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20화
간만에 기분이 좋아져 중소구의 시비 성 어조에도 관대하게 넘어가 준 동천은 다음날 그가 따라가 주겠다고 하자 절로 눈알을 치떴다.
“예에? 뭐라고요?”
중소구는 느긋하게 황룡세가에서 가져온 설향차를 한 모금 꼴깍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더냐. 이런 뜻깊은 날 본 대인께서 같이 가주시겠다는 데.”
동천의 입에서는 ‘그게 문제다!’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저기요. 오늘은 진한님과 밖에 외출하신다면서요.”
중소구는 동천의 말에 느슨해진 신형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그것 때문이었구나. 하하, 걱정 말아라. 취소되었으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동천으로서는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에이, 씹새끼! 심심하니까 따라오겠다는 거냐? 니가 그러고도 대인이야? 저걸 확!’
내심 투덜대기에 여념이 없었던 동천이었지만 정작 중소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려 하자 재빨리 비위 맞추기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저로서는 환영할 따름입니다. 헤헤.”
효과가 있었는지 중소구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다.
“푸하하! 당연히 환영해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이제 조식(朝食)의 입가심도 했으니 내친김에 가보기로 하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중소구는 독불장군처럼 일사천리로 밀고 나갔다. 동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도연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가다 도연과 나란히 선 중소구는 전혀 영양가 없는 주저리를 늘어놓으며 은근히 동천의 속을 태웠다.
‘분명히 저 소구 새끼가 해석된 내용에 관심을 가질 텐데 어쩌지? 무림인들은 무공 기서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는데…….’
동천은 해석된 내용을 본 중소구가 철경에 욕심이 일어 자신에게 해를 입히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줍지 않은 인연으로 만난 사이다 보니,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간만에 그가 제대로 된 걱정을 하는 사이 일행은 한림서원에 도착했고, 동천이 부르짖는 하늘님은 그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해석?”
한 노사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반문하자 동천은 시치미 떼지 말라는 식으로 다그쳤다.
“제가 어제 도연에게 한 노사님께서 해석해 줄 거라고 넌지시 운을 띄웠더니 무언의 긍정을 하셨잖아요!”
한 노사는 딱 잡아뗐다.
“그런 적이 없다.”
“예에? 이제와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동천의 억울하다는 말투에 한 노사는 근엄한 질책을 던져주었다.
“어허, 이놈이 이제는 대들기까지 하는구나.”
열쇠는 한 노사가 쥐고 있었기에 동천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흥이 깨져버린 중소구는 동천을 씹기에 들어갔다.
“본 대인은 어쩐지 수상하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구나. 에잉, 괜히 왔군. 시간만 낭비야!”
‘이씨,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억눌린 화기 때문인지 그동안 쌓여있었던 분노가 서서히 표출되기 시작했다. 속으로 소리치는 것은 이 상황에서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동천은 주먹을 단단하게 쥐었고, 그것을 본 중소구가 같잖다는 듯 말했다.
“어쭈? 네놈이 주먹을 쥐면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걸로 치겠다는 것이냐?”
‘눈가에 살기를 머금은 동천은 중소구의 안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끄엑?”
‘피가 흩날리고 동천의 주먹이 연타로 이어졌다.’
‘퍽퍽퍽퍽!’
“그래, 친다! 친다 이 새끼야! 니가 어쩔 건데? 이히히, 죽어! 죽어버려! 이히히히!”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그, 그럴리가요. 잘못 이해한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 잠시 한탄을 하느라……. 헤헤.”
그제야 중소구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자신의 잘못을 이해했다면 그럴 만도 하지.”
또다시 비굴한 삶을 연명한 동천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원래 비굴하게 살아온 인생에 줄 하나 더 긋는다고 달라질게 있겠냐 만은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한편, 옆에서 찬찬히 주군의 행동을 지켜보던 도연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하된 도리로서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잠시 이어온 침묵을 깨트렸다.
“노사님, 미력하나마 제가 노사님을 웃겨보겠습니다. 가능하겠는지요.”
한 노사는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중소구와 동천의 이야기는 들었어도 도연의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표정을 지우며 허락했다.
