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2화
무아지경(無我地境).
– 이봐요. 할아범..! –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자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로우대(敬老優待) 정신이 투철(透徹)한 천재 소년. 동천이 항광(項洸) 할아범에게…』
“툭. 툭-툭.”
“이씨-! 뭐야..?”
동천은 한참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데 누가 자신을 건드리자 신경질이 났다.
“냉가야.. 궁금하면 눈깔을 치뜨면 될 거 아니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아.. 제가 그만. 깜빡 졸았나 보군요.”
눈을 뜨고 항광을 바라보자 항광이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항광의 싸늘한 눈초리..
비웃는 듯한 입술..
동천의 멋쩍은 웃음..
그러나 감추어진 욕설..
‘미친 늙은이..’
‘재수 없는 애새끼..’
둘은 그렇게 무언의 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동천이 싸늘한 분위기를 환기 시켰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날씨가 아주 좋네요.”
동천이 먼저 분위기를 상쇄(相殺)시키자 항광도 어쩔 수 없이 말대꾸를 해주었다.
“그래, 날씨만 좋다.”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헤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동천의 말에 주위에 다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 .
…. .
항광은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자 자신이 계속 이러고 있으면 저 재수 없는 애새끼와 같은 수준이 된다는 생각에 어제 일은 그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항광(項洸)이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만독노조(萬毒老祖) 항광(項洸)이다.. 내가 저런 유치한 어린애의 말장난에 넘어가서는 체면(體面)이 말이 아니지…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그때 동천이 말했다.
“할아버지. 지금 아침이죠.”
생각을 마친 항광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동천을 바라봤다.
“그렇다. 왜 물어보느냐.”
빨리 사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동천은 머뭇거릴 것 없이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 아침이면요. 하루가 지난 거니까 빨리 환골탈태를 시켜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얘기입니다. 헤헤…”
항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도 기왕이면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계속 운기조식을 해서 이십 년 공력을 모두 네 것으로 만들었느냐?”
“당연하죠!”
동천이 자신만만한 듯한 말을하자 항광은 다짜고짜 동천의 손목을 잡았다.
“어? 왜 그래요!”
동천이 뭐라건 말건 무시해버렸다.
“가만히 있어봐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잠깐 시험을 해봐야겠다.”
동천은 시험이라는 말에 머리를 쓰는 건 줄 알고,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시험이요? 그게 뭔데요?”
동천의 말에 항광은 자신이 잡고 있는 동천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을 했다.
“그건, 지금 내가 잡고 있는 손목으로 이십 년 정도의 내공을 무자비하게 침투(浸透) 시킬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모든 공력을 네 것으로 만든 게 확실하다면, 내가 침투시키는 내공을 거의 막상막하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네가 나에게 밀린다고 하더라도 한 이십 년 정도의 내공이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는 다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는 말아라.”
동천은 항광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대해 완전히 미친 늙은이는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흐응..! 좋아요! 나는 준비가 됐습니다!”
동천이 말을 마친 후 내공을 일으켜 항광이 잡고 있는 왼쪽 팔에 내공을 몰아갈 때를 맞춰 항광도 십 년의 내공을 먼저 주입 시켰다.
‘응? 별거 아니잖아?’
이게 지금 동천의 생각이었다. 항광은 동천을 생각해서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인 게 아니었지만, 동천은 그게 다인 줄 알고 속으로 의기양양(意氣揚揚)하고 있었다.
‘음.. 역시 내가 만든 단환의 효능(效能)이 뛰어나긴 뛰어나군. 이제 천천히 힘을 올려볼까?’
항광이 본격적으로 갑자기 힘을 끌어올리자 동천은 내심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처음에 손목에서 올라올 기미도 보이지 않던 항광의 내공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욱!”
툭.. 투-둑!
항광의 내공이 팔을 지나 어깨 쪽으로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서로의 내공 충돌 때문에 애꿎은 주위의 혈관(血管)들만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편, 동천은 편안하게 항광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항광이 갑작스럽게 치고 올라오자 인상(印象)을 있는 대로 구겨버렸다. 고통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역시.. 미친 늙은이야…! 아마도 날 죽이려고 하는 걸 거야.’
