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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59화


동천(冬天). 2부-6.

서장(序章).

<지금이 몇 번째일까?

여섯 번, 일곱 번? 기억하기도 힘들다는 것은 언제나 나를 괴롭게 한다. 눈을 뜨면 언제나 다른 얼굴이 지켜보고 있다.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옛 수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대를 이어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후후…, 아무렴 어떠한가.

나는 아직도 살아있고, 애초에 걸었던 도박은 성공하고 있는 셈이거늘…….

또다시 눈이 감긴다. 다음은 몇 번째일까?

불행은 그것을 염려하는 자에게 찾아온다.


“사형!”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햇살을 등지고 서있던 그는, 예의 그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반긴다.

“다 큰 처녀가 벌써부터 그렇게 치맛바람을 날리면 쓰나.”

나는 괜히 수줍어진다. 그의 앞에 멈춰선 나는 양손을 분주하게 움직여 부풀어 오른 치맛자락을 곧게 쓸어 내린다.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핏, 이 정도가지고 그냥 치맛바람이라고 하면 경공을 시전할 땐 무슨 치맛바람이라고 해야하는 거죠?”

“그, 글세….”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그는 난감함을 감추기 위해 어색한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곤 언제 난감해했냐는 듯 자연스런 웃음으로 바뀔 것이다.

“아, 이거 한방 먹었는걸? 하하하!”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편안한 그의 웃음. 보라, 절로 나를 미소를 짓게 하지 않은가.

“호호, 웃음으로 얼버무리지 말라고요.”

난 그의 웃는 모습이 좋다.

“알았어, 알았어. 항복이야.”

그러나 난…. 그러나 지금의 난, 그의 웃음 진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

잠에서 깨어난 민묘희(旼苗希)는 한 손을 들어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코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을 반증하듯 그녀의 눈동자는 싸늘함을 머금고 있었다.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신 그녀는 가는 한숨을 몰아쉰 후 방을 나섰다. 걸어가는 그녀의 주위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것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것은 그녀의 키 높이로 매달려 있는 횃불들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을 밝혀주는 횃불들은 오늘도 그렇게 일렁이고 있었다. 일정한 보폭을 움직여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걸음을 옮긴 민묘희는 낡은 철문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자 지체 없이 밀어냈다. 듣기 거북한 마찰음이 들린 동시에 민묘희의 신형이 아래로 이어지는 지하 계단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 끝에 계단의 끝이 보이자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좌측에 도열해 있는 문들 중 네 번째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묘희는 안쪽에 매달려 있는 세 사람에게 다가갔고, 곧이어 제각각의 소리들이 밀실에서 울려 퍼졌다.

“크윽, 우으읍!”

“으악!”

“이, 이 빌어먹을 계집!”

안에서는 어떠한지 몰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는 그들의 비명은 자세히 듣지 않고는 감지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비록 조용하기 그지없는 지하 내부라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스러움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다른 세 사람은 두 번째 철문 안에서 치를 떨고 있었다.

“으음, 또 다른 사람들이 정말 있었군.”

중소구가 미세하게 몸을 떨며 말하자 모두와 마찬가지로 양손 양발에 쇠사슬이 묶여있던 동천은 앉은 자세에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거 참 더럽게 사람 말을 못 믿네. 내가 어제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잖아요.”

도연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묶인 중소구는 모로 누워 듣는 체도 안 했다.

“이게 뭔 소리지? 어디서 개가 짖나?”

동천 또한 말다툼하기 싫은 듯 중소구 쪽으로 등을 보이게 누운 뒤 조용히 중얼거렸다.

“개새끼.”

중소구는 발딱 일어났다.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개새끼?”

짜증스런 얼굴로 일어난 동천은 흥분에 온몸을 푸들거리는 중소구에게 말했다.

“그냥 중얼거린 것 가지고 왜 또 그래요. 중 대인이 개새끼예요?”

중소구는 동천의 잔꾀에 자신이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화를 내면 자신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금세 화를 풀었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그냥, 그렇다는 뜻이지.”

