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26화
내려가는 길목은 손길이 떠난 지 오래여서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수풀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그 바람에 숨겨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분공은 짜증을 내며 일어섰다.
“에이, 저놈의 늙은이들은 도대체가 주변 손질을 모른다니까?”
불평하는 자기도 똑같은 인간이었지만 원래 욕하는 쪽은 자기 잘못을 모르는 법이니 넘어가기로 하자. 투덜투덜대며 마을 입구까지 내려온 그는 문득 도연을 떠올렸다.
‘그 녀석의 상(相)은 분명 나를 인도해 줄 상이었어. 살아오면서 몇 번의 그런 상을 보았지만 그 녀석만큼 강렬했던 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서호(西湖)에서 태어난 분공은 원래 문정(雯整)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있었다. 그의 나이 세 살 때 아버지가 노상강도에게 당해 일찍이 부친상을 당했으나 넉넉한 재산이 있었기에 먹고사는 데에는 불편 없는 유년 생활을 누렸다. 귀안(鬼眼). 예각이 분공의 별명을 지어준 귀안은 오가사의 복덩이인 분공을 띄워주려는 속셈에서 마냥 지어준 외호가 아니었다. 분공의 눈썰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상대의 의도를 백이면 백. 정확하게 알아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분공의 능력은 후천적인 것이었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생겨난 이 능력은 우연인지 몰라도 어머니가 재혼을 앞두기 열흘 전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다. 분별력이 모자란 어린 나이의 그가 누구든지 한 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귀신이라도 들린 듯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집어내었던 것이다. 처음에 자신의 이런 능력을 알았을 때 분공은 그저 놀랍고 즐겁기만 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 재미있었으니까. 그러나 하루하루 다음 날이 기다려지는 그에게 이렇듯 기쁜 나날은 잠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지나칠 때 그들이 누군가 죽이러 가는 것임을 깨닫고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모르는 사람이 친절하게 다가와 먹을 것을 사주었지만 실상은 자신을 납치해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감지했을 땐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서 울며불며 엄마를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분공은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서웠다. 사흘 나흘 방 안에 틀어박혀 피해망상에만 빠져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기 사흘 전, 재혼할 상대가 찾아왔다는 소리에 분공은 뛸 듯이 기뻐했다. 몇 번의 만남으로 단번에 친해졌던 그 아저씨라면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단번에 해소해 줄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즐거워진 마음에 재빨리 뛰어나간 분공. 그러나 그가 아저씨를 대하고 느낀 감정은 처참할 따름이었다. 다정다감한 아저씨의 친근함은 역겹고 구토가 치밀어 올랐으며 어머니와 나란히 서있는 그의 모습은 이유 모를 소름을 동반했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 그에게 아저씨를 보낸 어머니가 뒤늦게 찾아와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경황이 없었던 분공은 자세한 설명 없이 무조건 그 아저씨가 싫다며 울고불고 매달렸다. 당연히 그를 달래다 못해 지쳐버린 어머니는 모진 회초리를 들었고 분공은 퉁퉁 부은 다리를 어루만지며 밤새 눈물을 쥐어짜게 되었다.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다 못해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게 된 분공은 그때 희한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그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뒤 다짜고짜 호통을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남자의 말인즉, ‘이 아비는 저승사자의 눈을 피해 네게 그러한 능력을 주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어머니를 말리지 못한 것이냐!’라는 것이었다. 분공은 기겁을 하며 꿈속에서 깨어났지만 불행히도 그 꿈은 역효과를 유발시켰다. 안 그래도 소심한 성격이었던 그가 그러한 꿈까지 꾸게 되자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의 재혼이 끝나는 날까지 혼자서 끙끙 앓아 눕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꿈속에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사라졌지만 그의 어머니가 재혼을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문제는 같이 붙어있는 중년남자야.’