숨결이 거칠어지고 온몸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보다 못한 항광이 전음으로 말을 했다.
『냉가야.. 아직도 네 팔 쪽에 모든 내공이 집중되어 있지가 않다. 살고 싶으면 아프더라도 정신을 집중해서 빨리 끌어 들여라…』
‘씨-팔!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동천은 속으론 지랄하고 있었으나 상황(狀況)이 상황인지라 애써 정신을 집중하며, 내공을 모아 팔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때 항광은 동천의 어깨 쪽에서 자신의 말을 듣고 난 후 빠른 속도로 불어나는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핏줄이 다 그런 걸까..? 냉가 자식.. 제법 하는군. 음.. 그나저나 무슨 놈의 심법이 이렇지? 알아내려고 해도 갈피를 못 잡겠군.’
사실 동천의 심법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알아봤자 교 내의 중요인사들 정도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귀의흡수신공이란 신공이 있다는 것을 알고만 있을 뿐 그게 어떠한 심법인지는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내공을 더 깊이 침투 시킨다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냉가 자식이 위험할 테고.. 음, 그만해도 되겠군. 조금 더 놀아보고 싶지만..’
사실 처음 시도에 이만큼 버틴 것만 해도 굉장히 잘한 거라고 할 수 있었다. 항광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동천의 모습에 얼른 진기를 거두었다. 동천은 상체를 완전히 뒤로 제낀 다음에 긴 숨을 내쉬었다.
“푸-하..! 주.. 죽는 줄 알았네…!”
동천은 진짜로 죽다가 살아온 듯한 고통을 경험(經驗)했다. 우습게도 아까 위기의 순간에 지금의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장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났었다.
- 산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거야..
또 생각 나는 게 있었다.
- 너도 늙어봐라..
늙으면 안다는 할아버지의 말이었지만 동천은 방금 전의 경험으로 충분히 인식했다고 자기 딴에는 생각했다. 동천이 자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항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합격이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켜줄 테니 마음을 안정시키고 한 번 정도 운기조식을 하거라.”
그러고는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휴.. 마음을 가다듬고. 그나저나 미친 늙은이가 아무 탈 없이 시술을 빨리하면 좋겠는데.. 잠깐? 만약에 저 늙은이가 시술을 할 때 내가 심법을 운기하게 될 텐데 어쩐다.. 응? 히히히! 맞아. 하단전만 운기 한다면 무슨 내공인지 모를 거야!”
희희낙락(喜喜樂樂) 거리던 동천은 항광의 말대로 운기조식을 마친 후 항광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도 항광은 오질 않았다. 심심해진 동천은 장 할아버지가 생각난 김에 할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자주 흥얼거렸던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뽕나무가 방귀를 ‘뽕!’하고 뀌면..
대나무가 ‘때끼!’하고 회초릴 드네..
그러자 옆에 있던 참나무가 하는 말 ‘참.아.라.-!’
히히히히! 이럴 때 이런 것을 부르게 될 줄이야..”
동천이 노래를 끝마치자 갑자기 눈앞에서 희무끄리한 것이 나타났다. 항광이었다.
“고놈 참.. 준비는 다 됐느냐?”
얼떨떨해 있던 동천은 희무끄리한 것이 항광이었다는 것을 알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희망에 찬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옛-! 준비 됐습니다!”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자 항광은 날카로운 눈을 더욱더 날카롭게 번뜩인 후 동천을 바라보았다.
“좋다. 준비는 다 된 것 같으니 가부좌를 틀어라.”
“예..”
두근..
‘심장이 고동을 친다.’
두근.. 두근…
동천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확실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드디어.. 환골탈태의 순간이 나에게 찾아왔다. 동천아.. 너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아자!’
자기 자신에게 격려를 해준 동천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후 가부좌를 틀었다. 항광은 동천이 가부좌를 하자, 동천의 등 뒤에 앉더니 두 손을 명문혈에 갖다 댔다.