동천은 상대의 행동에 피식 웃고 관심을 끊었다. 그러자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도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들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잡혀온 걸까요?”

동천은 도연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에그, 이 멍청한 놈아. 쟤들이 이유가 있어서 잡혀왔겠냐? 다 저 미친 할망구 때문에 잡혀온 거 아냐. 너도 생각해봐. 우리가 이유가 있어서 잡혀왔냐? 그냥 순수한 의도로 접근했다가 억울하게 잡혀온 거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지요.”

도연이 마지못해 대답한 사이, 동천의 같잖지도 않은 소리에 중소구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민묘희가 미쳤다는 부분에서만큼은 전적으로 동감하는지 그의 고개가 절로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정신이 아니라는 부분은 인정하는 바이다. 이유도 없이 잡혀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

동천은 중소구의 미온적인 대답에 낮게 혀를 찼다.

“쯧쯧,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는 이 몸께서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알아들을 것이지 뭔 놈의 의심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네.”

고개를 들어 올린 중소구는 동천과 비슷한 의미로 혀를 찼다.

“쯧쯧, 천리가 아니라 기껏해야 삼장이겠지.”

동천은 혼잣말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삼장법사는 싫은데…….”

“누가 그 삼장을 말했더냐!”

동천은 귀를 틀어막고 맞받아쳤다.

“거 좀 조용히 해요!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 저쪽의 할망구가 듣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들으면 어때? 까짓 거 사내라면 당당하게 맞서면 되는 것이야!”

동천은 상대가 도저히 말을 들어먹을 것 같지 않자, 괜히 화를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 참, 그런 걸 보고 무모하다는 거예요. 왜 맞지 않아도 될 매를 기어코 벌려고 그래요? 기왕이면 편하게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중소구는 답답함에 가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네놈은 아직 어려서 무림의 세계를 몰라. 무림의 사나이라면,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사내라면 그러한 고통쯤은 웃으면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제법 진지하기는 했지만 듣는 동천은 귀를 후비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우리 사부님께서는 상대가 우위에 있다면 싸움보다는 전략적인 후퇴를, 맞서기보다는 우회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셨단 말야. 쳇, 아는 건 쥐뿔도 없는 자식이 어디서 아는 척하고 지랄이야?’

가르침을 내린 역천의 성격이 그러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강호 경험이 전무한 제자가 나중에 괜히 한건 한답시고 깝죽대다 제명에 살지 못하고 죽을까 싶어 그렇게 가르쳤던 것 같았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동천의 입장에서 보면 여지껏 살아있는 것 자체가 용하지만 말이다.

“가만, 우릴 잡아들인 그 노파의 정체가 뭘까?”

중소구가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리자 도연이 대꾸했다.

“제 생각에는 사파(邪派) 쪽의 인물로서 어떠한 실험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습니다.”

중소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우리가 이틀 전 잡혀왔을 때 억지로 먹였던 그 걸쭉한…, 으읍, 생각만 해도 넘어올 것만 같군. 어쨌든 그걸 말하는 겐가?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 이건 본 대인의 생각인데, 형산파라는 명문 정파가 이 근처에 있으면서도 이런 곳에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근처의 마을 사람들에겐 피해를 입히지 않은 것 같아. 명문 정파로서는 그러한 소식이 흘러들면 자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종종 마두(魔頭) 토벌에 나서는 법이니까.”

도연은 문득 이곳에서 헤매다 고생을 하고 돌아온 형산파의 제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형운곡에 직접 당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녀가 있다는 소문을 긴가민가했었다. 그 정도로 소문이 퍼지지 않았던 것이다.

“중 대인, 그런데도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인체실험을 함에 있어 어떠한 단체가 이곳과는 무관한 곳에서 사람들을 대주고 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려감으로 인해 중소구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렇다면 어느 사파의 비밀 실험장소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도연은 단정 짓지 않았다.

“단지 하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러자 제일 말이 많았던 동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리석기는, 그 빤지르르 할망구의 정체야 아주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데 말야.”

중소구는 눈을 반짝였다.

