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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21화


“다음 이야기를 어서 말해보거라.”

도연은 알겠다는 듯 말했다.

“되돌아온 나무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헤매다가 어떻게 됐다는 말이냐?”

잠시 주저하던 도연은 다소 서글프게 끝마쳤다.

“결국, 결국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

일순 장내는 조용해졌고, 중소구는 뜻 모를 오한을 느꼈다. 불신에 가득 찬 그의 눈빛은 마치 도연을 향해 ‘장난이었다고 말해주지 않겠나?’하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표정이라면 한 노사도 만만치 않았는데 얼굴을 붉힐 대로 붉힌 그는 ‘그그극!’ 소리가 날 정도로 서탁을 긁어댔다. 그것을 본 동천은 ‘그래, 기대하고 들었다가 그따위 결말과 마주하게 되었으니 환장할 만도 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진심으로 한 노사를 불쌍히 보았다. 그리고 그때를 맞춰 한 노사가 바닥을 굴렀다.

“우하하하!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우히, 우히히히!”

“…….”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장내가 조용해졌다. 웃기지도 않는데 좋다고 웃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불신에 가득 찬 중소구의 눈빛은 마치 한 노사를 향해 ‘불쌍해서 웃어주었다고 말해주지 않겠소?’라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으며, 멍청해진 얼굴로 한 노사를 바라보던 동천은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반전(反轉)의 묘미.’라는 구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큭큭, 그,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그 누가 상상을 했겠는가? 푸하하! 재밌구나, 아주 재미있어! 본 한진배(漢進排) 생애 최고의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으하하하!”

어느새 정신을 차린 동천은 웃고 있는 한 노사를 향해 내심 미친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거 가지고 웃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평범한 천재인 자신이 이해를 못했다면 이해 못 할 짓을 한 상대는 당연히 미친놈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웃었으면 된 것이 아니던가.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행여 한 노사가 딴 소리를 할까 봐 재빨리 입을 놀렸다.

“노사님. 웃으셨다는 것을 인정하시리라 믿습니다.”

체면 따질 것 없이 웃고 보자는 식이었던 한 노사가 동천의 이야기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타인의 세 치 혀로는 평생 웃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였는데 오늘 그것이 여지없이 깨어져 시원섭섭할 따름이구나. 동철, 너만 남고 나머지는 물러들 가시게나.”

중소구는 밖에 나가 있는 것이 못내 아쉬운 눈치였지만 나중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니 하는 수 없이 한 노사의 말을 따라야 했다.

“쩝, 알겠소이다. 도 소형제. 같이 밖에서 기다리세.”

“그러지요.”

그들이 나간 후, 한 노사가 구석에 잘 보관하고 있던 철경을 꺼내 서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이것은 치우의 물건이 맞다.”

한 노사의 짧은 이야기에 동천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우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 사항도 없었건만 이유 모를 흥분은 동천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것을 다르게 이해한 한 노사는 그러려니 생각했다.

“놀랄 만도 할 것이다. 상고시대 천하의 주인이라 할 수 있었던 자의 유물이니 그럴 수밖에.”

‘응? 상고시대의 천하제일인?’

이번에는 한 노사의 착각대로 놀라야만 했다. 대단한 것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의 물건이라곤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천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상황에서도 태연한 척했다.

“그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뒷부분을 몰라 고생했을 따름이지요.”

흔들림 없는 동천의 태도에 한 노사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생각보다 심지가 굳은(?) 아이라고 인식을 달리 한 것이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본 늙은이가 무공에 관해 하는 것은 없지만 본디 진정한 무(武)라 함은 문(文)을 기본으로 파생되었기에 그 기본 골격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느니라. 이 치우철경에서 말하기를 일초를 익히면 천하를 호령하고, 이 초를 익히면 천하를 아래에 두며, 마지막 삼 초를 익히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본 늙은이가 보기에도 처음의 일초는 분명 천하를 호령할 만하다.”

꿀꺽.

동천의 마른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주워들었던 것이 이런 엄청난 물건이 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흥분으로 인해 동천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가운데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한 노사는 뒤이어 다소 애석하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허나, 이것은 완전한 치우철경이 아니다.”

동천은 깜짝 놀라 물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소리냐 하면 삼 초식이 있어야 하는데 단 일 초식만이 남아있다는 소리다. 아마도 무슨 사정으로 분리되었거나 애초부터 상중하로 나뉘어 있는 건지도 모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동천의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일 초식밖에 없다고요? 사실입니까?”

그러자 한 노사의 주름진 얼굴이 동천의 배나 가깝게 일그러졌다.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더냐?”

찔끔한 동천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아쉬워 잠시 흥분을 한 것 같습니다. 헤헤.”

동천이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자 한 노사도 그제야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 늙은이가 밤새 읽어보았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대한 것이라 해석이 완전치 못하다. 적어도 한 달은 걸려야 할 것 같구나. 한데, 네가 곧 떠나야 하니 난감할 따름이다.”

사정화의 눈길을 피해 도망쳐 나온 동천이 난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곳에 있으면 오히려 안전하고 편하지. 동천은 ‘그것 때문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생각해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짐짓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렇군요. 이를 어쩐다. 기일을 넘기면 사부님께서 걱정하실 텐데…….”

한 노사로서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오직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긴 동천은 일부러 크게 탄성을 질렀다.

“아? 사부님께는 도연을 보내면 되겠군요. 자세한 사항을 적어 보내면 사부님께서도 충분히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한 노사의 얼굴에 ‘왜 나는 그 생각을 못 했을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좋다, 그렇다면 내 마음 놓고 해석에 전념하마. 이런 일은 아주 즐거운 일이지. 아무렴.”