분공은 도연에 이어 중소구를 떠올렸다. 그는 대인 어쩌고 하는 중소구가 마음에 걸렸다. 도연은 분명 자신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상이었지만 대인이라는 그자에게서는 탐탁지 못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분공에게는 상대의 얼굴만 보고도 현재, 또는 미래의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까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이 또한 자기계발이 아닌 후천적인 것이었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고 아버지가 된 의부를 매일매일 마주해야만 했던 그는 의부를 대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생활이 반복되자 나날이 말라갔고, 모르는 누군가 본다면 집에서 애를 학대하며 굶기고 있는 줄 착각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풍족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마를 대로 마르다 걷는 것까지 고통이었던 분공은 그 나이 또래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살이라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목을 매려다 목 대신 팔목이 끼어 자살미수에 그쳤지만 그의 어머니에겐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걱정이 앞선 그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잠시 동안 외가에 맡겨두기로 결정했고, 그런 이유로 멀리 외가에 맡겨진 분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점점 체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렇게 외가에서 2년을 보내고 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인편으로 전해진 모친상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외가의 사람들과 달려온 분공은 텅텅 빈 집안에 외로이 놓여있는 어머니의 관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의 말을 들어보니 부인의 관 앞에서 실신에 실신을 거듭하던 의부는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전 재산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나마 같이 동행해준 외가의 식구들이 여비를 모아 무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까지 여읜 분공은 무덤 근처에서 지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안 그래도 빠듯한 살림이었던 외가는 어린 분공을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할 경제적인 힘이 모자랐다. 그들은 열흘이 지났을 즈음 싫다는 그를 억지로 외가에 데려왔으나 의지가 명확했던 분공은 감시가 소홀한 새벽을 틈타 외가를 뛰쳐나와 버렸다.
그는 어머니가 묻혀있는 고향을 향해 달려갔지만 대책 없이 뛰쳐나온 어린애가 가봤자 얼마나 갈 수 있었겠는가. 며칠이 지나고 굶게 돼서야 자신이 얼마나 우매했는가를 깨닫게 되었지만 그것은 때늦은 후회일 따름이었다.
“이거, 오가사의 꼬마 중 아냐?”
뒤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분공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돌아보니 모르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그는 그냥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대답해주었다.
“아? 전에 보았던 이 마을 분이군요. 헌데 무슨 일로.”
사내는 피식 웃은 후 손을 내저었다.
“별일은 아니고, 잘 살고있나 해서 말야.”
외지인의 돈으로 먹고사는 것을 은근히 비꼬는 것이었다. 이런 것에 이력이 난 분공은 차분히 대꾸했다.
“덕택에 저희야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더 하실 말은.”
“하하, 이제는 없어. 볼일 잘 보게 꼬·마·중. 푸하하!”
사내가 사라질 때까지 웃음을 짓고 있던 분공은 잠시 후 침을 탁 뱉었다.
“퉤! 지는 얼마나 깨끗하게 산다고.”
그는 발에 걸리는 것들을 툭툭 쳐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지금 사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정보통에 의해 값을 잘 쳐준다고 소문난 장물 취급점(店)이었다. 그는 약도에 따라 제대로 찾아갔다.
“안녕하시오.”
들어가기에 앞서 통로를 지키고 서있는 근육질의 사내에게 인사를 건네자 사내는 무감각한 어조로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소?”
누구의 소개를 받았는지 묻는 것이었다. 소개한 사람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기에 사내는 정보통이 일러준 대로 전혀 위축됨 없이 대답했다.
“금상(金像) 광대인의 소개를 받았소이다.”
그의 예상대로 사내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들어가시지요.”
사내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곤 제법 널찍한 마당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갔다. 광대인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소리에 냉큼 달려온 염문은 사내의 얼굴을 잠깐 살펴보는 듯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들었는지 모르지만 염상이라고 하오. 그래, 무엇을 처분하러 오셨소?”
“바로 이것이오.”
뜸 들이지 않고 그가 꺼낸 것은 오색 비취가 영롱하게 박혀있는 화려한 나비 모양의 장신구였다. 특히, 정 중앙의 흑묘석이 유난히도 돋보이는 장신구였는데 그것을 보자 흠칫한 염문은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오호, 일명 영취접(永聚蝶)이라는 장신구로군. 이것은 어디에서…….”
사내는 딱 잘라 말했다.
“값이나 부르시오.”
다소 안색을 굳히고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던 염문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은자 3500냥을 드리겠소.”
“지금 장난하시오? 가운데 흑묘석만 빼다 팔아도 3000냥인데 고작 그 값어치로 될성싶소?”
그러자 염문이 냉랭히 말했다.
“잘 모르는군. 분명 그렇긴 하지만 이 세공의 흐름을 잘 보시오. 이 흑묘석은 원구가 아니라 안쪽에 들어간 부분이 잘려있는 쓸모 없는 것이오. 즉, 빼내면 500냥을 받을까 말까 하는 것이지.”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
“못 믿겠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빼내 보이겠소. 하지만 내 말이 맞다면 각오해두시오.”
염문의 기세에 눌린 사내는 마른침을 삼킨 뒤 고개를 저었다.
“하하, 됐소이다. 내 어찌 전문가의 말을 믿지 않겠소. 그냥 3500냥만 받고 팔리다.”
“3000냥!”
