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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53화


‘이럴 수가, 어찌하여 저 소구 자식이 모른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한 노사 영감탱이가 지껄인 것은 뭐지? 분명히 소구 자식이 이 몸의 철경을 노린다고 했거늘…….’

머리를 쥐어짠 동천은 옆에서 중소구가 화를 내는 것도 무시한 채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헉? 서, 설마, 그 영감탱이가 철경을 노리기 위해 이 몸께 개뻥을 쳤다는 말인가?’

당했다는 생각에 호흡이 곤란해진 동천은 재빨리 제갈세가로 되돌아가려다 그만두었다. 이유는 철경을 건네줄 당시, 예지력이 발동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동천은 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정말로 내가 잘 간수하지 못할까봐 돌아올 때까지 맡아두기로 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예지력이 발동되지 않았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문정이나 장 할아버지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중소구의 농간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일까? 아아, 모르겠다. 평범한 천재인 이 몸께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로구나!’

중소구는 자신의 말을 씹던 동천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가는 척하다 다시 주저앉아 고민하자, 다그칠 수도 없고 해서 기다리는데까지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가는 반 시진이 지나면서부터 증명되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가 고민을 마칠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아아, 만일에 그 늙은이가 철경을 가지고 튀었으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되면 하늘님도 무심하시지…. 하며, 울먹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만일에 그 늙다리가 가르쳐준 형산파의 이(李)씨 새끼도 가공의 인물이면 어떻게 하지? 어이구, 도대체 이 일을 어찌 타개해야 한단 말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중소구는 그를 톡 건드렸다.

“이놈아, 무슨 놈의 고민을 무려 반 시진이 넘게 하느냐?”

정신을 차린 동천은 이내 삐딱한 눈으로 중소구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 쳤어요?”

당황한 중소구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본 대인은 살짝 건드린 것뿐인데.”

동천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본 뒤 말했다.

“그래요? 아니면 됐지, 뭘 그리 놀래요. 난 또 일부러 한대 친 줄 알았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까 빨리 가기나 하죠.”

새가슴이 되어 심장을 벌렁거리던 중소구는 감히 물어보려던 것도 물어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자꾸나.”

중소구가 앞장서고 심각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동천은 만일 이 모든 것이 한 노사가 꾸민 계략이고, 그가 철경과 함께 도망을 쳤다면 제갈세가에게 부탁해 그를 꼭 잡아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제갈세가가 비협조적이라 그 일조차 어렵게 된다면, 사정화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암흑마교로 돌아가 사부에게 하소연하며 매달리기로 했다. 누가 어린놈 아니랄까봐.


중소구가 예측한 5일에서 하루가 더 지나, 호북성으로 들어가는 성문이 나타났다. 그 하루 동안 동천에게 시달려야만 했던 중소구는 기뻐했고, 마찬가지로 예상했던 지점에 도착한 동천도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끼여 묵묵히 따라온 도연은 중소구의 느낌 반, 동천의 느낌 반을 합쳐놓은 듯한 그러한 기쁨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제일 기쁜 것은 도연이리라.

가는 길에 주루에 들린 동천은 점심을 시키고 나서 중소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제 무한을 지나 밑으로 쭉 내려가서 호남성의 장사를 끝으로 형산파에 다다르는 건가요?”

동천에게 시달린지 단 하루 만에 눈가에 기미까지 생긴 중소구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장사를 끝으로 다다른 게 아니다. 장사를 거론한 것은 그만큼 유명한 곳이라, 상징적으로 그곳까지 가면 거의 다 도착한 것이라는 표현에서 그랬던 거야. 알겠냐?”

여기에서 동천이 모른다고 할 리가 없었다.

“나도 다 알아요. 얼굴을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헤롱헤롱 하는 것 같아 잠시 시험해 본 것뿐이라고요. 이제 잠은 다 깼어요?”

기가 막혀진 중소구는 펄쩍 뛰었다.

“본 대인의 얼굴이 수척해진 것은 다 네놈 때문이 아니었더냐! 그놈의 주둥이로 ‘아직도 멀었어요?’라고 끊임없이 조잘대는 바람에 도무지 평온함을 유지할 수가 있어야지! 더군다나 어떻게 된 놈이 잠꼬대로도 ‘아직 이예요?’라고 할 수가 있는 거지? 네놈이 정녕 인간이더냐?”

