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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47화


둘이 알아서 소개를 끝마치자 기다리고있던 도연이 나섰다.

“저는 도연이라 합니다. 도련님을 모시고있죠.”

장노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너처럼 심지가 굳은 아이가 우리 천아를…, 아니 철이를 보필하고 있다 하니 절로 마음이 놓이는구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도연은 어째 상대의 말투가 자신을 잘 알고있는 듯하여 의아했지만, 티내지 않고 바른가짐으로 대답했다.

“예, 어르신.”

고개를 끄덕인 장노삼은 동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철아, 이제 소개시켜줄 사람은 다 소개시켜준 것 같구나.”

동천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제가 아는 사람들을 전부다 소개시켜주자면 아직 멀었는데. 아마도 날밤을 꼬박 새워야 할걸요?”

장노삼은 짐짓 놀라는 척했다.

“네가 그 정도나 되느냐?”

동천은 씨익 웃었다.

“후후, 당연하죠. 저기 놀고먹는 인간들을 보면 몰라요? 저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요.”

중소구가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장노삼이 물었다.

“어허, 그럼 어찌하누?”

“어쩌긴 뭘 어째요. 할아버지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그만 끝내야지.”

장노삼은 동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즐거워했다.

“허허, 그거 고맙구나.”

“에헴! 이 정도쯤이야. 자, 이제 우리 먹을 거 먹으러가요.”

“그래그래. 먹는 것에 우리 천이가 빠지면 큰일나지.”

“할아버지, 이곳에서는 천이 아니라 철이라고 해야한다니까요?”

“어이쿠, 늙어서 그런지 또 까먹었구나. 알았다. 이제부터는 확실하게 철이라고 해주마. 그러면 됐지?”

“뭐, 그럭저럭. 헤헤헤!”

생각지도 못했던 장노삼, 장 할아버지를 만나게된 동천은 떨거지가 된 도연과 중소구를 이끌고 사람들이 즐기고있는 장소로 갔다. 그는 먹을 것에 있어 이례적으로 나누어먹는 모습을 보였다.

“나 하나, 할아버지 하나. 나 둘, 할아버지 하나. 나 셋, 할아버지 하나. 히히, 맛있다.”

중소구는 내심 ‘그럼, 그렇지’ 라고 코방귀를 뀐 뒤 동천에게 물었다.

“이놈아, 이분 어르신과는 무슨 관계냐?”

먹을 것을 입안에 쑤셔 넣다시피 하던 동천은 한참을 오물거린 뒤에야 중소구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장 할아버지요? 무슨 관계이긴 무슨 관계겠어요. 예전에 제가 살던 곳에서 아주아주 뜻이 맞고 친하게 지냈던 할아버지이지. 아마 친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도 우리만큼은 아니었을 걸요? 심심하면 산에도 같이 올라가서 자주 산나물을 캐먹었고, 서로들 심심하면 말동무도 해주었고, 그런 와중에 우리 어여쁜 미호(尾狐)도 만나게 되었고. 뭐, 그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는 것만 아시면 되요.”

중소구는 동천의 입에서 처음 듣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다시 물었다.

“미호? 미호가 누구냐?”

동천은 되려 중소구에게 되물었다.

“예? 미호라니요? 미호가 누구인데요?”

중소구는 이놈이 장난하나 했다.

“그걸 본 대인에게 물으면 어떻게 해! 네가 방금 어여쁜 미호도 만나게 되었고 라고, 말했잖아!”

“제가요?”

“그럼, 본 대인이 그렇게 말했겠느냐? 여기에 다 증인이 있는데도?”

동천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모두 똑똑히 들었다고 대답해주자 그의 입장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호라. 미호…. 그러고 보니까 어디서 들어본 듯 한 이름인데 내가 어디에서 들었더라? 아주 친근한…….”

동천은 반복학습을 시도하는 동물처럼 미호라는 이름을 반복하여 중얼거렸다. 그러자 도연이 반응을 보였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들어본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 어디에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들어봤던 느낌은 확실합니다.”

동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씨, 넌 느낌만으로 먹고 사냐? 니가 괜히 아는 척 나서가지고 더욱 헷갈리기만 하잖아!”

도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혼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중소구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참으로 버릇이 없는 놈이로다! 도 소형제는 다 네놈을 위해서 꺼낸 말이었거늘, 어찌 그따위로 응수할 수가 있느냐!”

동천은 전혀 위축됨 없이 반박했다.

“누가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아는 척하래요?”