“잘 들어라. 내가 네 몸에 내공을 쏟아부으면, 너는 내가 내공을 보내는 통로를 거부하면 안 된다.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네가 고통스러운 나머지 나의 내공을 거부하는 듯한 몸짓을 보인다면 우리 둘은 아주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될 것이다. 내 말을 잘 숙지(熟知)했느냐?”
동천은 지금 상황이 자신의 생명과도 직결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신을 차리고 항광의 말을 들었다.
“후-유..! 저는 준비가 됐으니까.. 빨리 시작해요.”
“좋다. 이제 내공을 불어 넣어줄 테니 말을 삼가해라. 입을 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동천의 답은 ‘몰라요.’였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작한다..”
우-웅..
항광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에서부터 방대한 내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이.. 이거 꽤 뜨거운데?’
이게 지금 동천의 생각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느낌.. 그 느낌은 마치 쉴 새 없이 솟아 나오는 뜨거운 온천물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천이 어느 정도 진기를 잘 끌어들이고 있을 때, 항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냉가야.. 참아라.』
콰아-아아….
항광의 진기가 마치 폭풍우처럼 동천의 내부를 갈갈이 찢어발기면서 짓쳐 들어오자 동천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으-읍…!”
‘크-윽.. 씨발..! 큰일 날.. 으아악!’
말을 할 수 없었던 동천은 속으로라도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한편, 내공을 주입시키는 항광으로서도 나름대로 고충(苦衷)이 있었다.
‘음.. 너무 갑자기 내공을 쏟아부었나? 애새끼가 못 견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지금 내공을 줄일 수도 없고…’
항광의 내공은 동천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막혀있던 혈들은 물론, 쓸모없는 노폐물(老廢物)들을 깨끗이 쓸어버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동천은 매우 어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무리 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문제는 동천이 항광의 막대한 내공에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아-악! 큭! 나 죽어…!!’
꽉 다문 동천의 입술에서 미세한 피가 흘러내렸다. 항광은 항광 나름대로 점점 경직되어가는 동천의 반응에 속으로 다급해 하고 있었다. 전음으로 정신을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상황이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의 흐름이 흐트러지면 위험한 지경이 될 확률이 컸다. 그래서 속으론 제대로 하라고 열불을 내고 있었지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득.. 우두두둑!”
동천의 몸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너무 무리였다.. 이 냉가 자식을 얼른 보내고픈 생각에 너무 빨리 시술을 한 게 잘못이었다.’
때늦은 후회였지만 지금 상황이 막판을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항광은 어쩔 수 없이 힘들게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크-윽..! 어떻게.. 된.. 내공이… 급속.. 빨려 들어간다….!?’
동천은 항광의 막대한 내공을 거스르지 않으며, 그 내공을 하단전에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상단전이 정신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정신을 집중하면 이 고통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완전한 귀의흡수신공을 운기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동천의 고통은 점점 수그러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심법의 성격이 기의 흡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만큼, 심법을 운기하는 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기(氣)라면 그 기를 끌어들이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항광의 기를 흡수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이.. 자식! 서.. 설마? 욱!’
항광은 고통스러운 와중에 하나의 가정(假定)을 성립해 보았다. 이 냉가는 자신에게 심법의 이름을 가르쳐 주질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은 그 심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지금 보니 이 심법은 내공의 흡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죽음(死)…
자신이 생각하건대 냉소천은 아주 손쉽게 아들내미를 시켜서 자신을 죽이려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네놈의 생각대로는… 이럴… 흐-억!’
천천히 내공을 줄이면서 종래(從來)에는 손을 뗀다는 생각을 가지고 실행에 옮기려던 항광은 내공을 줄여 나가자 오히려 급속도로 내공이 빨려 나가는 동시에, 제어조차 자신의 뜻대로 되질 않는 것을 느꼈다. 지금 항광의 내공은 일정한 양으로 동천의 몸속에 흘러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 .
항광이 괴롭거나 말거나 동천은 무아지경(無我地境)이었다.