“물론이다. 어디 네 웃음 보따리를 펼쳐보거라.”
침착한 한 노사와는 다르게 중소구의 반응은 열렬했다.
“이런 일에 도 소형제까지 나설 필요가 없지만 이왕 나서겠다고 했으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네! 하하, 본 대인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침착한 한 노사와 열렬한 중소구와는 달리, 동천은 걱정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웃길 건덕지도 없는 놈이 나섰다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그 타격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야, 괜히 무리하지마. 그러다가 쪽 먹으면 평생 한 된다.”
도연이 의외로 사소한 것에 상처를 잘 받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하는 소리였다. 그러자 도연은 괜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니가 장가가는 5대 독자냐?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하게?’
한심함이 절로 밀려왔지만 그는 이왕 이렇게 된 마당이니, 주군된 도리로서 용기를 불어넣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좋아, 한번 해봐.”
“예.”
주군에게서 시선을 거둔 도연은 한 노사와 마주 보며 자리를 앉은 뒤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자신이 아는 제일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옛날에 아주 착한 나무꾼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죠.”
순간 동천은 저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어디서 들었지? 으음.’
그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에 도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그러고 있나요?’ 그러자 나무꾼이 대답하길 ‘예,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했죠. 다 듣고 난 착한 선녀는 ‘그렇다면 저쪽으로 가보세요. 그럼 길이 나올 거예요.’하며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에 나무꾼은 감사하다며 그쪽으로 걸어갔고…….”
“자, 잠깐!”
그제야 궁금증을 해결한 동천이 다급히 제지시켰다. 당연히 잘 듣고 있던 중소구와 한 노사의 입장에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중소구가 소리쳤다.
“뭐야! 네놈이 뭔데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냐?”
중소구가 뭐라고 지껄이던 동천은 오직 도연에게만 시선을 집중시켰다.
“설마, 너 지금 이야기가…….”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예전에 도련님께 해드렸던 이야기입니다.”
동천은 벌컥 화를 냈다.
“에이 씨, 누가 그따위 개나발 같은 이야기를 듣고 웃는다는 거야! 당장에 그만 둬!”
“아니, 이놈이! 도 소형제의 말이 그렇게 못마땅한 것이냐?”
“그게 아니라 이건 전혀 웃기지 않는 거라고요!”
“뭐가 어째?”
“못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만!”
한 노사의 외침에 한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한 노사는 이 소란의 주범을 지그시 노려본 뒤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의 경중(輕重)은 내가 판단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입을 다물고 있어라.”
동천은 당장 말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한 노사가 저렇게 나오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나서야 하는지 그 의미를 찾지 못했다. 추워서 얼어 죽던 심장이 멈추던 그가 상관할 바 아니지 않는가. 철경의 해석이 못내 아쉬웠지만 당장의 심정으로는 그따위 것 익히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 없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었고, 도연은 한 노사의 눈치를 받아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걸어가던 나무꾼은 호랑이와 만나게 됩니다. 그 호랑이가 말하길 ‘어흥, 내 영토에서는 나무를 벨 수 없다.’라고 했죠. 그러자 겁먹은 사냥꾼이 ‘그, 그럼요. 나무를 밸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길을 잃어버려서 길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라고 말하자 가만히 듣고 난 호랑이는 ‘그래? 그럼 이쪽으로 가봐라. 그럼 길이 나올 것이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헌데, 호랑이의 말대로 길을 가던 나무꾼은 걸음을 멈춰야 했습니다.”
양 볼이 퉁퉁 부은 얼굴로 있던 동천은 ‘이쯤 되면 언놈의 인간이 질문을 할 텐데.’라는 시선으로 중소구와 한 노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이런 일에 참을성 없었던 중소구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했다.
“어째서인가?”
“다름이 아니라 호랑이가 가르쳐 준 길로 가니, 아까 자신이 선녀를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알겠다는 얼굴의 중소구를 보며 동천은 구시렁거렸다.
‘그렇구나는 개뿔……. 다음 이야기를 듣고 후회하지나 마라.’
동천이 그러는 가운데 요 삼 개월 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었던 한 노사가 이례적으로 재촉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