자기 스쳐간 생각이 동천의 행동을 주춤하게끔 만들어 버렸다. 그 생각인즉, ‘혹시, 저 영감탱이……, 쥐뿔도 모르니까 질질 끄는 거 아냐?’였다.
전혀 의식하지 않은 상황에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막상 단정 지어 버리자 그도 그럴 것만 같았다. 한 노사도 사람인 이상 백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중 한 가지라도 웃어야 정상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진짜로 다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동천에게 그런 쪽의 가정은 씨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맞아! 그거였어!”
갑작스러운 주군의 외침에 도연은 깜짝 놀라 대꾸했다.
“뭐가 말입니까?”
동천은 도연의 물음을 무시하고 한림서원으로 되돌아 달려갔다. 어쩔 수 없어진 도연은 주군을 뒤따라야만 했고, 확실하다고 생각한 동천은 막힘없이 한림서원에 들이닥쳤다. 콰앙, 소리와 함께 그나마 건들거리던 문짝이 부서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난동에 흠칫한 한 노사였지만 이내 그는 싸늘한 어조로 동천을 꾸짖었다.
“이게 무슨 배워먹지 못한 행동이더냐!”
기가 살아난 동천은 전혀 위축됨 없이 말했다.
“배워먹지 못한 행동? 흥, 배우지 못한 건 오히려 노사님이 아니시오!”
한 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허, 앞뒤 재지 않고 날뛰는 망아지 같구나!”
동천은 품속의 철경을 꺼내어 주석이 없는 부분을 펼친 뒤 한 노사에게 성의 없이 내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한 노사였지만 다행히 다치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러나 쇠는 쇠인지라 팔목의 시큰함만은 감수해야 했다. 그동안 닦아놓은 품행이 어디 가는 법 없듯, 고요한 신색으로 동천과 철경을 번갈아 보던 한 노사는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본 늙은이가 이것을 해석할 능력이 없어 여지껏 너를 골탕 먹였단 말이냐?”
“아니면 조금이라도 해석해 보시죠?”
모욕감을 느꼈는지 한 노사가 돌연 얼굴을 굳혔다.
“고얀 놈이로다. 도대체 사부라는 인간이 어떻게 가르쳤는지 궁금할 따름이구나!”
말은 동천을 향하고 있었지만 정작 한 노사의 시선은 철경 쪽으로 가 있었다.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일의 경중을 떠나 우선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키고 보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주석이 사라진 부분부터 두어 줄 읽어 내려간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으응? 재미있구나. 갑골이나 상형문자보다 보기 힘들다는 그 신시어(神市語)를 보게 되다니.”
동천은 뜨끔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신시어?”
한 노사는 쪽 찢어진 눈매로 동천을 노려보다 흥미로운 것을 보여준 대가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철경을 내려다보며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렇다. 신시어. 지금으로부터 천 오백에서 육백여 년 전, 길림성 이남에서 발생한 언어인데 어이된 일인지 그 언어의 생명이 채 백 년을 가지 못하고 사라진 고대 언어이지. 놀라운 것은 치우(蚩尤)가 이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인데 말이야……. 물론, 이 치우가 다른 치우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학술적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알겠느…, 응?”
설명을 마치고 고개를 든 한 노사는 어느새 떨어져 나간 문짝을 고치고 있는 동천을 볼 수 있었다.
“아이고, 이걸 어떤 인간이 부쉈을까? 헤헤.”
“…….”
할 말을 못 느낀 한 노사는 다시 철경에 관심을 쏟으며 툭 내뱉었다.
“그럴 필요 없으니 그만 가보아라.”
동천도 생각이 있는 이상 가란다고 ‘그럴까요?’하며 멍청하게 갈 인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벌여놓은 일은 마무리를 해놓고 가야 하는 것이다. 뜯겨져 나간 자리에 다시 못을 박고 (손가락에 내공을 집중시켜 무식하게 쑤셔 넣었다) 쭈뼛쭈뼛 다가온 동천은 철경을 읽느라 열심인 한 노사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그건 주셔야죠.”
한 노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의 그 찢어진 눈으로 한차례 동천을 노려볼 뿐이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쫄아서 허무하게 물러난 동천은 밖에서 도연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와서는 당당하게 행동했다.
“내일 오면 해석해주겠다고 하니, 이만 가자!”
“알겠습니다.”
동천은 도연을 따라가기에 앞서 한 노사 쪽을 힐끔 보았다. 분명히 들릴 정도로 말했으니 그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한 노사는 여전히 철경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잘못 이해한 동천은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알아들었다는 소리겠지?’라고 저 혼자 단정 지어 버렸다. 자신의 이야기가 씹혔다는 것도 모른 채 마냥 흐뭇하기만 한 동천.
‘히히, 진작에 보여줄걸. 아아, 내일이 기다려지는구나. 랄랄라.’
그렇게 동천은 도연의 안내를 받아 제갈세가에서 마련해준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