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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23화


남들이 보기에 노는 것 같이 보여도 아침저녁에 꼭 한차례씩 운기조식을 취했던 동천은 깨워주는 도연이 없자 사흘 내내 늦은 아침이 돼서야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전 했다. 먼저 운기하기 시작한 것은 치우철경 내의 역심무극결이었다. 처음에는 그 원리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절반 이하의 성취도를 보이고 있는 심법.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한식경 가량의 운기를 끝마치자 단전에서 아주 미세한 흐름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너무 미세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뒤이어 익히게 되는 귀의흡수신공 때문이었다. 그것 역시, 앞서와 비슷한 시간을 들여 운기를 끝마친 동천은 신경질적으로 투덜대었다.

“쳇! 쳇! 이게 뭐야. 또 흡수됐잖아?”

동천의 투덜거림에서 드러났듯, 귀의흡수신공이 그나마 생성되었던 역심무극결을 빨아들여 그 흔적을 지웠던 것이다. 이러니 그가 어찌 투덜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 딴엔 머리 좀 굴린다고 심법의 순서를 바꿔보았다. 효과는 있었다. 허나 그러면 뭐 하는가. 다음 날 귀의흡수신공을 익히면 심법의 이름 그대로 흡수되어 버리는 걸. 그렇다고 주 내공인 귀의흡수신공을 중단하자니 미친 짓 같고, 또 역심무극결을 관두자니 치우도법의 존재가 너무도 아까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몸에 이상이 없는 한, 우선 이 상태로 밀고 가자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귀의흡수신공 자체에서 시전자의 몸에 이롭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역심무극결의 힘을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서로 비등한 묘리(妙理)를 담고 있는 심법들이었지만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한 수 위라 할 수 있었던 역심무극결이 한 수 위였다. 그러면서도 힘없이 흡수되었던 이유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귀의흡수신공이 그 이점을 살려 결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대립하지 않고 흡수를 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무리 대단한 역심무극결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허나, 역심무극결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이던가? 하는 수 없이 한 발 물러선 역심무극결은 관조(觀照)적인 입장에서 귀의흡수신공 내의 또 다른 존재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에도 내부 사정에 완전히 깡통이었던 동천은 늦은 아침을 먹고 한숨 퍼질러 잔 뒤, 점심을 먹고 다시 퍼질러 잔 뒤, 자는 것도 귀찮아지자 찌뿌둥해진 몸을 이끌고 길을 헤매지 않는 선에서 밖으로 나왔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기라 오후의 열기는 수그러들고 있었다.

“아하, 벌써 해가 지는구나. 가만있자. 내가 어제 지는 해를 보고 잤는데 일어나 다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니 참으로 나는 행운아구나.”

그게 왜 행운아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좌우로 두리번거리던 동천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장난 삼아 귀영신법을 펼쳤다.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이리저리 희미한 잔영을 만들어갔다. 흥이 난 동천은 1단계인 귀영분광을 펼쳤다. 순간 두 개의 인영이 만들어졌고 분리와 합체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분광을 세 개로 만들려는 찰나, 내력의 한계에 부딪혀 바닥을 구르고야 말았다.

“웁! 에푸, 퇘! 에이, 입안에 흙이 들어갔잖아?”

동천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허리띠를 풀면 귀영분광의 마지막인 네 개의 분광까지도 가능했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로도 한다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허리띠를 풀지 말라는 듯 동천의 감지력에 여러 명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담을 따라 걸어오고 있어 정체가 불분명했다.

‘언놈들이지? 발걸음이 가벼워 하인들은 아닌 듯한데.’

궁금하여 대문 쪽을 꼬라보고 있자 다소 창백한 안색의 부진한이 보였고, 뒤이어 황룡미미와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는 추연이 보였다.

‘으윽! 저 계집애는 또 왜 왔지? 으으, 소구 새끼가 사라져 평화가 찾아왔나 했더니 그것은 이 몸만의 착각이었나?’