“어허, 이놈이 그래도! 좋다, 그렇게 말하자면 처음 미호라는 말을 꺼낸 네놈도 충분히 잘못한 것이렷다?”

동천은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참 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 막말로. 내가 그런 말을 했던, 이 몸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다 내맴이고, 다 이 몸의 마음이잖아요. 안 그래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버린 중소구는 벌게 진 얼굴로 동천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그의 손바닥은 동천의 뺨에 닿을 수가 없었다. 장노삼이 그의 팔목을 쥐어 잡았던 것이다. 그는 장노삼을 노려보았다.

“이거 놓으시오. 안 놓겠소이까?”

장노삼은 좋게 해결하고자 웃는 얼굴로 중소구를 대했다.

“이보게. 고작 아이의 도발에 넘어가면 쓰겠는가. 또한 그렇다해도 말로써 타일러야 하거늘 손찌검이라니.”

“허, 이놈을 대화로써? 차라리 강아지를 설득하는 것이 더욱 쉽겠소이다. 그러니까, 이 손 빨리 놓아주시오. 서로들 얼굴 붉히는 일이 벌어지게 전에.”

“허허, 얼굴을 붉히는 일이야 나도 삼가고 싶다네. 하지만 이렇듯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린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자네가 양보하게.”

장노삼은 거절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얼굴을 구긴 중소구는 팔목을 비틀며 손을 빼냈다.

“어르신이 한 수를 지닌 분이라는 것을 알겠으나, 먼저 자초한 일이니 이 손이 무정타 마십시오!”

중소구는 위협을 가하는 수준으로 장노삼의 얼굴을 스쳐 때렸다. 말은 험악하게 했어도 진짜로 노인네를 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노삼은 그런 중소구의 손놀림을 예측한 듯 태연한 얼굴로 미동조차 않았다. 마치, 움직이면 손해라는 듯이 말이다. 놀림을 받은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치민 중소구는 정말로 안면을 후려쳤다. 장노삼은 이번에야 얼굴을 살짝 피했다.

“자네 너무하군. 늙은이를 정말로 치려했다니 말일세.”

중소구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어르신의 솜씨가 하도 고명하여 어쩔 수가 없었소이다! 그럼, 좀더 강도를 높여 볼까나?”

파팟! 스파팟!

중소구가 상당한 힘을 실었는지 권풍에 이어 옷소매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가만히 지켜보던 장노삼은 간발의 차이로 신형을 물린 뒤, 어느새 가슴께로 들어올린 왼손을 보이지 않는 존재를 밀어내듯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그러자 대번에 가슴이 답답해진 중소구는 재빨리 신형을 뒤집어 거리를 벌렸다. 그는 그런 후에야 창백해진 얼굴로 장노삼을 노려보았다. 돌연 그의 입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중소구는 뒤늦게 감히 경시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패할 때 패하더라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쯤에서 그만둘 수도 있다. 그러나 물어날 수 없는 이유는 사람들의 관심이 이미 이쪽으로 쏠려버렸기 때문이다. 나 중소구. 죽으면 죽었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피하게 물러서지는 않으리라.’

그는 내상을 다스리며 장노삼에게 소리쳤다.

“대단하시구려! 허나, 이번에는 진심으로 상대하겠소! 각오 단단히 해두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이다!”

중소구의 의지가 죽음도 불사를 것 같자,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장노삼은 중소구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자네 또한 대단하네. 이 늙은이의 일격을 피했으니 말일세. 그래서 하는 소리인데, 자고로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노름이란 돈을 걸어야 제 맛이지 않겠는가?”

중소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 그것이 어떻다는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이 비무의 승자를 놓고 한 가지 내기를 하자는 것일세.”

“내기?”

“그렇다네. 만일 자네가 이기면 언제든지 철아를 때려도 무방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 아이에게 위해를 가할 수가 없다는 내기일세. 어떤가. 하겠는가?”

흥미가 돌긴 했지만 불리하다고 생각한 중소구는 섣불리 수락하지 못했다. 그러자 장노삼이 짐짓 중소구를 도발했다.

“내키지 않으면 그만두어도 된다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증인이니, 이 늙은이가 이긴다해도 승낙하지도 않은 내기를 승낙했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

중소구는 도발인걸 알면서도 도저히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뭐요? 그 말은 본 대인이 질 것을 두려워하여 꼬리를 내린다는 뜻입니까? 여기에 모인 자들이 다 증인이니 승패의 결과를 떠나 ‘중소구는 비겁한 겁쟁이다.’ 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질 거라는 그런 뜻이냐는 말입니다! 으으, 좋소이다! 내 목숨을 걸고 그 내기를 받아드리리다!”

