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56화
일어나자마자 운기조식을 마친 중소구는 아직도 어둑어둑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이 되었음에도 곡구(谷口)에 운무가 서려 햇빛이 잘 스며들지 않는군. 정말로 독충이나 독물이 서식하기에는 적합한 곳인걸? 으음, 만일에 대비해 해독약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지독한 놈을 만나면 힘들어지겠군.”
이미 운기조식을 끝마치고 최상급의 육포를 뜯어먹던 동천은 이제 와 약한 소리를 하는 중소구를 경멸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중소구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천진난만한(?) 눈으로 생글거렸다.
“꺼억, 잘 먹었다.”
보통 사람 세 배 정도의 육포를 먹어치운 동천은 군침 삼키며 다른 이들이 먹는 것을 쳐다보았다. 결국에 그는 점심에 먹을 분량을 조금 떼어먹은 후에야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운무가 가시자 그때서야 움직였다.
“도 소형제, 언제나 발밑을 조심하게나. 독물들은 보호색이 뛰어나서 바로 옆을 지나가도 분간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니까.”
도연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괜히 중소구에게 경쟁심이 붙은 동천은 자신도 근사한 말씀을 내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이런 숲속에서 발밑에만 정신을 팔다가는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독충들에겐 속수무책이야. 저 봐, 보이지? 위에서 떨어져 내리…, 으악! 이, 이게 죽으려고!”
주위에서 날아다니던 것이 자신에게로 방향을 틀자 본능적으로 손바닥을 내려친 동천은 바닥에 떨어져 부들거리는 독충을 짓이겨 밟았다. 한 번으론 부족해 발에 땀나도록 밟아댄 그는 자신의 추태를 인식했는지 안 그런 척 앞으로 걸어 나갔다.
“뭐해, 빨리 가지 않고. 벌레 죽이는 거 처음 보냐?”
겉으로는 대담한 척했지만 그의 손엔 어느새 도가 들려있었다. 도연이 보관하고 있던 것인데 당사자가 못 느끼는 사이에 빼내간 것이었다. 살고 싶다는 욕구는 이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거참, 어쨌든 저놈의 말처럼 위에도 조심하면서 빨리 가세나.”
동천의 행동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중소구는 그렇게 말하고 연장자인 자신이 앞장을 섰다. 좌우로 크게 벌려진 산허리 능선을 지나 곡구의 초입에 당도한 동천 일행은 길목 한구석에서 흔히들 경고용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는 ‘입곡자사(入谷者死)’라는 어린아이 크기의 비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끔 해주는 비석은 이끼들에게 잠식되다시피 했어도 그 의미만큼은 명확하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 비석을 툭툭 건드려본 동천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면 죽는다고? 히히, 그럼 들어갔어도 살게끔 해주지.”
들고 있던 무기로 글자 마지막인 부분인 사(死)자를 긁어내고, 그 위에다 생(生)자를 새겨 넣은 동천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떠냐, 이렇게 해놓으면 결코 죽지 않겠지?”
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됐어, 임마. 원래 잘못 써진 글자는 고쳐줘야 하는 법이야. 봐, 그 거지 같던 비석이 이 몸의 글씨 하나로 저렇게 번쩍거리는 것을. 아아, 너무도 눈부셔 차마 마주 볼 수 없구나.”
동천이 하는 짓이 하도 못마땅해 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중소구는 어서 빨리 그 노파가 등장하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아울러 그는 비석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동천에게 소리쳤다.
“빨리 와! 자꾸 거기에서 시간 끌면 떼어놓고 갈 거니까!”
동천은 자신의 작품도 몰라주는 중소구는 역시 소구(昭狗 : 빛나는 개)라고 내심 씹어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머리를 빡빡 깎으면 진정한 의미의 빛나는 개가 될 텐데…….’하고 아쉬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예술을 모른다니까, 예술을?”
동천은 맞을 일도 없기에 대놓고 투덜대며 따라갔다. 그리고 중소구는 왜 이리도 노파가 등장하지 않는 것인지, 그것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형운곡의 노파, 왜 이리도 안 나타나는 것이오. 혹시, 본 대인의 무서움을 알고 피한 것이오? 그렇다면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긴 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좀 우둔해야 하지 않겠……, 응? 여기가 어디지?’
갑자기 경치가 바뀌자 흠칫한 중소구는 자신이 진법에 빠졌음을 인식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진법이지? 본 대인이 아는 것이라곤 고작 팔극진(八極陣) 하나뿐이거늘, 이를 어쩐다?”
진법에 빠졌을 때부터 꼼짝 않고 서있던 중소구는 진법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금방 이니까 뒤로 크게 뜀박질을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았어. 으랏차차!”
이삼 장을 훌쩍 물러선 그는 뒤로 몸을 날린 감각은 있는데 바뀐 것이 하나도 없자 크게 진노했다.
