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62화
운명의 평행선 1.
민묘희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에 며칠 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백록활침액(百綠活浸液)이 달콤 씁쓸하다?”
다름이 아니라 동천이 느낀 그 맛 때문이었다. 다음날도 같은 맛이라고 하기에 미리 준비해간 소금이나 고추 등을 먹였더니 그 맛들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혹여 해서 그녀 자신이 백록활침액을 맛보았다가 헛구역질까지 했다. 동천 일행이 킥킥거렸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살짝(?) 건드려 주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요 며칠 동안 동천의 상황을 주시했다. 그래서 그녀가 내린 결론은 사람인 이상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대, 녀석의 신체가 그것에 맞게 맞춰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과히 기분 좋은 결론은 아니지만.”
결론이 이러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녀가 때린 상처와 붓기가 단 이틀 만에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처음 심법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깨달음의 경지가 높다해도 단 시일 안에 나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으며, 하는 행동으로 보아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놈 같지도 않았다. 그녀가 점한 혈도들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신체의 조화로서 절로 치유되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까워. 정말 아까워.”
처음 그녀는 중소구만 빼고 나머지 아이들은 일, 이년간 혼쭐을 내준 뒤(거기엔 동천의 치우도법을 알아내는 것도 존재한다) 돌려보내려고 했었다. 그런 계획 중에 중소구가 빠진 이유는 그가 그녀를 요녀라고 치부했기 때문이었다. 한 귀로 듣고 넘겨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색녀, 요녀, 미친년.’ 이 세 가지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고집 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가 동천이란 존재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으음…….”
침음을 삼킨 그녀는 방안을 서성이다 지하로 내려갔다. 동천이나 역마대원들이 갇힌 곳을 지나서 막다른 곳의 또 다른 철문에 다다른 그녀는 이례적으로 녹색 열쇠를 꺼내들었다. 중요한 곳인 듯 잠가놓았던 모양이다.
철컥!
내부의 잠금 쇠가 냉철하게 돌아갔고, 그 소리 또한 냉철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약간의 힘을 주어 철문을 열어 제쳤다. 동굴 내부는 언제나 서늘한 곳이었지만 철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냉기는 서늘함에 익숙해져있는 민묘희조차 순간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였다. 내력을 끌어올려 냉기로부터 몸을 보호한 그녀는 좌측 벽에 걸려있는 횃불을 떼어 손아귀에 쥐었다. 횃불의 타오르는 열기가 그녀의 얼굴을 다소 따스하게 해주었다.
안으로 지체없이 들어가자 어둠만이 존재했던, 아니 어둠과 냉랭한 한기만이 공존했던 그곳에 빛과 여인이라는 새로운 존재들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전방에 보이는 하나의 관. 그곳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의 아래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얇은 물 위를 밟은 듯 잘팍거렸던 것이다.
“설마!”
급히 신형을 날린 그녀는 투명한 수정으로 만든 관 뚜껑 위에 횃불을 비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음새 부분에서 연녹색 액체가 흘러나온 흔적이 역력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거늘!”
마음과는 달리 조심스레 관 뚜껑을 열어 제쳤다. 그녀는 액체 속에서 뿌옇게 보이는 물체의 한 부분을 들어 올렸다. 사람의 팔이었다. 액체와 마찬가지로 연녹색으로 물들어있던 팔은 잠시 시간이 지나자 점차 뿌옇게 변해갔다. 민묘희는 그제야 팔을 집어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실로 다행이로구나. 냉기를 머금은 것으로 보아 별 탈은 없어.”
공기와 접촉한 팔이 뿌옇게 변한 것은 연녹색 액체가 얼면서 서리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품속에서 푸른색 약병을 꺼내든 그녀는 약병과 마찬가지인 푸른색 분말을 관속에 쏟아부었다. 그것이 관속의 액체와 섞이자 치이익, 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하얀 증기를 뿜어냈다. 연녹색이었던 액체가 점차 파랗게 물들어 가는 것을 확인한 민묘희는 어느새 가라앉은 눈으로 관 뚜껑을 다시 덮었다.
“배합은 일정했거늘 어째서 넘친 것일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않은가.”