어디에서 개가 짖나 하던 동천은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에이, 사람이 살다 보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도 있고, 또 잠을 자다 피곤하면 잠꼬대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리 민감한 반응을 보여요. 혹시, 그날이에요?”

중소구는 또 펄쩍 뛰었다.

“요, 요망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본 대인이 어찌…….”

천하의 중소구도 사람들이 모인 주루에서는 차마 그 뒷말을 잇기 어려웠나보다. 그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바스러져라 힘껏 쥔 채 동천을 노려보기만 했다. 너무했나 싶어 웃음으로 무마해보려던 동천은 역효과가 나자(놀리는 줄 알고 더욱 분개해했다) 참으로 비위 맞춰주기도 힘든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호북성을 거쳐 호남의 장사까지 도달하는데 스무 날이 걸렸다. 새로 고용한 마부가 더 이상은 무리라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다시 걷게 된 그들은 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루나 객점을 찾았다. 가진 돈이 많아 호의호식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 동천은 거기에 중소구의 식대까지 부담해야하는 문제가 조금 거슬렸지만 안내인 정도라고 생각하자 금세 신경을 끌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대로를 지나가며 주변 감상에 여념이 없었던 그는 감탄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우와, 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형산까지는 금방이겠네요?”

그간에 의외로 별 탈 없이 지낸 중소구는 감정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렇다고 볼 수가 있다. 쉬지 않고 걸어가면 나흘이고, 쉬어 가면 닷새인데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동천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후자 쪽을 택했다.

“당연히 쉬어 가는 쪽이지요. 자고로 급하게 가면 넘어진다는 말도 있듯 모든 일에는 신중함이 있어야하는 법이에요.”

동천의 가식적인 말투에 진절머리가 난 중소구는 자신이 해줄 말만 들려주었다.

“형산파는 형양(衡陽)에서 제일 처음 형산의 첫머리를 자랑하는 회안봉(回雁峯)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니 물어보지 않아도 찾아가기 쉬울 것이다.”

“예? 그럼, 가보신 적이 없는 거예요?”

가보지도 않고 자신들을 안내했냐는 것이었다. 슬슬 짜증이 일기 시작한 중소구는 참을 인(忍)자를 세 번 외운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본 대인이라 해도 세상의 모든 문파를 방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 천여 개의 크고 작은 방파들 중 그 소재지만큼은 오 할 이상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같은 맥락으로, 형산파 또한 가보지는 못했으나 찾아가는 것만큼은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대답이 되었느냐?”

춤추는 목각 인형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던 동천은 중소구의 말이 끝나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문파를 방문할 수 없는 자신이 슬퍼서 소재지만이라도 외워야겠다고 생각하셨다는 말씀이죠? 하긴, 능력이 안되면 그 정도라도 해야지. 아? 저거 팔다리 따로 노는 거 봤어요? 히히, 무지하게 재미있네?”

“끄으응!”

분노를 삼킨 중소구는 어서 빨리 그 일을 시행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화병으로 죽겠구나. 빨리 적당한 놈이나 놈들을 물색해봐야겠다. 그래야 그 방법을 써서 저놈을 실컷 패줄 것이 아닌가!’

전화위복의 불길을 지핀 중소구는 그때부터 어디 지나가는 무림 고수가 없나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기만 소지하면 일단 시비를 걸기 시작한 그는 동천이 뭔가 이상한 낌새로 자신을 쳐다보자, 그 다음부터는 육안으로 살펴가며 고수나 고수들을 만나길 간절히 빌었다. 한편, 저게 미쳤나 싶어 쳐다보던 동천은 자신이 그런 눈치를 준 뒤부터 중소구가 잠잠하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형양에 도착했을 때 중소구는 마침내 적당한 인물을 포착했다.

‘나이는 적어도 이십대 중반이고, 태양혈이 불끈 치솟은 것으로 보아 고수도 분명하구나. 흐흐, 어디 작업에 들어가 볼까나?’

도연에게 무기를 맡기고 일행에게서 떨어진 중소구는 어슬렁거리며 걸어가 상대와 일부러 부딪혔다.

“어이쿠!”

부딪힌 놈이 의외로 나가떨어진 중소구는 일으켜주는 사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사내는 불쾌하지 않은 눈으로 중소구를 대했다.

“조심하셨어야지요.”

중소구는 흡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그럼 실례하겠소.”

사내와 헤어진 중소구는 빙 돌아서 동천 쪽으로 되돌아왔다.