“네가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물론이죠!”

“그렇다면 말해보거라. 그 노파의 정체를.”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동천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후후, 어떠한 일에 있어 복잡하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진실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법.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지요.”

중소구는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그래, 뭔 소리인지 잘 알겠으니까 어서 말해봐.”

동천은 자꾸 재촉하는 중소구 때문에 기분이 상했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그 빤지르르 할망구의 정체는 바로 은거기인이라는 말이에요. 형운곡에서도 나오지 않으니까 그 할망구의 얼굴을 대하는 무림인들이 없다시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도연과 중 대인께서 그 할망구를 나쁜 쪽으로 의심하고 있는 거라고요. 한 사람을 곁에 두고 밑도 끝도 없이 나쁘게만 보면 좋은 점이 전혀 눈에 차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아시겠어요?”

중소구는 전혀 기대도 않던 동천이 그럴싸하게 서두를 떼자 감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호오, 그래서?”

동천은 중소구의 위아래를 꼴아 봤다.

“그래서이긴 뭘 그래서예요. 은거기인이라니까.”

“아, 그러니까 그 다음의 이야기를 하라고. 우리가 나쁜 쪽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야. 그 다음을 이야기해 보라는 거야.”

동천은 도대체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이 있긴 뭐가 있어요. 은거기인이면 은거기인으로 끝나는 거지.”

중소구는 대뜸 동천의 멱살을 잡았다.

“크아악, 이 빌어먹을 자식아! 지금 본 대인을 가지고 노는 거냐?”

동천은 눈을 부라렸다.

“어? 지금 치겠다는 겁니까?”

멱살을 쥔 중소구의 양팔이 분노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그만큼 참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 이!”

자칫 험악한 쪽으로 넘어갈 태세였으나 그들의 대치 상황은 네 번째 철문이 열리면서 무마되었다. 양손에 힘을 뺀 중소구는 한껏 긴장한 모습으로 동천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리로 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가 말을 꺼내며 동천을 쳐다보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동천의 감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동천은 중소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제길, 일어나기나 해요!”

그의 외침에 모두들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묶여있는 양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철문이 열리면 벽에 박혀있던 쇠사슬이 그들을 절로 일으켜주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그들의 양손에 묶여져 있는 쇠사슬은 벽의 상층부 구멍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평소에는 그 사슬의 길이가 보통의 성인 키만큼 길어서 앉아있다거나 모로 누울 정도가 됐었지만, 철문이 한번 열렸다 닫히면 내부의 기관 작동으로 인해 벽의 구멍 속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앉아서 버티겠다고 무리를 했다가는 온몸이 뻑적지근해진다는 소리였다.

실제로 꽉 막힌 중소구가 이틀 전에, 그러니까 처음에 잡혀왔을 때 버텨보겠다고 무리를 했다가 한쪽 어깨가 빠진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했던 동천은 ‘나는 저런 미친 짓은 말아야겠다’라고 굳게 다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가지. 한번 작동된 기관 장치는 어떻게 푸느냐. 그것은 아주 간단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측을 했겠지만 닫혀있는 철문을 한번 더 열었다 닫으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민묘희가 안으로 들어와 볼일을 보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 사람은 녹슨 철문을 바라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자 길게 늘어져 있던 쇠사슬이 좁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쇳소리를 동반한 그 마찰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실로 소름 끼치게 할 정도였다. 내심 씨발씨발 거리기에 여념이 없던 동천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민묘희를 반겼다.

“헤, 헤헤. 오셨어요?”

대충 좌우를 둘러본 민묘희는 잠에서 깼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동천의 말을 받았다.

“보아하니 본녀를 반기는 것은 너 하나뿐인 것 같구나.”

동천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도연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민묘희를 바라보고 있었고, 쳐다보기도 싫은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린 중소구는 아니꼽다는 얼굴로 아랫입술을 한 자나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중소구를 바라본 동천은 ‘저러다 맞으면 안 아플까?’라는 의아심이 일어났지만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기에 곧 관심을 끊었다.

