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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35화


동천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들을 보고 놀라하자 녹색의 동천이 짜증스런 어투로 말했다.

“야, 귀(鬼)! 까불지 말고 얼른 그 자리를 양보해!”

녹색 동천은 동천에게 귀라고 했다. 동천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귀(鬼)? 어째서 나를 귀라고 하는 거지? 그리고 양보하라니. 그러는 너는 누구지?”

녹색 동천은 말했다.

“에이, 씹새끼. 좋은 말할 때 물러날 것이지. 꼭 이 몸께서 실력행사를 해야만 하겠냐?”

당황해하는 동천에게 검은색 동천이 말해주었다.

“묻는 것이니 답변은 해주지. 얘는 만(萬)이고 나는 역(逆)이다. 그리고 우리는 네가 차지하고있는 그 자리를 얻고싶을 따름이다. 자아, 이제 물러나 주실까?”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자리를 차지하고…, 엇? 언제 이곳이 기름진 대지로 변했지?”

역의 이야기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척박한 땅위에 오직 동천이 서있는 자리만이 기름진 토양이었다. 만은 사나운 얼굴로 다가들었다.

“깜둥이의 말은 새겨듣지마. 흐흐, 저놈은 네 상대도 안되니까. 오직 이 몸께서만 너를 누를 수 있지. 그러니까 포기하고 순순히 양보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긴 내 자리였다고.”

만의 기세에 동천은 주춤 물러서려 했다.

“나, 난 도무지.”

한발 더 다가들려던 만은 갑자기 흠칫한 얼굴을 하더니 뒤쪽을 보았다.

“쳇, 시간이 다 됐군. 운 좋을 줄 알아라.”

그리곤 사라졌다. 아직 자리에 남아 동천을 응시하던 역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또 보자.”

그도 사라져버렸다.

“이, 이봐! 너희들은, 도대체 너희들은…….”

동천도 꿈속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바탕 꿈이 무색할 정도로 전신은 평안한 상태였다. 일어나려던 그는 허벅지 아래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것을 빼들었다.

“허리띠? 그, 그럼.”

핏물을 머금은 허리띠였다. 허벅지의 한 부분을 만져보자 아물어있긴 했어도 그 당시의 느낌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 지금의 그 꿈은 몸 속의 내공들이 충돌할 때 꾸게된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귀(鬼)였던 나는 본래의 귀의흡수신공이있고, 만(萬)은 만독혼원공(萬毒混元攻), 역(逆)은 역심무극결이었단 소리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동천은 한가지 가정을 세워보았다.

“그 당시에 본래의 귀의흡수신공으로 황룡신단을 다 흡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정도 커져버린 귀의흡수신공이 독공을 함유한 귀의흡수신공과 충돌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운석은 그것을 알고 흡수를 해준 것일 수도……. 만약, 나의 가설이 맞다면 이 녀석의 정체는 도대체 뭐지?”

그는 운석이 들어있는 부분을 만지작거리다 잠금 쇠를 해체했다. 그런 뒤, 자갈과도 같은 모양의 운석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는 검지로 톡톡 건드려보았다.

“이봐, 친구. 넌 어떠한 존재인가.”

당연히 대답할 리가 없었다.

“훗, 알았어. 너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앞으로도 잘 부탁해.”

다시 원상태로 만들어 허리띠를 찬 동천은 여기가 어딜까 생각했다.

“…….”

제갈연(諸葛淵)은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 식물 쪽을 선호한다. 더욱 파고들자면 난초를 기르는 낙에 산다. 그녀의 방안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난초들로 일색이다. 심지어는 그것도 모자라 1년 전 앞마당의 정원을 난초들의 물결로 만들었다. 지금의 그녀는 담 너머 대로(大路)에도 난초를 깔아놓고자 하는 원대한 계획까지 세우고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장래에 네 꿈이 무엇이냐.’ 라고 묻자 그녀는 수줍어하며 화선지에 붓을 놀렸다고 한다.

난초천하(蘭草天下)!

그때의 화선지는 액자로 만들어져 그녀의 방안에 고이 걸려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실로 그녀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뜻이니……. 그녀의 나이 12살. 현 가주가 애지중지하는 손녀. 그녀는 난초를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오늘은 어디에서 채집을 할까?”

서글서글한 눈매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그녀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얼굴을 어여쁘게 요리조리 움직였다. 곧이어 그녀는 결심한 듯 고개를 야무지게 끄덕였다.

“그래, 한림서원의 부근에는 내가 지나친 난초가 있을 게 분명해.”

그녀의 시녀가 물었다.

“아가씨 같이 가드릴까요?”

“아니 됐어. 오랜만에 혼자서 가볼래. 랄라라.”