‘흐흐, 일 단계 작전은 성공이다.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가면 되는 것인가?’

묘한 눈길로 쳐다보던 동천을 무시한 그는 나란히 걸어가다 이번에도 일부러 동천 쪽으로 발을 헛디뎠다. 엉겁결에 중소구를 안게 된 동천은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만 같은, 그런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으엑? 이, 이게 무슨 짓거리예요!”

동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심정이었던 중소구는 마찬가지로 역겨워하는 얼굴로 급히 떨어졌다.

“에이, 재수 없게 시리. 하필이면 그때 또 발이 엉킬게 뭐야?”

동천은 한술 더 떠 소리쳤다.

“거 좀 조심해요, 방금 아침을 먹었는데 소화가 안 되면 대인께서 책임질 거예요? 에이 씨, 기분 더럽고 찜찜해서 죽겠네. 오늘 점심은 어떻게 먹는다지?”

응가를 밟아도 이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응가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중소구는 이러고도 참고 있는 자신이 심히 의심스러웠지만, 이 순간을 견뎌내는 것 또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지 참고 또 참기로 마음을 먹었다.

‘크으, 두 번째도 성공이다. 조금만 참자. 이제 마지막 삼 단계로 넘어가면 저 녀석을 족칠 수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동천의 반응을 철저히 묵살한 중소구는 아까 그 사내가 쫓아오라는 듯 선명한 발자국을 만들며 걸어갔다. 그 중간에 자신이 점심을 사겠다며 객점 안으로 들어간 그는 음식들을 시킨 후 초조하게 아까의 사내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동천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오자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여기 뒷간이 어디지?”

쪼르르 달려온 점소이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바로 공자님의 뒤쪽으로 쭉 가보시면 나올 겁니다.”

“험, 고맙네.”

중소구는 스쳐 지나가는 동천에게 한마디 했다.

“늦게 볼일을 본다면 여기에 있는 음식들은 보장할 수가 없지.”

눈빛을 반짝인 동천은 조용히 제자리에 앉았다. 도연은 그런 주군에게 물었다.

“안 가십니까?”

동천은 되도록 많은 양의 음식들을 씹어 삼키며 눈을 흘겼다.

“너르믄 이 사랑에서 가엣냐?(너라면 이 상황에서 가겠냐?)”

당연히 가겠지만 도연은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는 영양가치도 없는 소리인 것을 알기에 그냥 그러려니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런 사이에 어느 정도 배를 채웠다고 생각한 동천은 벌게진 얼굴로 뒷간을 향해 뛰어갔다.

‘아이고, 방광 터져 죽네! 응? 그러고 보니, 그 방광 할배는 요즘 잘 있나 모르겠네? 나중에 천하제일의 미녀를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설마 개뻥 친 것은 아니겠지? 히히, 언제 찾아가 봐야겠다.’

가면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동천이었다. 다행히 쉽게 보이는 곳에 있어 볼일을 해결한 그는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팔자걸음을 시도했다.

“인생이 처량한 인간아~. 이 몸에게 모여라. 랄라, 돈만 바치면 구원. 신앙만 바치면 죽음. 인생이 처량한 인간아~. 이 몸에게 모여라. 이 몸에게…, 응?”

‘인생이 처량한 인간이 구원을 받는 법’이라는 제법 긴 자 작곡 노래를 부르던 동천은 오른쪽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쪽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풍파에 찌든 누런 색 벽밖에 없었다.

‘어? 서, 설마!’

그와 동시에 그쪽 벽면이 무너지며 한 인영이 빠른 속도로 동천에게 나동그라졌다. 엉겁결에 상대를 받아든 동천은 사십대의 비쩍 마른 사내가 안겨있자 재빨리 앞으로 내던졌다. 헌데, 그에게 던져진 사내가 몸을 회전시켜 안전하게 착지하는 것이 아닌가. 독사 같은 눈으로 동천을 노려본 사내는 의외로 어린놈이자, 신속히 그의 등 뒤로 돌아 한 손으로 동천의 목을 감고 위협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죽이겠다!”

피할 수도 있었던 것을 경험의 미숙함으로 당해버린 동천은 울먹이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아이고,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전 아직 어리다고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인생인데 여기에서 이렇게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어린놈이 징징거려 짜증이 난 사내는 동천의 아혈을 막고 전방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면 안전할 때까지 데리고 다니다가 놓아주겠다! 하지만 끝까지 나와 결전을 벌이겠다면 우선 이 아이부터 죽는 꼴을 봐야만 할 것이다!”