“그러네요. 뭐, 저야 원래부터 밝은 성격이다 보니……, 저기, …님을.”

동천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냥 친근하다는 표시로 아줌마라고 부를까? 아이고, 아줌마. 참으로 예쁘시네요 라고 말야. 아니지, 그랬다가는 한 대 맞을 수도 있어.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할머니? 아이고, 할머니. 어쩜 피부가 화정이 만큼 곱습니까? 예? 화정이가 누구냐고요? 그야, 강시죠. ……것도 아냐. 그랬다가는 한 대 맞을 거 두 대 맞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사모님? 아이고, 사모님. 바깥분께서는 정정하십니까? 저런, 벌써 뒈졌다고요? 으으윽, 그것도 아냐! 그랬다가는 분명히 몰매를 맞을 거야. 아아,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게 그러니까…, 아하!’

재빨리 매듭을 진 동천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말했다.

“헤헤, 그러니까 누님께서 들어오시니…….”

퍽!

뭔가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뒤흔든 동천은 다른 말로써 상대방을 누그러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방금 그건 장난이었고요. 여, 여협께서 오시니 반갑기 그지없다는 말이었습니 다. 정말이에요.”

그러자 옆에서 도연의 말이 이어졌다.

“깨어나셨습니까?”

동천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눈이 시큰거렸다. 아니,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랄까, 동천의 말을 인용하자면 얄딱꾸리한 고통이 느껴진다고 할까?

“윽, 거 더럽게도 아프네.”

“그러실 겁니다. 상당히 부어 올랐으니 당분간은 민낭(旼娘)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마십시오.”

동천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민낭? 아야야.”

약간 치켜뜬 것만으로도 상당한 고통이 뒤따랐다. 동천이 갇힌 이곳은 워낙에 어두컴컴해서 밤낮의 구분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오른쪽 눈이 퉁퉁 부어오른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한 시진 이상은 지났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가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도연은 뒤늦게 생각나는 것이 있어 말했다.

“아, 기억이 없으시겠군요. 우릴 가둔 그녀의 말이 자신을 민낭이라고 불러달라 했습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동천은 곧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뭐야, 그럼 이 몸께서 고작 그거 한 대 맞고 기절을 하셨다는 거야? 그런 거야?”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건 말도 안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건 사기라고!”

동천의 시끄러운 소리에 늘어지게 잠을 청하고 있던 중소구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그건 깨어난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그러니까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말고 너도 잠이나 자.”

무공을 익힌 자신이 여인에게 한 대 맞고 뻗었다는 사실이 창피했던지 동천은 의외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입이 다물어지면 자연히 그것을 대신하여 잡생각이 늘어날 것은 뻔한 이치. 쓸데없는 생각에 여념이 없던 그는 그 와중에 제대로 된 의문점 한가지를 건져냈다.

“저기요, 중 대인.”

“말해봐.”

동천은 재빨리 궁금한 점을 물었다.

“우리가 지금 내공을 제압당해 있는 거죠?”

그의 물음이 끝나자 중소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은 마치, 싸움의 승자가 세상의 낙오자를 내려보는 듯한 그러한 인상을 풍겼다. 한마디로 한심하게 쳐다본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기분이 더러워진 동천은 낙오자 신세를 면해보려는 듯 한쪽 눈을 크게 부라렸다. 그 여파로 얻어맞은 눈자위가 쑤셔왔지만 그는 인내력으로 버텼다.

“왜 그런 얼굴로 쳐다보죠?”

만일 상대가 중소구만 아니었어도 ‘왜 그따위 쌍판으로 쳐다보지?’라는 언어가 튀어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중소구는 이내 표정을 거두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본 대인이 어떻게 봤다고 또 그래. 잔소리 집어치우고 네 물음의 요지가 뭐지?”

동천은 내심 뭐라고 중얼거린 뒤 중소구의 뜻대로 함축하여 말했다.

“그러니까, 그 할멈이 우리의 몸에 수작을 부렸잖아요? 그렇다면 그 수법을 풀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이었어요.”

중소구는 바로 대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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