난초소녀는 절로 신이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채집도구를 팔목에 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가녀린 소녀의 몸으로 가기에는 제법 멀 수도 있는 거리였지만 난초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삼각(45분)여를 걸어 마침내 그녀는 당도할 수 있었고, 해냈다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후훗, 어쩐 일인지 노사님께서는 몇 개월 전부터 출입을 금했지만 안쪽이 아닌 바깥부분이라면 상관없겠지?”

난초와 함께 살아온 그녀는 그 예리한 안목과 관찰로서 먹이를 찾아 거친 들판을 헤치고 다니는 한 마리의 요정(?)과도 같은 몸놀림으로 주위를 살펴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예리한 안목과 관찰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 효력을 잃어갔다.

“어휴, 본녀의 체면에 고작 하나라니. 좀더 찾을까, 아니면 그냥 갈까?”

망설임에 망설임을 거듭하던 난초소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짓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 서글서글한 눈동자를 번뜩였다.

“어마마마? 저것은 참으로 구하기도 힘들다는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잖아? 아아, 이렇게 기쁠 수가! 이런 곳에서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를 발견하다니……. 헉헉.”

숨이 차긴 하나보다. 여하튼 환호하는 마음으로 모종삽을 들고 달려간 난초소녀는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의 주변 흙을 조심스레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비꽃……, 줄여서 제비꽃난초의 주변을 거의 다 파내던 그녀는 중간에 그것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아, 너무도 아름다워. 도자기나 서화가 아무리 매혹적이라 한들 어찌 자연의 일부분에 비견되랴. 이렇게 보고있자니…….”

그때 갑자기 수풀에서 튀어나온 발이 난초소녀의 바로 앞부분을 디뎠다.

콰직!

그 발의 주인공은 자신이 밟은 것에 상관없이 그녀를 발견한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우와, 드디어 사람을 만나게되었구나.”

난초소녀는 황홀한 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고있자니…….”

“예?”

그녀의 고개가 약간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보고있자니…….”

“하하, 저요?”

난초소녀의 의식세계는 동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바로 앞에서 터진 비명에 동천은 귀를 틀어막고 고통스러워했다.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제갈연은 원망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당신이 무엇을 밟았는지 아나요? 그게 얼마나 희소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기나 하나요? 그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가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알기나 하냐는 말이에요!”

그녀의 발악 아닌 발악에 동천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했다.

“예? 제비꽃푸르딩딩하늘나라 뭐요?”

“답답하긴!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라니까요!”

“아아, 제비꽃푸른줄나비하늘하늘물소와폭포수난초요?”

난초소녀는 붉어지다 못해 익어버릴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아니에요!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라고요! 헉헉.”

“에에…, 제비꽃푸른줄무늬가하늘하늘, 뭐요?”

“아악!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 헉헉,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 이 빌어먹을,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라고!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란말야! 제, 제비꽃……, 꼬로록!”

제 성에 못 이겨 소리치던 난초소녀는 산소결핍으로 인해 쓰러지려했다. 동천은 깜짝 놀라 재빨리 그녀를 안아들었다.

“이봐요, 정신차려요! 당신이 여기에서 쓰러지면 길은 누가 안내해요!”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제, 제비꽃푸른주울……. 으음.”

이 여자도 끈질긴 여자였다.

제갈연은 눈을 뜨자 너른 한 벌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놀랍게도 온통 난초천지였다. 너무도 행복하여 마음놓고 난초벌판을 달리던 그녀는 돌연 기쁨에 탄성을 질렀다.

“아?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야, 너 무사했구나?”

그녀는 제비꽃난초를 부여잡고 그녀의 보드라운 볼에 부비부비했다.

“아아, 정말 다행이야. 흑흑, 그 멍청한 사내에게 밟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슬퍼했다고. 글쎄, 니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우는 거 있지? 그러니 멍청하지 않고 뭐겠니?”

그 상황에서 단번에 외우는 인간이 이상한 거였다. 여하튼 그녀는, 벌판에 누워 제비꽃난초와 도란도란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며 제비꽃난초가 하늘거렸다. 그녀는 그것이 제비꽃난초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난초소녀가 그렇다고 생각하니 그렇다고 이해해주자.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 우리 세가의 근처에는 이런 곳이 없는데 말야. 넌 알고있니?”

궁금증에 못 이겨 제비꽃난초에게 물어본 난초소녀는 대답을 안 해도 제비꽃난초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꺄야!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고 청초하고 사랑스러워!”

평소엔 침착하고 명문세가의 자녀답게 기품이 서려있는 그녀였지만 희귀한 난초만 보면 지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 향긋한 내음. 어쩌면 이리도 향기로울까? 아아, 이 땀 냄새. 땀…….”

