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36화
그의 변신은 무죄 2.
“그래, 네 독공이 차지하는 비율을 알아 왔느냐.”
“예, 노사님. 독공이 함유된 귀의흡수신공이 7할이고, 본래의 귀의흡수신공이 2할, 나머지 역심무극결이 1할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환원되지 않은 독공이 1갑자 정도가 됩니다.”
한 노사는 동천의 대답을 평해주었다.
“화려하구나.”
동천이 바로 간청했다.
“가르침을 바랍니다.”
일주일동안 내공의 운용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게 애쓰느라 다소 수척해진 얼굴을 한 동천은 그리 밝지 않은 표정으로 한 노사를 바라봤다. 한 노사도 쉬는 내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던 듯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네가 어떠한 무공을 접하게되든 지금 배우고있는 것만큼 강력한 무공은 익힐 수 없을 것이다. 천우신조라면 모를까. 하지만 치우도법은 반드시 역심무극결을 바탕으로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있게 만들어져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다른 내공들은 싸그리 버리던지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한 가지만 더 살리거라. 비율을 같게만 키운다면 위험하긴 하지만 두 가지쯤은 문제가 없을 게야. 아마도 나머지 하나는 독공 쪽으로 키워야겠지. 또한, 네가 지금껏 키워왔던 본래의 귀의신공은 없애버리는 쪽이 아닌 역심무극결로 환원해 바꾸는 쪽으로 하거라. 어렵긴 하겠지만 사장(死藏)시킨 줄 알고 마음놓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으음, 본 노사가 비율을 같게 두 가지를 익히라고 권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몸소 경험해보지 못한 탓에 확신할 순 없지만 만일 독공과의 비율이 같아졌을 때 내부에 큰 충격을 받는다면 그것들은 네 통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그 충격이 네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거나 원치 않은 외부의 충격으로 이루어진 것인가를 떠나서, 너에게 확실한 위험요소이긴 하지만 만일 그때 네가 그것들을 통합하면 이론적으로 넌 환골탈태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되면 반쪽들이던 내공들을 완전무결한 독공과 역심무극결로 뒤바꿔가며 쓸 수 있지. 그러나 그 전까지는 비율이 반반이라 네가 사용할 수 있는 전 내공은 어찌됐든 절반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즉, 네게 1갑자의 내공이 있다 치면 무엇을 사용해도 반 갑자 이상은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해하겠느냐?”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울러 못내 아쉬움에 남았던 환골탈태가 거론되자 알 수 없는 전율에 온몸을 떨었다.
“노사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돌연 한 노사가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말이다.”
“예, 노사님.”
한 노사의 눈동자가 동천의 어깨너머로 고정되었다.
“네 뒤쪽에서 서성이는 저 계집은 어찌된 연유냐.”
“예?”
동천이 돌아보니 멀리서 자신 쪽을 훔쳐보던 제갈연이 황급히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감지력의 밖이라 동천은 감지하지 못했지만 눈으로 보는 한 노사에겐 확연히 보였던 것이다. 동천은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 그게 제갈연 소저로 보입니다.”
“본 늙은이도 알고 있다. 문제는 왜 이곳을 서성이며 우리 쪽을 보고있냐는 것이다.”
한 노사의 전신에서 무언의 압박감이 풍겼다. 마치 ‘알고있으면 불어.’ 하는 것만 같았다. 한 노사가 자세한 연유를 모르는 것 같자 동천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저어…, 제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까요?”
한 노사는 방문턱에 걸터앉아 귀찮아하는 얼굴로 허락했다.
“알아보던지 말던지 방해만 되지 않게 보내거라.”
“예, 알겠습니다.”
제갈연이 숨은 곳으로 뛰어간 동천은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채집도구를 들고있는 난초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둘 다 동시에 알아보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갈연이었다.
“아? 또 보게되네요. 전 이 근처에 난초를 채집하러 왔답니다.”
어딘가 하는 짓이 어설펐지만 순진해지다 못해 멍청해진 것만 같은 동천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하하, 그렇습니까?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예? 그, 그게요. 그러니까…, 호호, 채집하러 방금 왔어요. 아쉽게도 아직은 없답니다.”
동천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그래요? 뭐, 하는 수 없지요. 나중에 운이 닿으면 그때 보기로 하죠.”
물러날 기세를 보이자 제갈연이 급히 그를 불렀다.
“잠깐만요.”
“하실 말씀이라도.”
제갈연은 우물쭈물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 제가 채집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동천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이었던 듯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싫지만은 않은 듯 싶었다.
“그, 그래도 될까요?”
거절당하면 어쩔까 내심 걱정했던 제갈연은 몰래 한숨을 내쉰 뒤 밝은 얼굴로 말했다.