‘이럴 순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심법이냐..? 헉헉! 이런.. 심법은.. 헉헉! 듣도 보지도…’
온몸이 뒤틀리고 단전에서는 진기의 고갈로 삐거덕! 대고 있는 상황에 처해진 항광은 정말로 이런 심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채양(採陽)-채음보양술(採陰補陽術)이란 심법이 있기는 있었지만 이것은 방사((房事): 남녀가 성교하는 일.)로만 가능한 얘기고, 또 다른 심법을 들자면 밀교의 환락흡령술(歡樂吸靈術)을 들 수가 있지만 이것은 사람의 심령(心靈)을 제어해 놓은 뒤 단전에 직접 손을 올려놓고 흡수하는 거라 지금 냉가 꼬마가 운용하고 있는 심법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허-억! 더.. 더 이상은.. 끄-으윽..!’
항광의 눈이 까뒤집어지고 흰자위만 보이는 상황이 벌어질 때, 항광의 진기가 더 이상 몸속에 들어오질 않자 갑자기 동천의 내부에서 화려한 폭발이 일어났다.
‘쾅-!’
“욱-!”
흡수된 항광의 내공이 돌고 돌아 임독이맥에 거대한 충돌을 벌이자 동천은 나지막한.. 그러나 엄청 고통스러운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항광은 그나마 다행으로 동천이 움찔! 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퍼진 반탄력으로 인해 동천의 등에서 손을 뗄 수가 있었다.
“크-엑! 우-웁! 쿨럭!!”
시커먼 피가 동천의 등 뒤에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힘이 빠진 항광은 몸을 나지막이 떨었다.
부르르르..
“헉헉..! 끄-윽!”
꽈당!
한껏 검은 피를 쏟아낸 항광은 머릿속으로 피맺힌 절규를 쏟아내며 기절했다.
- 이.. 이런, 개 같은…..!!!
한편, 동천은 항광이 쓰러지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의 충돌을 앞두고 있었다.
‘으으으.. 온다.. 온.. 크-억!’
콰-앙-!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지금 동천의 상태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만약에 항광이 내공을 급속도로 빼앗기는 불행한 사태까지 가질 않았다면 뒤에서 계속 밀어붙이라고 조언을 해줬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기절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포심이 앞선 동천은 다시 짓쳐드려는 내공의 진로를 다급히 바꿔 놓았다. 당연히 갈 길을 잃어버린 내공들은 동천의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나가다가 동천이 흡수해버리자 상단전과 하단전으로 각각 흡수되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환골탈태의 순간을 눈 뜨고 도둑맞은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동천으로선 그저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단전에 내공이 충만하다. 으히히히.. 아참, 운기 중엔 냉정(冷情). 냉정. 오로지 냉정….’
운기조식 중에는 절대로 딴 생각 하지 말라는 사부의 말이 생각나자 동천은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스으으으…
자신의 몸 주위에 푸른 기류를 만들며 돌아다니던 기를 콧속으로 들여 마신 동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동천의 몸은 잠시 동안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지만 조금 후에 원래의 피부 색깔로 되돌아왔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우선 자신이 살았다는데에 안심을 한 동천은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힘이 넘쳐흐르는 게 느껴졌다.
“흐흐흐흐.. 으하-하하하-하하하!! 이히히히히히히! 내가 남들이 꿈에라도 하고 싶어하는 환골탈태를 했다. 히히히히히! 만세! 동천 만세! 만세! 이봐요. 할아버지, 내가.. 응?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앗! 할아버지!”
동천은 자신이 환골탈태를 한 줄 알고, 혼자 신이 나 있다가 그제서야 항광이 생각났다. 그래서 항광을 불렀는데 항광이 자신의 뒤에서 피를 토한 채 모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이자 얼른 항광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할아버지! 정신 차려요!”
동천이 아무리 흔들어도 항광은 깨어날 기미도 안 보였다. 동천은 혹시나 이 할아범이 장난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용히 입을 뗐다.