마지막 대사에서 몸을 부르르 떠는 것으로 보아, 관속의 실험체가 잘못되는 것보다는 잘못된 이후의 일을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신형을 돌려 밖으로 나선 그녀는 다시금 철문을 잠그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방 한쪽 구석의 작은 책장에서 곰팡이가 피어오른 오래된 책자를 꺼내들었다. 너덜너덜한 겉장에는 연구일지(硏究日誌)라는 제목이 쓰여져 있었다. 휘리릭, 넘겨 그 중간 정도를 살펴본 민묘희는 찾고자 하는 곳에서 멈추었다.
-강시 제조과정에 있어 여인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노리개로 사용하기 위한 가장 저차원적인 이유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활강시의 경우 음기가 강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양기가 강한 남성은 대법이 쉽게 깨져버린다. 그 때문에 남성체가 사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과연 남자 강시는 제조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음기가 강한 사내아이는 몇천 명에 하나 꼴로 태어나는데, 그 아이를 여성화시켜 잘만 키운다면 여성과 다를 바 없는 체질적 조건으로 키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자 강시는 여성체와 비교해 한 배 반 이상의 근력을 자랑했고, 같은 제조과정으로 만들어진 강시들이라 해도 무력(武力) 면에서 남성체가 여성체를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제조과정에 있어, 여성체보다 두 배 이상의 까다로움을 요하기에 신중에 신중함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중략- 첫 번째는 실패했다. 음기가 강하긴 했지만 정신적인 면이 너무도 강해 그 의지로서 대법을 깨트린 것이다. 이지(理智)를 상실케 하고 제조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아둔한 강시가 되어버리기에 폐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폐기해야 한다. 그러한 강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니까.
-그러나…, 너무도 아깝지 않은가. 실험체는 수백 년에 하나 꼴로 태어난다는 음성만기지체(陰性滿氣肢體)인 것이다. 오직 음기를 바탕으로서 신체적 기운을 흡수한다는 그러한 천고신체. 더군다나 남성이 그런 신체를 타고났으니 무림 최초 남자 불사강시의 탄생도 꿈이 아닌…….
민묘희는 찾던 부분인 줄 알았는데 그곳이 아니자, 다시금 종이를 휘날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손을 멈춘 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벌써 여섯 번째이다. 본 문에서 들여온 온갖 서적들을 탐독했음에도 실험체가 대법을 깨트리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시일이 늦춰진다고는 하지만 걸어 다니는 불완전체인 것이다. 정녕 이 실험체는 포기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이지를 파괴한다면 초혼강시의 두 배 이상은 될 수 있다. 거기에 본문의 비전 제조방법인 독인지체(毒人肢體)로 만들어버린다면 더욱더 강한 강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책의 뒷장이 충분히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안의 내용은 거기에서 끝나있었다. 빈 공백을 뛰어넘어 스무 장 정도를 제쳐버리자 이제까지와 다른 그러한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흥분된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런 간단한 조건을 받아들일 줄이야. 고작 그러한 조건을 이행해주면 술법의 제약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니……. 아홉 번째의 실패로 포기하려는 찰나 정신을 차린 실험체가, 아니 운성현(隕星現)이라는 아이가 분명 그렇게 허락했다. 허허, 참으로 얄궂도다. 전설의 불사강시가 실현될 수 있는 이 시기에 ‘그’가 나타나다니. 그 시기가 바로 눈앞에 왔거늘, 하늘은 정녕 우리 만독문을 버리려는 것인가?
필체가 점차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이 글의 장본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그는 본좌의 실험을 간파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본좌의 앞에 서있기도 했다. 그는 약조했다. 본좌가 쓰러져도 이 연구일지는 남겨놓겠노라고. 이 장소의 모든 물건들 또한 건드리지 않고 남겨놓겠노라고. 훗, 이것은 유언장인 셈인가? 불사강시로 만들 수 있는데도, 그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그가 있어 이 연구일지에 적지 못하는 이 회한과 분노는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그나마 단 하나의 희망은 본좌가 그를 이겨야 하는 것이지만 자신은 없다. 그가 이 글을 확인할 것임은 자명하지만 치욕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와 손속을 겨룬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영광이라 여겨지니까.
-그는 자신의 신분을 이곳에 적어두는 것을 꺼려했다. 그리고 실험체 운성현은 지하의 끝 방에 얼려놓았다. 연혼수(淵魂水)로 잠재운 관속에 만년설빙수(萬年雪氷水)를 담가두었으니 상극인 진천염화수(震天炎火水)를 뿌리지 않는 한 손상 없이 깨우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그가 운성현을 파괴시키려 해도 이곳의 모든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얼려버린 관속의 운성현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하하, 이 글을 읽을 때 일그러지는 그의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차선책이 있다면 500년 후 저절로 녹을 때뿐이지만……. 후후, 이제 늘어놔 봐야 잡설이 될 뿐이니 이 글은 여기에서 끝마친다.