난초소녀는 잠시 생각했다. 왜 갑자기 땀 냄새라고 생각했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자 그녀의 몸이 서서히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왜 나의 몸이 흔들릴까? 주저하던 그녀는 눈을 떴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으음, 여기는…….”

여전히 그녀의 몸이 흔들리는 가운데 앞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아? 깨어나셨군요? 내려드릴까요?”

‘내려주다니 무슨……. 아앗, 내가 업혀있구나!’

제갈연은 자신이 업혀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 어서 내려주세요.”

그녀의 뜻대로 해준 동천은 머쓱한 표정을 짓다 무언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난초소녀는 창피한 듯 붉어진 동천의 얼굴과 내밀어진 나무뿌리 같은 것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뭐죠?”

동천은 우물쭈물 말했다.

“처, 천마(天麻)라는 약초입니다. 제가 실수로 밟아버린 그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의 뿌리와 같은 약효를 나타내죠. 아, 아마도 풍(風)에 관련된 질환을 치료하시기 위해 찾고 계신 것 같은데 그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보다는 한참 떨어지지만 대, 대용으로서는 모자라지 않을 겁니다.”

“…….”

잠시 멍한 눈으로 동천을 쳐다보던 그녀는 돌연 까르르 웃어댔다.

“호호, 뭔가 착각을…, 호호호!”

“예?”

그녀는 배를 부여잡다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풋, 고맙게 받겠어요.”

그제야 동천도 이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주저하며 물었다.

“저어, 제가 뭘 오해했나보죠? 전 약초를 찾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제갈연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이것 봐요. 당신의 말이 맞다니까요?”

“예에.”

동천은 그녀의 미모에 홀려 절로 침을 삼켰다. 그사이 어둑어둑한 저녁에 익숙해진 그녀는 눈도 평범하고 코도 평범하고 입도 평범하고 얼굴의 윤곽선까지 평범한 동천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니, 평범하지 않은 것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칭찬하려다 그만두었다. 머릿결에 관해 칭찬하면 남자에게 실례이기 때문이다.

“못 보던 분인데 어디에서 오신 누구시죠?”

동천은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한 노사님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있는 동철이라고 합니다.”

제갈연은 깜짝 놀랐다.

“어머? 그럼 요새 아무도 한림서원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다 동 공자님 때문인가요?”

동천은 수줍어하며 말했다.

“그, 글쎄요. 제가 가르침을 받을 때 아무도 찾아오지 않긴 했지만 소저의 이야기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자 번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참, 제 소개를 안 했군요? 후훗, 전 제갈연이라 해요.”

동천은 ‘알고있습니다.’ 라는 말을 꾸욱 참았다. 그 옛날, 황룡세가에 찾아왔던 그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있는 것이다. 무슨 딴마음을 품어서 기억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황룡미미와 미모를 비교했을 때 각인이 되어있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아아, 그러셨군요.”

제갈연은 자신의 신분을 알고도 상대가 놀라하지 않자 ‘과연, 한 노사님이 가르치는 공자로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범한 용모의 소년이 한순간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한데, 우리 어디서 본적이 없나요? 난 어디선가 마주친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뜨끔한 동천은 넉살좋게 받아들였다.

“하하, 제가 꿈속의 연인이라면 생각이 나시겠죠.”

참으로 짓궂은 동시에 제갈연을 난처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그녀가 동천을 알아보게 되면 그가 그녀의 꿈속의 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난초소녀였다.

“무, 무례하군요. 나는 가겠어요.”

동천은 그녀의 등뒤에서 다급히 불렀다.

“저, 저기요!”

그녀는 팩 돌아섰다.

“또 뭐죠?”

그녀의 기세가 어찌나 날카롭던지 절로 위축되는 동천이었다.

“기, 길을 좀…….”

“네?”

동천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제가 방향 치라서요.”

제갈연은 동천을 유심히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절한지 적어도 반 시진. 이곳은 한림서원의 외곽. 다섯 살 짜리 어린애도 방향만 잘 잡으면 빠져 나올 수 있는 이곳을 이제껏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것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 싶구나. 말로만 듣던 방향 치가 정말로 있었다니…….’

그녀는 금새 화를 풀었다. 아울러 신기한 물건 보듯 동천을 바라보았다.

“호호, 대하면 대할수록 정말 특이한 공자로군요?”

놀리는 것 같진 않자 동천은 머쓱한 표정으로 때웠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흐음, 손님이라면 정운각(靜雲閣)이 분명하니 본녀가 특별히 안내해주겠어요. 따라와요.”

감사의 인사를 하고 뒤따라가던 동천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제갈연은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거기에 뭐가 있나요?”