“이봐요.. 할아버지.. 할아범. 할아방구! 늙다리! 변태(變態) 할아범! 으응? 진짜로 쓰러진 것 같네? 이를 어쩐다…”
동천은 항광이 파리한 안색으로 쓰러져 있자 항광의 심장 부근에 귀를 갖다 대보았다.
“으음.. 미약하게나마 뛰기는 뛰는데… 내가 뭘 알아야지 살리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에이씨!”
이 할아범을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동천은 결국 하나의 생각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보아하니 살 만큼 산 것 같은데.. 나한테 환골탈태도 시켜준 할아범이기도 하니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할 수는 없지.”
결론은 ‘묻어버리자!’였다. 결론이 이끄는 대로 항광을 묻어버리려던 동천은 모든 인간은 공수레 공수거 정신에 입각하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광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수레.. 공수거.. 바람처럼 부질없는 거.. 아 글씨! 욕심을 버려! 아싸! 에.. 이건 어제 그 책들이고.. 이건? 와.. 채찍이네? 무지하게 긴데? 그리고.. 또 다른 건.. 어? 이거 천약(天藥) 어쩌구저쩌구하던 거 아냐? 세 알이나 있네?”
늙은이 치고는 몸에 들어있는 것도 참 많다고 생각하며 계속 들춰내던 동천은 어른 주먹만 한 옥병(玉甁)이 보이자 뚜껑을 열고 안의 내용물(內容物)을 꺼내 보았다. 그러자 그 병 속에서 향긋한 향내와 함께 세 알의 단환이 나오는 게 보였다.
천약뇌수단(天藥腦髓丹)이었다.
“야.. 이 늙은이 괘씸한데? 네 알이나 있었으면서 세 알은 꼼쳐둬? 씨팔! 이 늙은이를 그냥.. 콱!”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도 모르고 오직 세 알의 단환만 숨겨뒀다고 발광을 하는 동천이었다. 사실 이 세 알의 단환은 동천을 환골탈태를 시켜주고 나서 동천이 제 갈 길을 가면 고갈된 내공을 회복하려고 숨겨놨던 것이었다.
“잠깐..? 이 단환이 효능이 좋다고 했으니까.. 잘하면 이걸로 이 늙은이를 살릴 수도 있겠는데?”
아직은 약간의 양심이 남아있는 동천은 점차 싸늘해지는 항광의 입을 쩌억! 벌려놓은 다음 항광의 입으로 단환 하나를 집어넣었다. 그 단환은 항광의 입속에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녹아버렸다. 효과가 바로 나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동천은 항광이 조금도 움직일 낌새를 안 보이자 내심 단환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감탱이.. 귀한 약을 먹여놨는데도 소생할 기미가 전혀 안 보이네? 혹시, 단환 하나 낭비하는 거 아냐?”
동천은 마치 제 것인 것처럼 한껏 생색(生色)을 냈다.
한편, 항광은 피맺힌 절규를 하며 쓰러지는 와중에서도 계속 만독혼원공(萬毒混元攻)을 운기하고 있었다.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그렇게 작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만독혼원공이라도 한 올의 내공조차 남아있지 않은 몸으론 소생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항광에게 한줄기 구원의 단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단비는 항광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새싹을 움트게 하는 충분한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항광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동천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머릿속을 자극하자 의아해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받고 얼마 안 있어 항광의 몸에서 푸른 운무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으엑! 뭐야? 깜짝이야!”
깜짝 놀란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뛰어 올랐다.
“쾅!”
“윽! 뭐.. 뭐가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그렇게 많이 뛰어 올랐다니..”
동천은 단환이 아깝다는 생각에 항광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항광의 몸에서 청색 기류가 뿜어져 나오자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며 뒤로 껑충! 뛰어올랐었다. 그런데 자신이 평소의 자신인 줄 알고 힘껏 뛰어 올라간 동천은 이장 높이에서 거대한 소나무와 그대로 부딪혀 버렸던 것이었다. 당연히 황당했다. 바닥에 착지한 동천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었다. 신기하게도 머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동천이 혼자 놀라고 있을 때였다.