-만독문 제 14대 문주 관성(瓘晟).
민묘희는 다 읽고 난 뒤에 제일 끝장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심하게 휘갈겨 쓴 단 한 줄의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한 움큼의 핏자국까지도.
-대단하구나! 실로 대단하구나, 천(天)…… 비(飛)…….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쓰여진 바람에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조용히 책을 덮었다.
“42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500년의 제약은 10년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13년 후 그 제약이 풀렸다. 비록, 3년의 초조한 기다림이 머리칼을 손상시켰지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쾅!
애꿎은 탁자를 내려친 그녀는 분노에 찬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500년 후에 깨어난 실험체가 이지를 상실해있는 상태라니!”
바보라도 사람의 말은 알아듣는다. 다만 인식과 표현에 있어 보통 사람과 다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지를 상실한 자는 바보보다 못하다. 그런 사람은 상대가 뭐라고 하는지도 못 알아듣는 것이다. 대충 예를 들면 이렇다. 갑(甲)이라는 사람이 을(乙)이라는 바보에게 맛있는 떡을 들이밀면 을이라는 바보는 ‘헤에, 그거 나 줘.’ 정도의 표현력이라도 발휘할 텐데, 갑이라는 사람이 이지를 상실한 병(丙)이라는 사람에게 떡을 들이밀면 ‘…….’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주인과의 심령의사소통이 원활한 강시라 해도 이지를 상실한 자로 만들게 되면 주인 된 자의 입장에서는 강시에게 영향력을 줄 만큼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하고(정신력의 집중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명령조차 내리기 힘들게 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강시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그 정신력이 요하는 부분은, 이지가 상실된 불사강시에 이르러 최고 수십 배에 다다를 것이라 추측되니 이는 불가능하다 말할 수 있었다.
아무리 불사강시와 맞먹는다해도 사소한 명령조차 이행하기 힘들어하는 강시를 그 누가 만들려고 나서겠는가. 그녀는 연구일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과거 선대 문주님의 여섯 번째 연구가 끝나고 빈 공백을 뛰어넘어 기록된 바에 이르면 아홉 번째까지 실험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분은 불사강시의 제조과정에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그’라는 자가 나타났던 대목에서 ‘불사강시에 근접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라고 말하지 않고, ‘불사강시가 실현될 수 있는 이 시기에’라고 쓰여진 것으로 보아 틀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간 부분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그것이 이상하구나. 분명 제시된 바에 이르면 이곳의 물건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거늘 그가 약조를 어기고 중요한 중간 부분을 지우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하실의 실험체는 어째서 놔두었던 것일까? 앞뒤가 안 맞지 않은가.”
주먹을 으스러지게 말아 쥐자 손바닥이 아렸다. 흥분이 가신 지금에야 살펴보니 동상에라도 걸린 듯 시퍼렇게 변해있었다. 아까 전 실험체를 만졌던 것이 원인인 듯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걱정할 문제는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후우, 침술을 사용하여 이지를 회복시키고는 있지만 깨어날 거라 예상한 기일에 비해 지금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는 재료가 불충분한 상태이니…….”
그렇게 그녀는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쏴아아….
한 줄기 소낙비가 쏟아져 내렸다. 봄의 물결이 흐르는 가운데, 여름이라는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민묘희는 동굴 밖의 소낙비를 가만히 응시하다 기세가 한풀 꺾이는 시점에서 신형을 돌렸다. 동굴의 입구는 비가 스며들지 않는 방향으로 뚫려있었지만 비바람의 심술로 인해 추적추적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젖어있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상태였다. 알게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손을 움직여 하얀 백발을 어깨 너머로 쓸어 내렸다. 안쪽의 통로 한구석이 밝았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눈여겨보니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찌푸리고 있던 그 상태 그대로의 얼굴로 생각했다.
‘기름이 떨어졌나 보군. 하긴, 예전에 사온 것에 비해 오랫동안 써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통로의 몇몇 군데가 기름이 떨어진 것과는 달리,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기름을 담뿍 머금은 횃불들이 중앙 통로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햇살이 비추지 않는 이곳은 횃불 없이는 단 한시도 생활하기 불편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인정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공간을 거닐자 그녀의 가벼운 발소리조차 몇 배 이상의 파장을 내뿜어냈다. 그런 그녀가 멈춘 것은 중앙 통로가 거의 끝나는 부분에서였다.