“잠깐만 요.”

동천은 제갈연에게 양해를 구하고 청각을 극대화시켰다. 확실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기뻐하며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

동천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퍼져나갔다. 그러자 상대방도 들었는지 반응이 왔다.

“거기 누구요! 혼자요?”

부진한의 목소리였다.

“진한님! 접니다! 여기 제갈 소저도 함께 계십니다!”

“앗? 자, 잠깐만 기다리시게!”

잠시 후 부진한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들 중 제갈연 또래의 소년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두 명이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에 놓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헌데, 옆에 있는 이자가 아가씨께 무슨 못된 짓은 하지 않았습니까?”

“호영(虎永)이의 말이 맞습니다! 저놈이 무슨 무례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요?”

두 소년이 돌연 동천을 향해 질투의 눈길을 보내자 동천은 급히 자신을 변호했다.

“그, 그럴 리가요. 잠시 기절을 하셔서 업어주기는 했지만 전 절대로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왜 그런 눈빛을…, 전 정말 당당합니다.”

동천의 이야기는 질투에 화신인 그들에게 이렇게 들렸다.

“흐흐, 이 몸께서 무슨 짓을 했는지 잠깐 말해줄까? 그게 말야, 고것이 생각보다 이쁘더군. 큭큭, 그래서 잠시 기절을 시킨 후 이 몸께서 슬쩍 맛 좀 봤지. 어땠냐고? 환상적이더군. 크하하하!”

요 정도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네, 네놈이 감히!”

“우워어어! 죽여버리겠다!”

그들이 너무 안하무인이자 제갈연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싸늘함을 내비쳤다.

“지금 무슨 짓들이지요? 제갈세가는 손님 앞에서 무례를 보인 적이 없어요!”

찔끔한 그들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폭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제갈연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고 명했다.

“본녀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저 공자에게 사과하세요.”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시선을 교환한 후 동천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하오. 방금 전의 행동은 생각이 짧았소(찢어 죽일 놈! 다음에 다시 만나면 반드시 뼈도 못 추리게 해줄 테다!).”

“나도 그렇소(말 그대로다!).”

동천은 별 의심 없이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해해주셨다니 저로서는 안심이 되는군요.”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는 듯 하자 눈치 빠른 부진한이 나섰다.

“자네들은 아가씨를 모시고 먼저 가시게. 나는 동 공자를 맡겠네.”

그들은 금새 희색이 만면해졌다.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부 당주님. 아가씨, 어서 가시죠. 저희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성격을 알고있었던 제갈연은 동천에게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조용히 사라졌다. 동천과 단둘이 남게된 부진한은 이마의 땀을 쓸어 내렸다.

“후우, 자네는 어쩌자고 저들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

“그런 말이라니요?”

“아가씨가 기절했느니 업어줬다느니 그런 말 말일세.”

동천은 모르겠다는 눈으로 물었다.

“그게 뭐 잘못된 점이라도 있나요? 전 사실이 그러해서 있는 그대로 말해준 것뿐인데.”

부진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이제 보니 눈치가 꽝이군. 남녀사이가 불문한데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면 곧이곧대로 새겨들을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더군다나 듣는 자들이 질투에 눈이 먼 자들인데.”

“질투요?”

“그래, 자칭 아가씨의 친위대들이라고 할 수 있지. 뭐,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아가씨의 일이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 녀석들이니 자네는 잠시 몸을 사려야할 걸세. 숫자도 만만치 않고 배경도 만만치 않으니까. 아마, 본 세가에서 아가씨 또래의 사내놈들이라면 거의 다 친위대라고 보면 될걸? 쯧쯧,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으면 될 것을……. 됐네, 그렇게만 알고 가보세. 문정이도 자네를 찾는 것 같았으니.”

“알겠습니다.”

동천은 부진한을 따라가며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머리 속이 복잡했던 그는 자신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겨운 자들을(자칭 친위대들) 떼어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제갈연은 걱정했다는 시녀를 달래준 뒤 새로운 화분은 준비시켰다. 시녀는 알겠다는 듯 그녀의 명에 따랐다.

“아가씨, 여기 대령했어요.”

“그래? 이리 줘봐. 랄라.”

시녀는 아가씨가 처음 보는 것을 화분에 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가씨. 그건 난초가 아닌 것 같은데요?”

난초소녀는 씽긋 웃었다.

“물론이야.”

시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풀뿌리 같은 것을…….”

“글쎄, 왜일까? 호호호!”

제갈연은 난초를 인식한지 생전 처음으로 다른 것을 자신의 방에 들여놓았다. 그것도 방안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말이다.

오묘한 것이 여인의 마음이라 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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