“끄으응.. 우웩! 크으….!”
“어? 할아버지! 깨어났네요?”
항광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한 움큼의 피를 쏟아낸 다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동천은 자신이 항광을 불렀는데도 멍하니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있자 항광을 흔들어 보았다.
“할아버지!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든다는 느낌을 받은 항광은 그제서야 눈의 초점을 맞춘 뒤 자신을 흔든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으.. 냉가… 너냐?”
항광이 자신을 알아보자 동천은 이제 됐구나 싶었다.
‘나는 죽어서라도 극락(極樂)에 갈 거야. 이렇게 다 죽어가는 할아범을 살려 놓았으니까 말야.’
병 주고 약 주고, 지 혼자 일을 다 벌여놓은 동천은 항광이 살았다는 데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동천은 항광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듯 단환이 들어있는 옥병을 항광 앞에서 흔들면서 웃어젖혔다.
“히히히! 할아버지 살아났네요? 하지만요. 이건 다 내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네요. 제가 이 옥병에 들어있던 단환 하나로 할아버지를 살려낸 거라구요.”
항광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자식이 자신 때문에 살아난 줄 알라고 하자,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단박에 후려 갈기고 싶었지만, 몸이 전혀 움직여 주지가 않았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입밖에 없었다.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항광은 동천이 단환을 하나만 썼다는 말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동천에게 말을 했다.
“하. 하하..! 그랬느냐? 고맙다. 그런데 말이다..”
항광이 말끝을 흐리자 궁금해진 동천은 빨리 말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항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 내 몸이 말이 아니거든?”
“그런데요?”
동천의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에 항광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으응..! 그래서 네가 지금 들고 있는 옥병 속의 단환을 나에게 다 복용 시켜주었으면 한다.”
항광의 말을 들은 동천은 알겠다는 듯이 말을 했다.
“싫어요.”
이럴 수가 얼굴의 표정과 말이 이렇게 다르다니.. 라고 항광은 생각했다.
“뭐.. 뭣이라! 이.. 이런.. 고약한! 이놈아! 왜 싫다는 것이냐? 그게 네 것도 아니고 내 건데.. 웁! 쿨-럭! 큭!”
동천의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은 항광은 화가 머리 꼭대기로 올라올 만큼 흥분을 했기 때문에 기혈이 역류(逆流)돼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해냈다.
“어..? 할아버지! 괜찮아요? 이를 어쩌지..?”
항광은 동천의 당황한 듯한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다.
“썩.. 헉헉! 꺼져라! 보기도.. 헉헉!”
항광이 힘들게 말하자 동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며 말을 했다.
“그러죠!”
“엇! 이.. 이 녀석아..! 헉헉! 그렇다고 그냥 가면 어떡하냐..!”
홧김에 가라고 한 말이지만 동천이 진짜로 간다고 하자 내심 당황한 항광은 서둘러 동천을 불렀다. 미우나 또 미우나 지금 상황에선 동천이 없으면 자신은 초라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할 운명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냥 가라면서요!”
‘내 신세가 어쩌다가…’
속으로 처절하게 한탄을 했지만 다급해진 항광은 어떻게든 동천에게서 천약뇌수단을 얻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냉가야.. 왜 그 단환을 나에게 못 준다는 것이냐? 그 단환은 내 것이었는데 말이다..”
항광의 나긋한 말에도 동천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아까까지는 그랬죠!”
“뭐? 아까까지?”
동천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아까까지요!”
동천이 말도 안 되는 떼를 쓰자 항광은 다시 흥분을 했다.
“그게 어째서 아까까진 내 것이었고, 지금은 네 것이 되었다는 말이냐?”
항광이 논리적으로 풀어 나가면서 그 단환을 얻으려고 했지만 동천에게는 논리라는 게 애초부터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었다.
