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40화
안휘성에는 오련(五蓮) 중 대표적인 두 개의 세가(世家)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바로 황룡세가와 제갈세가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사태가 종종 벌어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결론은 ‘역시, 대단한 가문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라는 쪽으로 마무리되곤 하였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우는 시기도 오는 법. 언제부터인지 동등하게만 여겨졌던 칭송의 대상은 점차 황룡세가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22년 전, 신기 제갈여휘가 제갈세가에서 홀연히 사라졌을 때부터였다. 그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2년여가 흐르자 여론은 확실하게 황룡세가로 기울어졌고, 이에 두 세가는 무심한 척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 속내는 결코 그러하지만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특히, 제갈세가에서 말이다. 다시 2년이 흐르고 내심 초조해하던 제갈세가는 황룡세가에서 장자(長子)가 태어났다는 소문에 또다시 힘을 잃어야만 했다. 제갈세가에서는 아직 다음을 이어갈 재목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제갈세가는 아들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5년 뒤 옥동자를 생산하고야 말았다. 황룡세가에서는 2년 전에 벌써 연년생으로 세 아들을 낳아 기세 하늘에 치솟을 때였다.
이렇게되고 보니, 제갈세가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여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신히 아들을 낳긴 낳았는데 어떻게 하면 단번에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호사가들은 황룡세가의 삼 형제들을 가리켜 삼신룡(三神龍)이라 칭송하고있는 이 마당에 자기네는 고작 하나이니, 그럴싸한 이름을 짓지 않으면 그 세를 떨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즈음 이름 없는 첩지가 날아와 읽어보니 제갈일위(諸葛一位)라.
옳거니, 손뼉을 마주친 가주 제갈운은 아들의 이름을 일위라 짓고 주위에 널리 공표했다. 이름에 효과가 있었던지 무럭무럭 별 탈없이 자란 그의 아들은 십방서생(十方書生)이라는 걸출한 외호를 얻게되었고 그 명성은 차츰 황룡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십방서생(十方書生) 제갈일위(諸葛一位). 올해로 15세가 되는 제갈일위는 진(陣)과 무(武)는 기본이고 금(琴), 기(技), 예(禮), 서(書), 화(畵). 이렇게 추가로 다섯 가지의 절기를 지니고있어 남들은 그를 십방서생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여기에 한가지. 그 모든 것을 합쳐도 칠절(七絶)일 뿐인데 어찌하여 십방이라고 하는 것일까? 누군가 그 문제에 관해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하, 기왕이면 재주가 많게 보이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다. 제갈일위는 평소 예의를 알고, 윗사람을 잘 모셨으며, 아랫사람들에게도 평판이 좋았기에 이런 그의 대답은 하나의 재치로 들려 더욱 그를 빛나게 해주었다.
“첫째 도련님 안에 계시냐.”
문 앞에 서있던 두 소년들 중 하나가 묻자 대기하고있던 중년의 하인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연무장 시찰 중에 계십니다. 나가신 지 반 시진이 넘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돌아오실 겁니다.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서로 마주본 소년들은 어떻게 할까 고심하는 눈치들을 보였다. 그러던 중 약간 왜소해 보이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러도록 하지. 안내하게.”
“예, 공자님들.”
안쪽으로 그들을 안내한 하인은 감히 더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을 관장하는 시녀에게 그들을 인계했다. 제법 곱상하게 생긴 시녀는 차와 다과를 내놓고 밖으로 물러났다. 소년들은 둘만이 남게되자 편하게 의자에 기댔다.
“현아. 우리가 꼭 첫째 도련님에게 왔어야했냐?”
공현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강호영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호위나 다른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했어야 했다는 소리야? 체면이 있지.”
강호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야. 내 말은 우리들끼리 한꺼번에 덤비면 그딴 놈은 확 뭉개버릴 수 있을 거라는 거지. 그때는 내가 방심해서 한대 맞았을 뿐이라고.”
“넌 아직도 깨닫지 못했군. 그놈은 기절했다가 깨어나더니 완전히 다른 놈이 되었어. 그 냉철함과 치밀한 생각. 바로 앞에 있던 내가 아니라면 모르지.”
강호영은 버럭 화를 냈다.
“뭐가 냉철하고 뭐가 치밀하다는 거냐! 그따위로 얼굴 굳히는 것은 누구라도 다 한다!”
어제의 일이 떠오르는 듯 공현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려졌다.
“쳇, 하나 가르쳐줄까? 그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 왜인 줄 알아? 바로 내상을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시간을 좀 벌어야했지. 그러나 너무 누워만 있으면 의심하고 덤빌까봐, 일단은 일어나 탈골된 팔을 맞추는 척하며 조금 더 시간을 벌었어. 아울러 내게 도발적인 이야기를 하며 오히려 주춤하게 만드는 심리전까지 폈고.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단 한 수에 방심한 너를 쓰러트린 뒤, 보란 듯이 기세가 꺾인 우리에게 한발 물러섰어. 너무 궁지에 몰면 쥐라도 무는 법이거든.”
강호영은 자신 때문에 결과적으로 물러났다는 소리로 들리자 벌개진 얼굴을 차마 들 수가 없었다.
“미, 미안하다. 내가 방심만 안 했어도 너와 다른 애들이 기세가 꺾이지 않았을 텐데.”
공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할 것 없어. 내가 물러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강호영은 다소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 그럼 무엇 때문이지?”
“나는 그놈이 이만 끝내자고 했을 때, 방금 내가했던 말들을 깨닫게 되었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놈은 그때까지도 내상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소리야. 헌데, 그놈의 제자라는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어. 왜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느냐는 것 말야. 그렇게되고 보니, 구태여 도박을 할 수가 없었지. 만일 내상을 회복하지 못했어도 우리를 상대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면 덤벼봤자 손해가 아니겠어? 그래서 물러난 거야. 네 탓이 아니라고.”