“물론이지요. 본 세가에서 유일하게 이곳 한림서원만이 자연 그대로 방치해둔 곳이기 때문에 찾기 쉬워서 금방 이예요. 호호, 따라와요.”
“그럼 소저만 믿고 동행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갈연은 새하얀 팔뚝을 걷어 부치고 힘있게 자신했다.
“알아요. 방향 치라 이거죠? 염려 붙들어매라고요.”
동천은 그녀의 새하얀 팔뚝에 눈이 돌아감을 느꼈다.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하하, 족집게 시네요. 하하하!”
성격이 변한 탓인지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린 동천이었다. 그러나 그 나이 또래만큼은 행동하는 것이어서 예전의 동천이 너무 영악했던 것이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난초소녀를 따라간 동천은 그녀와 함께 몇몇 난초들을 발견하곤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따라다녔다. 이제 그들은 난초채집이 아닌 대화를 나누는 재미로 붙어 다녔다.
“저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못 찾겠는데 제갈 소저는 귀신이라도 들린 듯 찾아내시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제갈연은 귀신이라는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귀, 귀신이라뇨.”
동천이 잠깐 멈춰 섰다.
“어? 귀신을 무서워합니까?”
제갈연은 약간 화난 듯 고운 아미를 모으며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 당연하지요. 여인들은 대게…, 아니 거의 다…, 아니 다! 다 무서워한다고요. 그러니 당연히 저도 무섭고요.”
동천은 갑자기 사정화가 떠올랐다.
“아가씨도 무서워 할까나? 흐음…….”
동천이 지칭한 아가씨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난초소녀는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가씨? 동 공자에게 아가씨가 있었나요? 그 아가씨가 누구죠?”
나긋나긋하고 봄바람 같았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매서운 칼바람이 불자 무서워진 동천은 주춤 물어나며 말했다.
“제, 제가 모시고있는 아가씨를 말하는 겁니다.”
“둘이 무슨 관계죠?”
“무슨 관계라뇨. 그분은 단지 모시는 분일 뿐인데.”
“정말이지요?”
“예, 정말입니다.”
다시 봄바람이 불었다.
“호호, 우리 점심이나 먹을까요?”
동천은 어느새 촉촉해진 이마를 쓸어 내리곤 한시름 놓았다.
“말씀을 들으니 서서히 배가 고파지기는 한데 어딜 가서 먹지요?”
제갈연은 입안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기대하시라. 쨔~잔. 바로 이 채집망 속에 준비해놓았지요.”
동천은 난초소녀가 난초대신 도시락을 꺼내는 것을 보고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죠? 과연 ‘저보다 어른이신 지라’ 생각하시는 것도 다르군요? 놀랐습니다.”
순간 주춤하는 도시락소녀였다.
“어, 어른이라뇨? 설마 소녀보다 나이가 어리시다는…….”
동천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모르셨어요? 전 올해로 10살입니다.”
“여, 열살…….”
제갈연의 눈빛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연하 남자와 사귀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동천이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그녀는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뇨. 체격을 봐서는 그 나이로 안 보여서요. 적어도 저와는 동갑인줄 알았어요.”
“하하,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상황의 요지를 전혀 읽지 못하고있는 동천이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돌연 풋 하고 웃었다.
“호호, 그래요. 공자의 말대로 그럴 수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밥이나 먹을까요?”
다시 도시락소녀가 된 그녀가 도시락의 뚜껑을 열자 동천은 본능적으로 침을 삼켰다.
“맛있겠군요.”
제갈연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많이 들어요. 제가 손수 만든 거니까.”
“아아, 그러셨군요. 냠얌.”
그녀는 동천의 반응이 무덤덤해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활기찬 얼굴로 젓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멀리, 아주 멀리에서 실망을 넘어 절망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총 3인이었다.
“크윽, 저놈이 감히 아가씨와 식사를!”
어제의 두 사내들 중 하나였다. 역시, 어제의 다른 하나가 바로 이어 말했다.
“저 개놈의 자식이 기어코 명을 재촉하는구나! 우리가 그토록 주의를 줬건만!”
그들이 분노하는 가운데 꼽사리를 끼고있던 새로운 사내가 말했다.
“…부럽다.”
그는 구타당했다.
“이 덜떨어진 놈!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냐?”
“그래! 공현(空晛)의 말이 무조건 맞다!”
“흑흑, 잘못했슈.”
맞고도 비는 것을 보니, 때린 이들보다 신분이 낮은 듯 했다. 곧 그에게 관심을 끊고 동천과 제갈연을 훔쳐보던 그들은 배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호영아, 배고프지 않냐?”
강호영(姜虎永)은 듬직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너도 그러냐?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간식거리나 들고 올 것을 그랬다.”