“뭐, 뭐요? 아까는 분명…….”
“2500냥!”
발끈한 사내는 염문의 손에서 영취접을 빼앗았다.
“그 무슨 헛소리요! 난 팔지 않겠소!”
사내가 나가려하자 염문의 목소리가 강압적으로 바뀌었다.
“팔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거냐?”
그것이 신호였던지 몇 명의 장정들이 몽둥이를 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겁을 집어먹은 사내는 두려워하는 얼굴로 물러섰다.
“왜들, 왜, 왜들 이러시오. 알았소. 파, 팔면 되지 않소.”
영취접을 받아든 염문은 희미하게 웃으며 100냥짜리 은표 다발을 건네주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아버린 사내는 은표가 다섯 장이나 모자라자 고개를 획 들었다. 염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오. 2000냥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씀이시오?”
사내는 눈물을 머금고 애써 웃었다.
“하, 하하. 그럴 리가요. 아주 만족합니다.”
“좋소이다. 그럼, 나중에 처분할 물건이 있다면 또 들려주시기 바라오.”
“그, 그리하지요.”
사내는 분루(忿淚)를 흩날리며 염문의 장물점을 뛰쳐나왔다. 그는 생글거리며 이곳을 소개해 준 정보통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흑흑, 개 같은 새끼. 가서 기필코 면상을 짓이겨 주리라.’
사내는 그렇게 미친 듯이 뛰어갔다. 그러자 그와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네 명의 사내들은 서로들 중얼거렸다.
“쯧쯧, 초짜 놈이 또 염가에게 걸렸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떡값에 사들였을 게 분명할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 장사도 꽤 수입이 짭짤하지? 생각해보니까 우리도 염가처럼 장물이나 취급할걸 그랬어.”
“에이, 그렇지만 한 곳에 머물러있어야 하잖아. 난 역마살이 끼여서 적성에 안 맞아.”
“그건 그래. 둘째 형님에겐 확실히 무리야. 하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들은 장물점 앞에서 지키고 있는 사내에게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가서 염가에게 송씨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전해.”
송씨 형제라는 소리에 흠칫 놀란 사내는 다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염문이 재빠르게 달려나왔다.
“아이고, 형님들 아니십니까! 이게 대체 몇 년 만입니까?”
송씨 형제들 중 제일 덩치 좋은 사내가 손가락을 펴들어 셈을 했다.
“에…, 그러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옆에 있던 사내가 그것을 보고 뚱하니 물었다.
“셋째야, 지금 뭘 가지고 셈을 하기에 횟수가 그렇게나 많이 올라가냐?”
셋째는 그것도 모르고 있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형님도 참. 지금 몇 달이 지났나 세고 있잖아요.”
사내는 대뜸 동생의 돌 머리를 후려쳤다.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우리가 이곳에 무슨 이유로 왔더냐!”
셋째는 맞은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말했다.
“헤헤, 그것도 모를까 봐요? 이곳을 떠난 지 3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돌아왔잖아요.”
사내의 안색이 약간 펴졌다.
“용케도 기억에 남아있구나. 그렇다면 손가락 몇 개가 올라가야 하지?”
셋째는 첫째 형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펴들었다.
“그러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퍽퍽퍽퍽!’
“끄에에엑!”
무자비하게 쥐어 패버린 첫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염문을 향해 활짝 웃었다.
“하하하, 배가 고프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
잠시 당황하던 염문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굽실거렸다.
“식전이셨군요. 그렇다면 이런 누추한 곳에서 식사를 하실 것이 아니라 바로 건너편에 있는 주점으로 가시는 것이……. 헤헤.”
첫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낮게 웃었다.
“큭큭, 자네가 융숭한 대접을 해준다 하니 가지 않을 수야 없지.”
염문이 살펴보자 나머지 동생들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
‘송근일(淞近日), 송근단(淞近旦), 송근우(淞近憂), 송근반(淞近泮). 3년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저 송씨 형제 놈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 이곳에 다시 왔단 말인가. 으으, 그동안 이곳을 내 터전으로 잘 닦아 놓았건만…….’
그들을 안내하며 가슴을 졸이던 염문은 자연스레 물었다.
“그런데 형님들은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셋째인 송근우는 얻어맞은 얼굴을 감싸 쥐고 있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지. 그때 아주 큰 건을 잡아서 그것을 처분하느라 잠시 이곳을 떠났던 것일세.”
“큰 건이라니요?”
송근일이 동생이 말하려는 찰나 앞으로 나섰다.
“별것 아닐세. 그리고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하하하!”