“아아, 그렇구나. 내 탓이 아니라면 됐어! 하하하!”
공현은 강호영이 은연중 감탄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콧대를 세울 수 없었다. 시녀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공자님들, 첫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답니다.”
“아, 알았다!”
깜짝 놀란 그들은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언제 방안에 있었냐는 듯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는 척했다. 잠시 후, 빼어난 용모의 소년이 좌우로 시비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오오, 자네들 왔는가.”
그들은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예, 편안하셨는지요.”
“연무장 시찰은 잘 돌아보셨는지요.”
제갈일위는 어디에서 꺼냈는지 섭선을 활짝 펼치고 입가를 가리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럼그럼. 요즘 실력들이 어떠한가 잠시 돌아보고 왔다네.”
공현이 물었다.
“형편없지요?”
제갈일위는 그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말했다.
“형편없긴 다들 부쩍 실력이 늘어 보이던걸.”
“그게 아니라 첫째 도련님에 비하면 형편없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으응? 하하, 자네도 농담이 늘었구만.”
말은 그랬지만 싫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로 먼저 방안에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돌연 안색을 굳혔다. 그는 공현과 강호영을 번갈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먼저…, 들어갔었는가?”
대번에 창백해진 그들은 그제야 방안에 차와 다과가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현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내상을 조금 입어 앉을 곳이 필요했기에 그만…….”
제갈일위는 눈에 이채를 발했다.
“내상을 입었다고?”
공현은 옆에 있는 시녀에게 빨리 방안을 치우라고 눈짓을 준 뒤 입을 열었다.
“예예, 실은 아가씨를 넘보는 무례한 녀석이 있어 일대일로 싸웠는데 방심한 탓에 그만 약간의 내상을 입었습니다.”
제갈일위는 흥미 있는 얼굴을 했다.
“호오, 본 세가 내에 아직도 연아를 넘보는 녀석이 있었는가.”
그제야 제갈일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자 강호영이 재빨리 말했다.
“겁도 없는 녀석이죠. 몇 달 전에 손님으로 온 녀석인데 주제도 모르고 아가씨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섭선을 접어 이마를 가볍게 톡톡 건드리던 제갈일위는 시녀가 방안의 것들을 다 치우자 안으로 먼저 들어가 그들을 불렀다.
“자자, 이리로 들어와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게들. 거기 뭐 하느냐. 손님들께 차와 다과를 드리지 않고.”
시녀들이 대령한 차와 다과를 들며 공현의 이야기를 장시간에 걸쳐 듣게된 제갈일위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크게 웃고 난 뒤 말했다.
“그 녀석, 참으로 멍청하군. 조용히 물러났으면 될 것을 공연히 매를 벌다니 말야. 허면, 자네들의 말인즉 기절하고 깨어나 보니 성질이 달라져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뜻인가?”
무식한 강호영이 나섰다.
“그럴 리가요! 그런 놈이야 제 한 주먹감도 안됩니다.”
골치가 아파진 공현은 강호영의 말을 끊었다.
“호영이의 말처럼 대단한 놈은 아닙니다. 다만, 마지막에 저희들을 얕보는 것 같이 쳐다봐서 그것이 좀 걸릴 뿐이죠.”
제갈일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다면 응당 손을 더 봐줬어야 했겠지만 그녀석이 너무도 심하게 다쳐 자네가 봐주었던 게로군.”
“역시, 첫째 도련님이십니다. 한 눈에 알아보셨군요.”
제갈일위는 다시 섭선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하하, 그쯤이야 별것도 아니지. 하지만 차기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는 자네들을 얕봤다면 본 세가를 얕본 것이나 다름이 없는 법. 그녀석이 다 낫게 된다면 다시 한번 손을 봐주게나.”
공현은 기다렸다는 듯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게 말입니다. 좀…….”
“왜 그러는가?”
“실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벌인 이 마당에 아무리 다 낫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다시 한번 손을 쓴다는 것은 실로 명예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아무리 다른 명목으로 다시 손속을 겨룬다지만 상대가 얕본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 우리 쪽에선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닌가.”
공현이 맞장구를 쳤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차원에서 첫째 도련님께서 그 녀석의 버릇을 고쳐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예.”
제갈일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무슨 명목으로 손을 봐준단 말인가.”
“그야 어렵지 않죠. 근자에 아가씨를 넘본다는 소문이 들려 찾아왔다고 말씀하신 뒤 꼬투리를 잡아 혼내주시면 그녀석이 어쩌겠습니까.”
제갈일위는 구미가 당기는 듯 했지만 섣불리 나서려하지 않았다.
“그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겠군. 그러나 나까지 나설 필요가 있겠는가.”
공현의 의도를 그런 대로 파악하고있던 강호영은 간만에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저 어떤 놈인가 보시기만 하셔도 됩니다. 그놈이 첫째 도련님께 불경스런 태도를 보이면 그때 혼을 내주시겠다고 마음을 고치셔도 늦지 않으니까요.”
때마침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었던 제갈일위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장소는 자네가 잡게나. 아니, 내 직접 불러들이겠네.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공현은 내심 환호를 지르며 대답했다.
“아마도 한림서원에서 한 노사님의 가르침을 받고있을 겁니다.”
제갈일위는 짙은 눈썹을 역 팔자로 만들었다.
“뭣이? 그렇다면 그 동안 본 소가주를 꺼리신 이유가 고작 그런 놈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제갈일위가 화를 낼수록 공현과 강호영은 즐거울 뿐이었다.
“송구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제갈일위는 분기탱천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내 당장에 가겠네! 뒤따라들 오시게!”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예, 첫째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