‘히히, 네가 즐겁다니 이 몸도 즐겁구나. 아무렴!’

덩달아 좋아하던 동천이 일어나려 하자 한 노사가 노파심에 주의를 주었다.

“나가기에 앞서,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동천은 엉거주춤 앉으며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이것의 가치는 무한하다 할 수 있느니라. 특히, 무림인들에게는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동천도 알고 있었지만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진지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 노사는 단호하게 한마디 더했다.

“밖의 중 대인조차도 말이다.”

동천은 하마터면 코방귀를 뀔 뻔했다.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표정을 가다듬은 뒤 더욱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오나, 당장에는 조심하겠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한 노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에 생각 있는 아이였구나. 좋다, 나가보거라.”

“예, 노사님.”

동천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나가자 도연과 중소구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행여 중소구가 방안의 내용을 들을까 봐 심지 깊은 도연이 일부러 먼 곳으로 유도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었던 동천은 ‘다행히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다 끝났느냐?”

중소구가 묻자 동천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연이은 물음이 이어졌다.

“가르쳐 준데?”

“네, 한데 시일이 좀 걸린다네요.”

“어째서?”

“해석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아서 한 달 이상은 걸릴 거래요.”

대답을 듣고 난 중소구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쩝! 난 또 금세 해석되는 줄 알았는데 말야. 이거, 그때까지 궁금해서 어떻게 참는다?”

동천이 그런 중소구를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부진한이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오늘도 허탕을 친 것이오?”

중소구는 씨익 웃고 난 후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도연의 한쪽 어깨를 덥석 감싸안았다.

“그럴 리가 있겠소! 드디어 오늘 도 소형제가 한방에 웃겨버렸소이다! 으하하!”

부진한은 믿을 수 없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게 정말이시오?”

중소구가 심히 불쾌하다는 기색을 띄웠다.

“그럼, 본 대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오?”

부진한은 급히 대답했다.

“그것이 아닙니다. 한 노사께서 웃음이 없으신 것은 본가에서도 소문이 자자한지라 순간 믿을 수 없어 반문했던 것이오. 하하, 어쨌든 그분께 웃음을 선사했으니 고문자 해석은 곧 끝나겠구려.”

부진한이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를 다시 거론하자 중소구는 마치 자기가 철경의 주인인 양 씁쓸히 대꾸했다.

“그게 그렇지만도 않소.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일을 떠맡은 탓에 준비할 것이 많은 것 같소이다. 그래서 한 달 이상은 걸린다고 합디다.”

“저런, 많이 궁금하셨나 보오.”

중소구를 다독이던 부진한은 자연스레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어떠한 이야기를 해주었기에 한 노사께서 웃으신 것이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외다. 하하하!”

부진한의 이야기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던지 동천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칠 거다. 니가 안 미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동천과 비슷한 이유로 잠시 주춤한 중소구는 다른 이야기로 말꼬리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딱히 부진한의 관심사를 돌릴만한 화젯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도연의 입을 빌어 다시 한번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결국,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

예상대로 부진한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심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귀가 좋았던 동천은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데 ‘말도 안돼…….’라고 혼자 뇌까릴 따름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부진한은 창백해진 낯빛으로 도연에게 말했다.

“아? 미안하구나. 너무도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그렇단다. 별 뜻은 없으니 개의치 말거라.”

도연은 이해한다는 듯 대답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그래.”

부진한은 침체된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때의 상황을 좀 더 듣고자 했다. 그래서 중소구가 대표로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고, 다 듣고 난 부진한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듯 힘없이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난 이제 가봐야겠소이다.”

중소구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상대의 심정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시구려. 이럴 때일수록 맘 편히 쉬어야지.”

“이해해주니 고맙소.”

활기차게 찾아왔던 것과는 달리,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는 내심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휴우, 충격이로다.’

존경했던 한 노사가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에 웃었다는 것은 부진한에게 확실히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호탕하게 웃은 것이 아니라 ‘이히, 이히히히!’거리며 웃었다지 않은가. 중소구가 그 부분을 특히 강조시킨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었기에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부진한에게는 무엇보다 사실이라는 부분만이 중요했던 것이다. 맥아리 없이 걸어가던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자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이 보였는데 그도 익히 알고 있던 여인이었다.

“부인이셨구료.”

부진한의 부인은 남편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걱정스레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부진한은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길 ‘내가 존경하는 분은 가주님도 아니고 태상 가주님도 아닌, 바로 한 노사님이라오.’라고 자랑하듯 말해왔는데, 막상 그분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자니 갈등이 생성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남편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그녀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만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말 못 할 사정이라면 저도 궁금하지 않아요.”

그 말에 절로 뜨끔해진 부진한은 정에 못 이겨 결국에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휴우, 그렇게 된 거라오.”

그녀는 남편의 충격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저런…, 그래서 안색이 창백하셨군요.”

“내 당신에게만 말해준 것이니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시오. 그분께 누가 될까 두렵소이다.”

“그것은 걱정 말아요. 저도 생각 있는 여자니까.”

서글픈 눈빛으로 부인을 바라보던 부진한은 신형을 돌리며 힘없이 말했다.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고 오겠소이다.”

“조금만 마시고 오세요.”

“알겠소.”

그녀는 술 마시는 남편을 꺼렸지만 오늘만은 이해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선 그녀는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며 바삐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참으로 도마에 오를 이야기로구나. 정 부인께서 들으시면 그 표정이 어떨지 참으로 궁금한데? 호호호!’

이것이 생각 있는 여인네의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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