그러자 기회를 포착한 듯 구석에서 쪼그라져 있던 꼽사리 사내가 무언가 꺼내들었다. 커다란 나뭇잎으로 감싼 주먹밥 두 덩이였다.
“헤헤, 도련님들. 그럴 줄 알고 제가 준비했습니다. 드시지요.”
역시나 그들의 눈가에 고마움이 묻어 나왔다.
“오오! 너밖에 없다.”
“그래도 이럴 때 쓸 만은 하군.”
그들에게 주먹밥을 건네주려던 사내는 좀더 잘 보이려는 듯 직접 나뭇잎을 까주려 했다.
“제가 이 껍질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헤헤.”
강호영과 공현은 상전 기질이 농후한지라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신이 난 사내는 주먹밥에 달라붙은 나뭇잎을 신속하게 떼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 앞선 탓에 자꾸만 손가락이 엇나갔다. 점점 도련님들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사내는 억지로 웃으며 최후의 비기를 선보였다.
- 이름하야 ‘손바닥에 한 움큼 침 뱉어 골고루 펴 바르기.’ 였다.
“퉤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헤헤.”
“…….”
꼽사리 사내는 다시 구타를 당했다.
“응? 지금 어디서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던 동천이 묻자, 그에 비하면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제갈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전 아무소리도 못 들었는데 공자는 들렸나보죠?”
그녀가 못 들었다고 하자 동천은 관심을 끊었다. 제갈연은 먹고 난 도시락을 채집망 속에 갈무리하며 순수한 얼굴의 동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래, 두 살쯤이야!’
그녀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 하자, 그 동안 걸리는 것이 있었던 동천은 주저하며 털어놓았다.
“저기, 그 제비꽃푸른줄무늬하늘하늘세류요폭포수물결난초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 뜨끔한 것이 있었던 난초소녀는 허둥지둥 동천의 말을 막았다.
“돼, 됐어요. 소녀는 벌써 잊었는걸요.”
“정말이십니까? 와아, 역시 ‘저보다 어른이신 지라’ 아량 또한 넓으시군요? 사실, 그것의 명칭은 예전부터 알고있었는데 소저를 놀리려고 한 게 아니라 외울 당시 너무도 길어 제비꽃난초라고 외웠던 탓에 잠시 헷갈렸던 것뿐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 관해 사과를 드리려했는데 역시 ‘저보다 어른이신 지라’ 이해해주셨으니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관해서도 이해를 구하려던 연상소녀는 동천이 자꾸 거슬리는 소리를 해대자 그 말을 쏘옥 집어넣었다.
“동 공자. 으음…, 그러니까 다 좋은데 그 ‘저보다 어른이신 지라’ 하는 말은 빼고 말씀해주실 수 없나요?”
“아아, 그 말이 거슬리셨군요. 그럼, 이제부터는 ‘나이가 많으셔서’ 정도로 할까요?”
제갈연은 상대가 너무도 순진한 탓에 화를 낼 수도 없는 이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웃는 척했다.
“그게 아니라, 우리의 나이차이를 굳이 드러내야할 필요가 있겠냐는 물음이었어요. 호호.”
동천은 간만에 그녀가 원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 때문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돌연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친구 할래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지…….”
“왜 있잖아요. 사내들끼리 마음만 맞으면 한두 살 차이는 말 트고 친구가 될 수 있다고요. 그러니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어때요?”
너무도 황당한 제의에 제갈연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관에서 최대의 고비가 찾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남녀사이에 말을 튼다는 것은 천만 분의 일조차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 그것은…….”
‘너무 황당해요!’ 라는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동천이 웃으며 말했다.
“아아, 알았다. 쑥스러워서 그러죠? 그럼 제가 먼저 말을 놀게요. 험! 연아, 제갈연. 하하하!”
“호, 호호….”
분위기 상 그녀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동천이 먼저 말을 놓았다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저기. 동, 동……. 후우, 아무래도 전 안되겠어요.”
시무룩해진 동천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미안한 듯한 눈빛을 보냈다.
“죄송해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제가 너무했네요. 대신, 마음만은 친구로 하는 건 어때요?”
“어머,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낭만적이기도 하고요.”
동천은 ‘이게 왜 낭만적일까?’ 하고 생각하다 포기하고 말했다.
“낭만적 까지는 모르겠지만 소저께서 승낙을 하시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그럼 이제 우리는 친구죠?”
“그래요. 마음만의 친구. 호호호!”
“하하하!”
그들이 그렇게 웃고있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3인의 사나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부럽다.”
그러자 금새 눈알이 뒤집히는 나머지 사나이들. 말을 꺼낸 공현이 그들에게 말했다.
“야, 나야.”
니들이 감히 때리겠냐는 물음이었다.
“아?”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방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