“좋네, 아주 화통하군. 마음에 들었어.”

중소구의 다짐이 끝나는 순간 여기저기에서 누가이기나 돈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기에 은근슬쩍 돈을 걸고 난 동천은 근심 어린 눈빛으로 중소구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전음을 보냈다.

『중 대인, 그만 두세요. 대인께서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분일 줄 몰라서 덤비시는 거라고요. 비록 할아버지가 일불삼수(一不三手)란 별호대로 하루에 세 번 이상은 손을 쓰지 않지만 그것은 그만큼 당해낼 자가 없다는 뜻이에요. 잘못하면 죽는 다니까요?』

동천의 간곡한 말림에 중소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루에 세 번 이상 손을 쓰지 않는다고? 그 말인 즉, 두 번만 잘 버텨내면 승리는 이 몸의 것이라는 이야기?’

꺼져가던 승리의 불씨를 되살린 중소구는 자신에 찬 얼굴로 장노삼에게 말했다.

“어르신, 본 대인은 다 알고 있으니 태연한 척해도 소용없소이다.”

장노삼은 무슨 소리인가 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방금 그 한 수로 내 무공의 근원을 알아냈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장노삼의 반응에 확신을 가지게된 중소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 올랐다.

‘좋아! 단 두 번의 공격만 버텨내면 된다!’

살짝 동천을 바라본 그는 이어 생각했다.

‘흐흐, 네가 할아버지의 불리함을 알고, 이겨도 잘 봐달라는 뜻에서 본 대인에게 비밀을 가르쳐주었다만 일단 이기기만 하면 당장에 그 버릇을 고쳐주겠느니라. 크하하하!’

중소구가 비무에 임할 생각은 않고 실실거리며 웃기만 하자 주위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우, 뭐 하는 것이냐!”

“질 것 같으니까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대인이라는 외호가 아깝다!”

그들에 섞여 야유를 보내던 부진한은 중소구가 자신 쪽을 노려보자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킨 뒤 언제 그랬냐는 열렬히 응원했다.

“중 대인! 잘 하시오! 난 중 대인께 걸었소이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대원 하나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예? 저기 할아버님에게 건 것이 아니었……, 으케엑?”

눈치 없는 대원을 한방에 기절시킨 부진한은 중소구의 눈동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노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중소구는 심호흡 후에 말했다.

“본 대인은 검이 주특기인데 어르신께서도 무기를 선호하시면 사용하시지요. 그래야 승부가 공평하니까.”

언뜻 보면 상대를 배려하는 듯 들렸지만 실상은 자신이 검을 사용해야만 하는 타당성을 못박아 둠으로서, 상대가 나중에 딴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장노삼은 중소구의 안전장치가 무색할 정도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됐네. 손을 즐겨 사용하다보니 이제와 무기라는 것은 거부감이 들어서 말이야.”

옳다구나, 내심 박수를 친 중소구는 점점 자신 쪽으로 유리해지는 이 상황에 환호라도 지르고싶은 심정이었다.

“좋소이다. 그럼, 시간을 끌지 말고 속전속결로 끝내지요.”

“이를 말인가.”

서로의 비무의사가 떨어지자 소란스러웠던 주위의 야유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다. 공격을 하기보다는 수비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중소구는 마침내 장노삼이 간격을 좁혀오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장노삼은 중소구와의 간격을 일장 이하로 줄여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는 속전속결하자던 말을 무색케 하는군. 어쩔 수 없이 먼저 손을 써야하는가?”

스르르 움직인 장노삼은 손을 들어 다시금 묵직한 기운을 뿜어냈다. 방심하지 않고 수비초식에 전신의 내공을 주입시킨 중소구는 검을 사용해 부챗살처럼 펼쳤다. 팡, 하고 그다지 큰 소음이 들리지 않는 가운데 중소구는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예상외로 손안에 감각이 미비해 그곳을 살펴보자 손아귀가 찢어져있었다.

‘크윽, 엄청나다! 이제 하나만 더 버티면 되는가?’

상황은 중소구에게 손을 들어주는가 싶었지만, 문제는 방금의 충돌로 인해 중소구의 상체가 그대로 노출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장노삼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중소구도 그것에 대비해 물러서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장노삼의 행동이 반 박자정도 빨랐다. 오른쪽 어깨를 직격으로 얻어맞은 중소구는 정신이 아찔 하는 순간에도 희열감을 금치 못했다.

“아으윽! 이, 이겼다아아!”