“그게 말이죠. 불가에 이르기를 공수레 공수거라는 말이 있죠? 그 말처럼 할아버지는 아까까지는 죽은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그럼, 할아버지의 물건들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줍는 게 임자란 말이예요.. 물론, 지금 다시 살아났다고는 하지만 이미 배는 저~ 멀리. 떠난 거라 할 수가 있어요. 히히히! 이제 왜 이 단환이 제 것이 되는지 알겠어요?”
항광은 이런 쓸데없는 잡소리나 들어야 하는 자신에 대하여 무한한 비애(悲哀)를 느꼈다. 독공(毒攻)을 꿈꾸는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러러보는 자신이었는데 이런 어린 자식에게 단환 하나 얻어먹으려고 잡소리나 들어야 하다니.. 더군다나 자신의 단환을 말이다.
“휴.. 그래, 좋다. 네가 그렇게 불가의 말을 따진다면, 내가 또 다른 얘기를 해주마. 불가에서 이르기를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구층 석탑을 쌓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당연히 너는 나를 살려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나를 살리려면 꼭! 그 단환이 필요하다. 어떠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동천에게는 논리라는 게 통하지 않았다.
“쯧쯧쯧.. 그건 아니죠.”
동천이 전혀 동조를 안 해주자 항광은 다급함을 금치 못했다.
“뭐..? 왜냐? 네가 아까는 불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나의 단환을 네 거라고 말했었기에 이번엔 내가 불가의 말을 인용해서 나에게 단환을 달라는 것인데 너는 왜 아니라는 것이냐!”
“왜냐하면요. 나는 불교를 안 믿거든요. 나는 하늘님을 믿어요.”
“이 녀석아! 그렇다면 왜 방금 전에는 불가의 말을 인용했느냐?”
“내 맘이에요!”
멍….
항광은 그 어떠한 말로도 이 냉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건 완전히 자기 편한 대로 해석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자신이 또 다른 반박을 한다고 해도 안될 거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째서 냉가의 자식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지? 흐흐흐.. 그렇군.. 냉소천! 네놈이 나를 죽이라고 시켰다는 것을 깜빡했었구나…’
엉뚱한 상상을 한 항광은 아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옆에서 항광을 지켜보던 동천은 항광이 방금 전까지 지랄을 하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자 이젠 그만 골려줄까..? 하고 생각했다. 사실은 아까 항광이 단환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자, 잠시 골려주고픈 마음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쓴 것뿐이었다.
“이봐요, 할아버지. 삐졌어요?”
“…..”
항광은 동천이 이번에는 무슨 말로 자신을 놀리나 싶어 그저 눈만 감고 자신이 죽을 시기를 측정하고 있었다.
“에이.. 그만 삐져요. 까짓 거 주면 되잖아요. 늙어서 삐지기는..”
그 순간 항광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눈을 번쩍! 치켜 들었다.
“뭐라고? 정말이냐? 정말 천약뇌수단을 준다는 말이냐?”
동천은 자신이 단환을 준다고 하자 얼른 눈을 뜨는 항광을 보고 역시 이 늙은이가 삐져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천은 그런 항광을 보고 히죽! 웃으면서 말을 했다.
“히히.. 그래요. 아까는 잠시 장난을 친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말라고요. 자, 아-! 하고 입을 벌려 봐요.”
동천의 웃음 섞인 말에 내심 불안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저 동천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
동천은 항광이 불안한 눈초리로 입을 벌리자 그 입에다가 단환 한 알을 집어넣어 주었다.
“꿀-꺽!”
항광은 동천이 진짜로 단환을 넣어주자 내심 황당해하면서도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뒤 재빨리 운기조식을 했다. 항광이 운기조식을 시작하자 항광의 몸 주위에 푸르스름한 운무가 뿜어져 나왔다.
슈우우우—-
“어..? 아까같이 할아범의 몸 주위에 퍼런 게 뿜어져 나오네?”