“도대체 진법이라는 것은 어느 후레자식이 만든 것이냐?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놈이 진법이라는 것을 만든 자식이로다!”
“거참, 시끄러운 종자로구나.”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급히 좌측을 돌아본 중소구는 눈부신 백발에 눈부신 백의를 입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미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말로만 듣던 노파라는 사실을 직감한 그는 공손하게 말했다.
“할머님, 진법에 빠진 것 같은데 어떻게 도와주실 수는 없는지요.”
미부는 미약하게나마 눈을 반짝인 후 물었다.
“뭘 좀 아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곳에 들어올 때 입곡자사라는 비석도 보았으렷다?”
중소구는 떨떠름한 표정을 대꾸했다.
“못 보았다면 거짓이겠지요.”
“그것을 보았으면서도 겁 없이 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자신이 궁지에 몰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중소구는 준비해놓은 변명거리가 없자 대충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그것은, 에에…. 그러니까 이곳을 지나가야만 길이 빠르다고 생각해서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미부는 싸늘히 웃고 난 뒤에 말했다.
“그렇게 산세를 볼 줄 아는 놈이 척 보아도 막혀있는 이곳에는 왜 들어왔을꼬?”
중소구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자 멋쩍게 웃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실은 형산파에서 머물고 있던 식객인데, 며칠 전 이곳에 다녀갔던 아이들의 말을 듣고는 호기심이 동해 찾아온 것입니다.”
미부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이 또 다른 말은 해주지 않았나 보구나.”
중소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또 다른 말? 그게 뭡니까?”
대번에 싸늘해진 미부는 상대를 질식시킬 만큼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까지는 봐주지만 행여 다시 찾아온다거나 너희들의 입 소문으로 인해 찾아든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살려 보내주지 않겠다는 말을 말이다.”
대번에 서늘해진 중소구는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서 그는 역시, 여인네가 눈을 치켜뜨면 소름이 돋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 그런 소리를 했었습니까? 본 대인은 처음 들었소이다. 이런 괘씸한 녀석들을 봤나!”
미부는 중소구의 행동에도 아랑곳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흥! 어떠한 이유에서든 본녀와의 약속은 약속이다. 하류배를 처치하는 것은 수치이긴 하지만 네놈은 죽어줘야겠다.”
어이가 없어진 중소구는 이렇게 화가 나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뭐요? 하류배? 감히 무림에서 위명 높은 대인 중소구에게 하류배라고 칭한 것이오?”
중소구의 전신에서 강한 기류가 발산되자 의외였는지 미부가 잠깐 주춤했다.
“뭔가 한 가닥은 하는 것 같지만, 분명 본녀는 강호 상에서 네놈의 외호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중소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화를 풀었다. 대인이라 외호를 바꾸고 활동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하, 그래서 몰랐구려. 지금의 대인이라는 외호는 바꾼 지 얼마 안 되어 생소했을 것이오. 그럼, 협객 중소구는 들어봤겠지요?”
미부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그렇다면 네가 그 소문이 자자한 광객(狂客)이었단 말이냐? 이름은 새겨듣지 않다 보니 못 알아보았구나.”
중소구는 화를 가라앉힌 보람도 없이 또 다시 진노했다.
“으익, 도대체 어느 정신 나간 놈에게 그따위 망발을 들었단 말이오!”
미부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중소구를 놀려댔다.
“정신 멀쩡한 사람에게 들었다. 그렇다는 것은 네가 정녕 미친놈이란 말이로구나.”
그것을 끝으로 폭발해버린 중소구는 검을 뽑아들고 미부에게 달려들었다.
“주안술과 그 세 치 혓바닥으로 사람을 희롱하는 요녀야! 본 대인이 너를 처단해주겠다!”
한순간 요녀로 치부된 미부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마주쳐나갔다.
“감히 어디에서 그따위 망발을 하느냐!”
“흥, 망발은 네가 먼저 놀렸느니라!”
동천과 상대하게 만들어야 할 미부를 자신이 떠맡게 된 중소구는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상대의 요혈을 찔러갔다. 그는 미부가 거침없이 손을 후려치자 놀라했지만 무모하게 덤빈 쪽은 상대라는 생각에 가차 없이 검을 놀렸다. 순식간에 미부의 손을 찌른 중소구는 검에서 아무런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제길, 허상이로구나!”
방어를 목적으로 회오리처럼 몸을 돌려가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 친 그는 좌측에서 무언가 베인 듯한 느낌이 들자, 주저 없이 공격 범위가 넓은 초식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그는 수시로 바뀌는 경물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지만 감히 한눈을 팔지 못했다.
“거기에 있는 것을 다 안다! 빨리 그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자 가소롭다는 듯 사방에서 미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녀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안다면서 반대쪽을 쳐다보는 것은 무슨 심보더냐?”