동천의 착각만은 아니었다. 황룡미미는 제갈세가를 떠나기에 앞서 찾아온 거니까. 그녀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나 동천은 흔들림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헌데, 이곳엔 어쩐 일입니까?”

“오늘 본가로 돌아간답니다.”

동천은 진심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황룡미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다행이라는 말인가요?”

그러자 동천이 넉살 좋게 말했다.

“하하, 지금에야 떠나신다는 것은 소저의 뜻대로 마음껏 지내셨다는 뜻이기에 그것을 다행이라고 한 것입니다.”

황룡미미는 비웃음인지 몰라도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녀는 길게 상대할 마음도 없기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군요. 그리고 추연의 문제는 아버님께서 불가하다 연락을 보내셨어요. 사람이란 존재를 마음대로 주고받는 짓은 용납하실 수 없다는군요. 대신 다른 것을 원하신다면 청해 보라 말씀하셨어요.”

동천의 눈이 반짝였다.

“다른 것?”

황룡미미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요.”

확답까지 듣고 난 동천은 몇 달 전 생각 없이 했던 말이 이렇게 복이 되어 굴러들어오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흥분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행운이란 놈은 찾아왔을 때 얼른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동천은 추연을 바라보며 짓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추연을 대신해 황룡신단(黃龍神丹)을 원하는 수밖에.”

“뭐라고요!”

흥분한 황룡미미는 끝에 ‘요.’ 자를 빼고 소리칠 뻔했다. 동천이 가져온 물건과 비교하자면 그만한 요구는 별것 아니라 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황룡미미로서는 날로 먹는 심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의 살벌한 눈초리에 지레 놀란 동천은 콩알만해진 간땡이를 부여잡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허나, 이제 와 주워 담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그래서 동천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밀어붙였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세 개입니다. 저만 먹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참다못한 황룡미미가 살기를 터트렸다.

“감히 그것을 세 개씩이나…….”

퍼뜩, 정신을 차린 동천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뭔 짓을 했나 싶었다.

‘윽? 벼, 병신 같은 주둥이. 왜 세 개라고 말했어! 너 미쳤니? 응? 으으, 그냥 조용히 긍정만 할 걸.’

긴장한 상태에서 막나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욕심 섞인 발언을 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동천은 몰린 김에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일어났다.

“가부(可否)의 문제는 황룡가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만.”

분노에 몸을 떨던 황룡미미가 웬일인지 피식 웃었다.

“좋아요. 맞는 말이에요. 가부는 제 아버님께서만 하시겠지요.”

그녀가 웃은 이유에는 ‘네 무리한 요구가 받아질 리 없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꼴사납게 분노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황룡신단이 어디 강아지 이름이던가? 한 알에 근 십 년의 내공을 보장해주는 황룡세가의 대표적인 영약이 아니던가. 그 제조 방법이 까다로워 이십 년에 다섯 알이면 많이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즉, 십 년에 두 알꼴로 만들어지는 셈이었다. 동천을 차갑게 노려보던 그녀는 찬바람이 휘날리도록 등을 돌리며 추연에게 말했다.

“가자.”

추연은 급히 동천에게 허리를 숙인 뒤 아가씨를 따라갔다. 그리고 자신의 화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황룡미미는 뒤따라오는 부진한에게 혼자서도 갈 수 있고 본가로 돌아갈 때 연아와 동행할 것이니 따라올 필요가 없다는 말로 그를 내쳤다. 부진한으로서는 임무를 다해야 했지만 요새 기분이 기분인지라 그녀의 명령을 쉽게 따랐다.

‘휴우, 세상이 뭐 이러하더냐.’

한숨을 내쉰 후, 씁쓸한 표정으로 발치께의 돌멩이를 걷어차던 그는 문가 너머에서 혼자 킥킥거리고 있는 동천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린애이긴 하지만 말동무라도 해볼 겸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보게, 그리 좋아할 것 없네. 자네가 황룡세가에 갖다 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그래, 자네 일행이 황룡세가에 건네준 물건이 무엇이던가?”