장노삼은 이놈이 뭔 헛소리를 하나 했다. 그는 예의상 웃어준 후 마지막 결정타를 먹였다.

퍼엉!

“커헉? 어, 어째서…….”

“그 무슨 소리인가. 당연히 기회가 왔으니 손을 쓴 것뿐인데.”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중소구는 동천 쪽을 노려보며 원통해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되는……. 끄윽.”

중소구가 그렇게 쓰러지자, 돈도 벌고 손찌검에서도 벗어난 동천은 만세를 연호하며 장노삼에게 달려들었다.

“우와! 예상은 하고있었지만 할아버지가 이렇게나 강했다니. 히히, 전 할아버지가 이길 줄 알고 있었다니까요?”

장노삼은 달려든 동천을 안아들고 말했다.

“허허, 운이 좋았을 따름이란다.”

이날,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이겼다고 끝끝내 우기다가, 결국 패해버린 중소구는 그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욕을 얻어먹어야만 했다. ‘꼴을 보니 돈만 날렸구나.’ 하는 사람들에게 괜한 희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순간이나마 희망에 부풀게 해준 것이 어디냐고들 말했지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떠나 마지막까지도 어거지를 부렸던 그의 작태는 지탄받아야 마땅하다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어쨌든 중소구만 불쌍한 하루였다.

다음날,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온 제갈일위는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첫째 도련님 덕분에 어제 잘 먹었습니다.’ 라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덕분에 날아갈 것만 같았던 기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흐음, 앞으로 그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군. 이렇게들 좋아하니 전체사기에 활력소 역할을 할 것이 아닌가.”

즐거운 마음으로 처소에 당도한 그는 아버님이 찾고있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무슨 일인가 하여 지체없이 달려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한껏 굳은 얼굴로 방안을 거닐고있던 가주 제갈운은 준엄한 목소리로 제갈일위를 질책했다.

“일위야. 너는 도대체 정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제갈일위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자, 미흡하여 자세한 말씀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갈운은 참을 수 없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정녕 어제의 그 만찬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이더냐!”

찔끔한 제갈일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떼다니요. 소자는 이제야 요점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순순히 인정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로구나. 헌데, 네가 무슨 배짱으로 본 세가의 모든 무사들에게 저녁 만찬을 제공했느냐!”

제갈일위는 기겁하여 되물었다.

“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갈운은 아들이 금새 자신의 잘못을 회피한다고 착각했다.

“어허, 본 아비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것이 불과 촌각이거늘 그새 두려움을 느껴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아아, 장차 아버님의 존안을 어떻게 뵌단 말인가.”

제갈운은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정작 비통해야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도, 도대체 소자는 무슨 말씀이온 지.”

“이놈! 그렇게도 알고 싶으냐? 오냐, 말해주마. 어제의 만찬에 인근 주루의 주방장들을 끌어들이는데 한사람 당 은자 다섯 냥! 열 다섯이 모였으니 합쳐서 칠십 오 냥이렸다! 이어 보조 주방장들이 한사람 당 은자 두 냥! 스물 둘이 모였으니 합쳐서 마흔 두 냥이렸다? 또한 경계보초와 내부의 하인들을 제외하고 본 세가의 무사들이 먹고 즐겼으니 그것에 따른 음식 비용이 은자 서른 한 냥! 이 모든 것을 합쳐 보아라. 자그마치 은자 백 사십 팔 냥이다!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액수더냐? 물론,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요리사들이라면 본 세가에도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쓰지 않아도 될 은자 백! 십! 칠! 냥을 물 쓰듯 낭비해버린 것이더냐! 너는 이래도 변명할 여지가 있더냐?”

제갈일위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동천에게 일임을 한 이상 모든 잘못은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변명을 늘어놓아 봤자 처량해지는 것은 그였기에, 제갈일위는 대 제갈세가의 소문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아버님, 소자는 잘못을 달게 받겠습니다.”

제갈운은 아들이 그나마 잘못을 뉘우쳐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 네 이제 와서라도 잘못을 뉘우치니 한 달 동안의 근신을 명하겠느니라. 그 기간동안 너의 잘못을 겸허하게 반성하거라.”

“예, 아버님.”

방을 나선 제갈일위는 그날로부터 일 개월이 아닌, 삼 개월 동안 스스로 근신을 연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접한 가주 제갈운은 잠시 옆길로 빠졌던 자신의 아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며 좋아했고, 삼 개월의 근신동안 ‘왜 그런 놈과 어울려 손해만 보는 것일까?’ 에 관해서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던 제갈일위는 동천에 관련된 일이라면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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