본능적으로 신형을 돌린 중소구는 원래 공격하고 있었던 쪽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자 속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펑!
“으악!”
등 쪽에 일장을 얻어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는 전신 혈도가 빠르게 제압됨을 느꼈다. 중소구는 생각 이상의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래도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유일하게 제압되지 않은 입으로 힘겹게 중얼거렸다.
“내 이래서 진법이 싫다니까….”
한편, 갑자기 중소구가 사라져 놀라 걸음을 멈춘 아이들은 전방에 진법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지요?”
도연이 묻자 불안감을 느낀 동천은 괜히 짜증을 부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도 처먹은 나이가 있으니까 젊었을 때 진법 공부 좀 했겠지. 기다려보자고.”
아까도 언급했지만 중소구는 진법에 문외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리기로 결정을 내린 도연은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사이, 할 일이 없어 청력을 증강시킨 동천은 진법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가 들리자 재빨리 도연에게 말했다.
“야, 청력을 집중하니까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 어떤 여자가 여긴 왜 들어왔냐고 묻고 있는데?”
주군의 말을 따라 청력을 끌어올린 도연은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요. 저는 안 들립니다.”
동천은 그 무슨 개소리냐는 듯 말했다.
“잘만 들리는데 안 들리긴 뭐가 안 들려! 이 몸께서 그대로 읊어봐? 에…, 그렇다면 그 아이들이 또 다른 말은 해주지 않았나 보구나. 또 다른 말? 그게 뭡니까? 너희들까지는 봐주지만 행여 다시 찾아온다거나 너희들의 입 소문으로 인해 찾아든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에이 씨, 뭔 놈의 주둥이를 이렇게 길게 놀려? 어쨌든 정말이니까 이리 와서 잘 들어봐. 니 개판인 수준으로도 충분히 들릴 정도라고.”
거짓이 아닌 것 같아 주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 도연은 그제야 들리는 소리에 신기함을 금치 못했다.
“정말이군요. 이쪽으로 오니까 들립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동천은 괜히 아는 척했다.
“아마도 진법의 흐름상 파동이 새어나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바로 여긴가 보지. 넌 그것도 모르면서 살고 싶냐?”
도연은 진심으로 알아듣고 감탄해했다.
“그렇군요. 저는 오늘에야 안목을 넓혔습니다.”
“험, 이 정도쯤이야.”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법이라는 것은 공간의 흐름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기에 기의 이동 통로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들 중 외부에서 들어오거나 안에서 나가는 부분이 있어야만 진법이 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방금 동천이 때려 맞춘 것처럼 그들은 그 흐름이 들락날락거리고 있는 부분에서 멈춰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내부 상황을 듣고 있던 동천은 미부가 ‘네가 정녕 미친놈이란 말이로구나.’하는 부분에서 좋아라 박수를 쳐댔다.
“으히히, 뭘 좀 아는데?”
그러나 도연은 심각했다.
“아무래도 싸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웃음을 멈춘 동천은 내공의 한계까지 끌어올려 청각에 집중시켰다.
“어, 정말이네? 이건 검을 찌를 때 들리는 소리인가?”
도연은 급히 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안에서는 상대가 보이나본데 미력하나마 저라도 도와드려야겠습니다.”
도연을 제지시킨 동천은 인상을 찡그렸다.
“가만있어봐! 방금 소구 자식이 허상이라고 소리를 질렀단 말야. 그 말은 곧 그 자식과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가 허상이었다는 뜻인데 니가 들어가서 뭐하려고? 서로들 아군인지도 못 알아보고 옳다구나 찔러주게?”
도연은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더더욱 큰일난 것이 아닙니까.”
동천은 입이 바싹 타들어 가는 상황에서 조심스레 말했다.
“야, 우리라도 도망칠까?”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천도 바로 정정했다.
“농담이야, 임마!”
그러는 가운데 중소구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자 도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중 대인, 무사하십니까?”
기절한 중소구를 옆구리에 끼려던 미부는 이내 그를 내려놓고 도연에게 다가갔다.
“용감하구나.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도망이라도 쳤을 텐데.”
도연은 상대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해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중소구의 안위만이 걱정될 따름이었다.
“중 대인께서는 무사하십니까?”
잔상만을 남기고 어느새 도연의 뒤로 돌아들어간 미부는 손쉽게 그를 기절시킨 뒤 웃으며 말했다.
“무사하냐고? 호호, 깨어나거든 보려무나.”
동천의 말을 빌어 ‘뭐 하러 들어갔냐?’ 할 정도로 허무하게 당한 도연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하며 기절했다. 이렇게 되자, 혼자만 남게 된 동천은 눈물을 머금고 최후의 방법을 써야만 했다. 진법 내부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본 미부는 눈을 크게 떴다.
“잘도 도망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