반원을 그려 사내를 둘러싸고 있던 다섯 명의 청년들은 신중하게 대처했다.

“신충(申充)!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다는 것을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신충이라 불린 사내는 싸늘히 말했다.

“흥, 기어이 피를 보자는 것이냐?”

그때, 도연과 함께 나타난 중소구는 인질로 잡혀있는 동천을 바라보다 신충에게로 눈을 돌렸다.

“가만있자, 내가 저놈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더라? 혹시, 신충이라면 그 하면 살귀(下面殺鬼) 신충을 말하는 건가?”

중소구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청년들 중 하나가 아는 척 나섰다.

“당신은 아까 전의 그…….”

흠칫한 중소구도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소개를 잊지 않았다.

“대인 중소구라 하네.”

그 청년은 상대의 기세가 아까와는 딴판이자 감히 경시할 수 없어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셨습니까, 저를 비롯한 여기 사제들은 형산파의 삼대 제자들입니다. 왼쪽 끝부터 운환(雲丸), 마광수(摩鑛水), 오협(旿協), 진우현(珍雨現),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송학도(松鶴度)입니다.”

도연과 중소구는 똑같이 놀라했다.

“형산파?”

송학도는 상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어찌 놀라시는지요.”

진정을 한 중소구는 껄껄 웃어댔다.

“하하,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형산파로 가고 있는 중이라서 놀란 것이라네. 이런 우연이 다 있는가?”

송학도가 대꾸하려는 찰나, 상황에 걸맞지 않게 소외당해있던 신충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이, 이놈들이! 정녕, 이 아이놈을 죽이고 싶어서 여유 있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그의 굵은 손가락이 동천의 목에 파고들자 기겁을 한 동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요. 흑흑, 인질이 필요하시면 다른 분들을 쓰세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근수가 나가는 인질이 더욱 효과적일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 신충은 어이없어 하는 말투로 물었다.

“너…, 어떻게 아혈을 풀었지?”

아직도 자신의 우세함을 모르고 있었던지 동천은 겁에 질린 눈으로 신충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거요? 당연히 제가 풀었죠. 아, 안되나요?”

“당연히 안되지 이놈아!”

눈부신 속도로 옴짝달싹 못하게 동천의 전신 대혈을 막아버린 신충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중소구는 나서려는 도연을 제지하고 지켜보자는 눈치를 보냈다. 도연은 의아했지만, 대책 없이 자신을 제지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여 중소구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송학도가 소리쳤다.

“비겁하게 어린아이를 인질로 삼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보자!”

신충은 비릿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크크크, 그래? 그럼, 아무나 검을 던져라. 아까 전에 놓쳐버려서 내 수중에는 무기가 없으니까.”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때마침 막혔던 혈도들을 모조리 뚫어버린 동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신충에게 물었다.

“뭐야, 너 무기 없었어?”

“방금 없…, 헉?”

기겁을 한 신충은 본능적으로 동천을 냅다 밀쳤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창피한 짓을 당한 동천이 쉽사리 물러날 리가 없었다. 물론, 창피한 것을 모르는 그였지만 무기도 없는 놈에게 쫄았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민 것이었다. 신충이 반응할 새도 없이 가까이 다가든 그는 기묘한 기합음을 흘리며 검지와 중지를 세웠다.

“우오오, 아쵸오!”

손가락으로 신충의 두 눈을 찔러버린 동천은 그가 얼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자, 금세 마음이 약해져 정면이 아닌 좌측 45도 각도에서 그의 안면을 후려쳤다. 그래야 이빨이 나가더라도 차후 입을 크게 벌리지 않는 이상 남들에게 들킬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뻑!

“끄아악-!”

공중에서의 세 바퀴 회전을 끝으로 나가떨어진 신충은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그의 주변에는 어금니 예닐곱 개만이 처량하게 흩어져 있었다.

“…….”

상대편을 동정해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던 형산파의 제자들은 평생을 한쪽 어금니로만 연명해야하는 신충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과 반대로, 후련하다는 얼굴로 손을 탁탁 털고 나온 동천은 진작에 이럴 것을 왜 쫄았는지 그것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후아, 가뿐하다. 아? 형산파의 제자분들이라고요?”

그들은 무엇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양양해진 동천은 그들을 반대편 주루로 이끌었다. 형산파의 제자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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