아까도 그랬지만 기분이 이상해진 동천은 얼른 푸른 운무의 영역 밖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항광은 천약뇌수단의 힘을 얻어 조금씩 경직되어 있는 몸들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야.. 누워서도 운기가 가능하구나? 나중에 나도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동천은 항광이 의외로 길게 운기조식을 하자 심심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 심심함을 벗어나게 해줄 그 무언가를 찾아가던 동천은 아까 항광의 몸에서 빼냈던 물건 중에 두툼했던 비급을 주워서 읽었다. 엄청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꽤 보다가 짐짓 질려서 맨 앞쪽의 목차(目次)를 읽은 동천은 마치 다 이해한 듯한 말투로 지껄였다.
“호오! 이거 독초(毒草), 독물(毒物), 독약(毒藥)들의 활용법과 해독법. 그리고 융합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는 거네? 음.. 이거 사부님한테 갖다주면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동천이 중얼거릴 때 운기조식을 마친 항광은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사부가 누구냐..”
“앗! 아휴! 깜짝이야! 사부님이요? 음.. 제 사부님은요. 위대(偉大)하고, 거룩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분이에요.”
항광은 물어본 자신을 탓했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너는 그 비급이 탐이 나냐?”
동천은 항광이 자신이 들고 있던 용독경(用毒經)을 보고는 가지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자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가지고 싶기는 한데.. 줄 건가요?”
몸이 흐늘거리면서도 힘겹게 정좌를 한 항광은 가능한 한 동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히 말을 했다.
“그렇다. 하지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지.”
항광이 비급을 받는데에 조건을 내세우자 동천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요.”
동천이 어떤 표정을 짓든 간에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항광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천약뇌수단.. 그러나 동천이 하는 짓을 보건대 아마도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아무리 저 비급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을 해도, 동천이 저것도 자기 거라고 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저 꼬마 자식을 후려 갈기고, 단환을 뺏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항광의 몸은 겨우겨우 추스를 정도밖에는 안됐다.
“그게.. 음..!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옥병하고 그 용독경하고 바꾸자는 말이다. 어떠냐? 네가 보기에도 알겠지만 그거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독에 중독될 염려는 절대 없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천약뇌수단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단환을 만드는 방법도 들어 있단다.”
항광이 말을 끝마치고 동천을 바라보자 동천은 그게 뭐 대수냐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그거야 쉽죠. 잠깐만 기다려요.”
그러고는 잠시 몸을 돌렸다.
“오오..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면, 어서 다오.”
동천의 말에 이제 됐다. 싶은 항광은 동천에게 어서 달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동천은 그런 항광에게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옥병을 건네주었다.
옥병을 건네받은 항광은 뚜껑을 열어 보고는 말했다.
“….. 이게 뭐냐?”
항광의 물음에 동천은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뭐긴 뭐예요! 옥병이지!”
항광의 이마에서 핏대가 불끈! 튀어 올랐다.
“그러니까 왜 옥병뿐이냐구… 단환은 왜 없냐는… 얘기다.”
항광의 금방 폭발할 것 같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천은 당당히 말을 했다.
“아까 옥병을 달라면서요. 옥병을 달라고 했지 그 안의 내용물까지 달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헤헤헤.. 어쨌든 이 책은 내 거니까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요! 알았죠?”
그제서야 자신이 속은 걸 안 항광은 자신이 흥분한다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로 열이 뻗쳤다.
“으으으으… 냉가.. 냉가..! 내앵가아!!! 카-윽! 웩!”
“앗! 할아버지! 할아버… 할아..”
항광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衝擊)을 받으며, 천천히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동천은 항광이 다시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이거 진짜로 죽는 거 아냐? 하고, 생각했다.
“이봐요! 할아범! 정신 좀 차려봐요! 에이.. 씨팔! 성질머리하고는… 그나저나 이 할아범 피도 더럽게 많네? 피를 토한 게 도대체 몇 번째야?”
그래도 단환을 두 개나 먹은 탓인지 피의 부족으로 안색만 파리해졌을 뿐 그냥 의식을 잃기만 한 것 같았다. 항광의 몸 상태로 볼 때 엄청난 행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었다.
“에이. 속 좁은 늙다리! 조금만 장난을 쳐도 쉽게 화를 낸단 말이야? 어쨌든 이따가 깨어나면 진짜로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