자신의 속내가 단번에 들켜버리자 염문의 등줄기가 절로 서늘해졌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그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아? 바로 저기입니다. 들어가시지요.”
말없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던 송씨 형제들은 무엇을 보았는지 주춤거렸다. 염문이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주루의 점소이에게 쫓겨 나오는 분공이 보였다.
“글쎄, 내가 먹을 게 아니라니까요!”
“이 꼬마 돌중아! 네놈 말을 어떻게 믿고 고기를 줘? 잔말 말고 썩 꺼져!”
“에이 씨, 나가면 굶는 거 아냐! 퉤, 망해버려라!”
“뭐, 뭐야? 내 이놈의 자식을!”
화가 난 점소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재빠른 분공은 저 멀리 도망간 뒤였다. 그것을 지켜본 넷째 송근반이 차가운 눈빛을 발했다.
“중? 설마…….”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염문이 물었다.
“왜들 그러십니까? 방금 그 꼬마 놈과 아는 사이십니까?”
송근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런데 아까 그 꼬마 중은 오가사의 중인가?”
“중이라…. 푸하하, 사이비 중도 중은 중이지요.”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 웃어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 꼬마 놈은 몇 개월 전 오가사에 굴러들어온 아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이비 중이라고 한 거지?”
“그건 말이죠. 한 3년 전쯤에 그곳의 스님들이 의문사를 당하고 난 뒤, 자기네가 오가사의 중들이라며 나타난 사이비 노승들 때문입니다. 그 노승들 밑으로 들어왔으니 방금 그 꼬마도 당연히 사이비 중인 것이죠.”
“그렇군…….”
중얼거리는 송근일의 시선은 오가사를 향하고 있었다.
“끄윽, 그래도 손님 대접을 해줄 줄은 아는군. 중치고는 생각이 트여 있어.”
땡땡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상체를 노곤히 젖힌 중소구는 식사가 마음에 든 듯 한결 풀어진 모습으로 분공을 대했다. 분공은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이번 식사는 다른 스님들에게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분들께서 아신다면 큰일이기 때문에…….”
“아아, 걱정 말게나. 본 대인은 입이 무거우니까.”
말 하나 안 하나 결과는 그게 그거였지만 분공은 일단 중소구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그럼 전 볼일이 있어 나가겠습니다.”
도연은 분공을 뒤따라 일어섰다.
“법당에 잠시 예불을 드려도 괜찮겠는지요.”
“물론입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도연은 중소구에게 물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중소구는 그 무슨 소리냐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본 대인은 됐네. 아마도 따라간다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게야.”
중소구의 거부로 분공과 함께 밖으로 나온 도연은 동자승이 자꾸만 자신의 옆모습을 훔쳐보는 것 같자 그 이유를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분공은 차분하게 합장을 하고 난 뒤에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시주께서 세속에 머물며 어떠한 일들을 하시고 계신지 궁금한데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도연은 어리기만 한 동자승이 아직 세상의 일들을 잊지 못해 자신에게서 그 향수병을 달래고자 물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도연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대체적으로 무엇이 궁금한 것입니까.”
됐다 생각한 분공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다소 어려워하는 듯한 연기를 펼쳤다.
“으음…, 어디에서 생활하시며 그 생활이 또 어떠한지 그러한 것들이 궁금합니다만…….”
상대가 주군의 또래여서 푸근한 마음이 들어버린 도연은 짧게나마 근간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중요한 부분들은 빼고서 말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분공은 짐짓 감탄하는 척했다.
“아아, 그래서 도련님이라는 분의 명령을 수행한 뒤 돌아가시는 길인데 마침 오가사가 눈에 띄어 잠시 들르셨던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한데, 또 궁금하신 것이 있습니까?”
분공은 그제야 이곳을 찾아온 도연의 진정한 목적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도연의 세세한 부분까지는 읽어낼 수가 없었다. 분공의 목적도 어차피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제쳐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앞으로 가시는 길에 편안한 여정이 되시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분공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품속을 뒤지던 도연은 금 3냥을 건네주었다. 엄청난 거금에 한순간 받았던 것을 놓칠 뻔한 분공은 더없이 커진 눈으로 도연을 쳐다보았다.
“이, 이렇게나 많이 주시면!”
도연은 되돌려 받지 않겠다는 듯 자연스레 등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 정도면 모든 스님들이 당분간은 불도에 전념할 수 있을 겁니다.”
분공은 내심 생각했다.
‘부처님의 가호라고 떠들긴 하겠죠.’
현 시점에서 되돌려줄 수 없음을 인지한 분공은 도연에게 연신 불호를 외워준 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소중히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