의외였던지 동천의 눈동자가 커졌다.

“모르세요?”

“그렇다네. 나 같은 당주급이야 장로님들을 비롯해 가주님까지 움직이게 한 그 물건을 알 리가 없지.”

동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가르쳐줄 수도 있었지만 위에서 비밀로 한 것을 그가 발설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었다. 약왕전의 소전주로 있을 때 사부에게 그런 기초적인 주의 사항들을 배웠었던 동천은 역시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죄송하네요. 윗분들이 비밀로 한 것인데 제가 망쳐놓을 수 없잖아요.”

부진한은 깜짝 놀랐다. 생각 없이 사는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이다. 동천은 그가 놀라는 사이, 화제도 돌릴 겸해서 그동안 중소구 때문에 물어보지 못했던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대인 중소구께서 예전에 광객(狂客) 중소구라 불리셨습니까?”

“저런? 같이 다니고 있었음에도 여지껏 그것도 몰랐는가?”

“헤헤, 그렇게 됐네요.”

부진한이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중소구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여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말해주기에 앞서 요즘 자신의 입이 너무 헤픈 것이 아닌가 고심했지만 이 이야기는 동철이라는 아이를 위해 꼭 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흔들리던 심기가 굳혀졌다.

“그러니까 십 년 전. 중 대인 나이 25살에 그는 자신의 호가 광객(光客)이라 하며 무림에 처음 등장했다네. 참으로 이상한 외호였지. 어디를 봐도 빛나 보이지 않는 인간이 그런 호를 자신의 외호라 하며 떠들고 다녔으니 말이야. 초창기에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그가 의외로 심지가 굳고 시시비비를 잘 가리는지라 사람들은 인식을 달리해 그를 협객(俠客)이라고 칭했다네. 물론, 본인 자신은 끝까지 협객이 아니라 광객이라 불러달라고 했지만 말이야.

그렇게 삼 년이 지났네. 강호에 묘한 소문이 떠돌았지. 글쎄, 광객 중소구가 일련의 무림인들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그 무림인들의 외호에 광(光)자가 들어간 자들만 찾고 다닌다는 거야. 하지만 외호에 광자가 섞인 무림인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네. 있다면 소림사에서 파계당한 주제에 대머리만 번들거린다 하여 두광(頭光) 공추(共抽) 정도? 아니, 더 있기는 했지만 웬일인지 중 대인은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면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지나쳐 버렸네. 그렇게 지나쳐 버렸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꼭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고자 했던 그는 거부한다 해도 다짜고짜 덤벼들고 보았지. 손속을 겨루는 와중에 당연히 중상자들이 속출했고, 그 소문이 퍼지고 퍼지자 사람들은 그를 달리 보게 되어 협객에서 광객(狂客)으로 달리 부르게 된 것일세. 이제 알겠는가?”

알긴 알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도중 다른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런데 중 대인께서 광자가 들어간 무림인들을 찾고 다녔던 이유가 뭡니까?”

부진한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모른다네. 다만 그가 자신을 포함해 외호에 광(光)자가 들어간 세 명의 무림인들을 모아놓은 뒤, 술잔을 기울이며 이렇게 한탄을 했다고들 하지. ‘아아, 오광의 꿈이…….’라고 말일세.”

동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광(五光)? 오광의 꿈? 그게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 거지?’

부진한에게 물어볼까도 했지만, 그도 더 이상은 아는 게 없는 듯 보여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됐는가?”

“예? 예, 됐습니다. 궁금증이 확 풀리네요. 아,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만약 황룡세가에서 황룡신단을 보내준다고 하면 이곳까지 오는데 며칠 정도가 걸릴까요?”

날짜를 계산하는 데 변수라도 있는지 부진한의 눈가에 잔주름이 생겨났다.

“글쎄. 황룡신단 같은 문제는 아무래도 미미 아가씨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허가가 날 것 같네. 문제는 미미 아가씨께서 저번에 올 때처럼 한가하게 가시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지. 이런저런 것을 따진다면 적어도 이주일 정도는 잡아야 할 걸세.”

이주나 걸린다는 소리에 딱딱하게 굳어지는 동천.

‘이럴 수가! 그때쯤이면 소구 새끼가 돌아와 띵가띵가 놀고먹고 하고 있을 시간이잖아? 아아, 그 새끼 성격이라면 분명히 빼앗아 처먹을 텐데……. 어떻게 하지?’

부진한은 갑작스레 변한 동천의 표정을 주시하며 물었다.

“왜 그런가? 문제라도 있는가?”

“그게 그러니까.”

동천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잘못 말했다가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아이로 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얼마든지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원래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니까. 그러나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중소구가 듣게 될 경우였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으으, 생각하기도 싫다.’

그때 대답을 꺼린다고 생각한 부진한이 다소 서운한 듯 말했다.

“사정이 있나 보군. 그렇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네.”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인 동천은 아니라는 듯 손을 저어댔다.

“사정까지는 아닙니다. 실은, 중 대인께서 단환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어찌하실지 몰라 잠깐…….”

동천이 알아서 뒤끝을 흐리자 부진한은 그제야 알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아, 그러니까 중 대인께서 어른 된 입장을 이용해…….”

부진한도 말끝을 흐렸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했던 바가 틀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창피해서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니겠는가. 이런 부진한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동천은 저 인간이 잘 나가다 왜 말끝을 흐리나 했다.

“저기, 끝까지 말씀해보세요.”

“아, 아니네. 자네가 먼저 할 말을 다 해보게.”

묘한 대치 상황이 흘렀으나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아무래도 동천이었다.

“그러니까요. 저기, 그 물건을 발견한 것은 도연인데 도연의 주인인 저는 그렇다 쳐도 몇 달 전 오다가다 만난 중 대인께 그 귀한 신단을 주게 되는 것이 꺼려진다는 겁니다. 휴우, 이런 저를 이기적인 아이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제가 다 꿀꺽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당연히 도연을 먹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제 사부님께 드리고 싶은 욕심에 이러는 것입니다.”

일부러 머뭇머뭇 이야기하던 동천은 대화 도중 부진한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건 초보자나 저지르는 실수니까. 이런 일에 상급자 단계까지 도달해있던 동천은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 부끄럽다는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러자 부진한은 일말의 의심조차 날려버렸다. 그는 오히려 다독이기까지 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자네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야. 그 누구라도 이런 자네를 비난할 순 없어. 내 잘 알았네. 그래서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가.”

슬그머니 웃고 있던 동천은 고개를 다시 원위치 시키며 여전히 부끄러운 척했다.

“그래서…, 만일 황룡신단이 도착한다면 진한님께서 제게만 은밀히 알려주십사…….”

이런 이야기는 상대를 믿지 못하면 절대로 오고갈 수 없는 유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진한은 자신을 믿고(?) 말해준 동천을 위해서라도 꼭 들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 부진한이 책임지고 자네에게만 일러주겠네!”

그러자 동천이 우는지 웃는지 분간하기 힘든 얼굴로 고마워했다.

“아아, 고맙습니다. 아직 몇 개가 올지는 모르지만 사부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네요. 흑흑.”

마지막에 우는 것을 보아 감격에 어린 모습인 듯싶었다. 그런 동천의 행동을 보게 된 부진한은 참으로 탁월했다고 생각했다.

“하하! 나도 기쁘네. 그러니 울지 말게.”

“예에. 흑흑.”

“어허, 울지 말라니까. 하하하!”

동천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부진한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고, 한 노사의 일까지 어느 정도 씻어버린 후 돌아갔다. 그리고 가는 부진한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동천은 그가 사라지자 이렇게 씨부렁거렸다.

“씨팔, 웃기는데 우는 척하느라 아주 죽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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