“하는 수 없이 아랫마을로 내려가 기름을 사와야 하는가?”
표정을 보아하니 그다지 내키지 않은 얼굴이었다. 평소의 얼굴 표정이 어떠한지는 몰라도 지금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러했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그녀는 난데없이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들려오자 신형을 뚝 멈추었다. 민묘희는 동굴 밖을 주시했다. 어찌 보면 멍청히 서있는 듯한 자세로 반각 여를 미동조차 않고 서 있었다. 또 한 번의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의 아미가 확연하게 찌푸려졌다.
“또 사람이로군. 그 사이에 진법 하나를 통과하고 두 번째 진법으로 진입하다니…, 방울 소리의 간격으로 보아 고수가 분명하구나.”
그녀는 흥미가 동했다기보다는 귀찮아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소낙비가 그쳐 가는 동굴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
소연은 눈앞에 펼쳐진 전경(前景)을 바라보다 급히 고개를 돌려 조정광에게 사과를 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수를 했어요.”
조정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때마침 걸리적거리는 참이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이러한 진법은 다른 길로 유도하는 진법과는 달리, 한번 갇히면 그 생문(生門)을 알지 못하는 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아주 위험한 것이란다. 차라리 없애버리는 편이 좋은 것이야.”
소연과 마찬가지로 잠시 멍청하게 서있었던 사주문은 진법을 아예 날려버린 조정광의 행동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정말 이러셔도 됩니까? 이곳의 주인이 이유가 있어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며칠 가둬놓고 겁을 주다 풀어준다거나 뭐 그런 거 말입니다.”
“그런가?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그럼 이걸 어쩐다?”
사주문은 조정광 모르게 혀를 찼다.
‘어쩌긴 뭘 어째. 상대가 너그럽기만을 바라면 되는 거지. 자기 사질을 데려왔는데 설마하니 위해를 가하기야 하겠어?’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드러난 결과는 조금 다를 듯싶었다.
“웬 불청객들이냐!”
우산을 들고 선 민묘희는 그렇게 싸늘히 물었다. 일 갑자를 상회하는 사주문조차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실로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사주문의 잡생각과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한몫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 차치하더라도 민소희의 얼굴을 보았던 사주문은 동생인 민묘희가 예상외로 젊자(예쁘자) 믿을 수 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의 조악한 무림 지식에는 주안술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와, 댁이 정말로 그 민묘희요?”
민묘희는 몸을 굳히며 무서운 눈초리로 사주문을 노려보았다.
“네가 누구기에 감히 그것을 아느냐.”
사주문은 두 손을 들어 뒤로 한발 물러섰다.
“왜 그렇게 딱딱하오? 이런 험한 곳까지 댁의 사질을 데려와 줬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어휴, 그런데 여기는 웬 놈의 잡것들이 많은 거요? 먹을 만한 건 독사밖에 없데?”
민묘희는 자연스레 소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질?”
뭔 소리냐는 뜻이었다. 그녀의 기도가 너무도 강해 우물쭈물 대던 소연은 조정광이 살며시 등을 밀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서 조그마한 입술을 뗐다.
“저, 저기…. 민묘(旼苗)자 희(希)자 되십니까?”
민묘희는 여전히 싸늘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렇다.”
“그럼, 제 사부님이신 민소(旼少)자 희(希)자 되시는 분과는…….”
민묘희가 미간을 모았다.
“사부? 언니가 네 사부라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연의 신형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절을 하려는 것이다.
“아아, 드디어 사고(師姑)님을 뵙습니다. 소녀 소연이라고 합니다.”
“…….”
당혹스러움에 말없이 소연을 응시하기만 하던 민묘희는 확신할 수 없는 상대에게 그 증거를 원했다.
“언니의 제자라면 그에 합당한 지식을 습득했을 터.”
붉어진 눈시울로 민묘희를 올려다본 소연은 훌쩍거렸다.
“무, 물론입니다. 사부님께…, 며,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흑흑!”
민묘희는 눈앞의 아이가 언니의 제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감이라는 것으로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어째서 저렇게 질질 짜느냐 하는 것이었다.
‘언니가 저렇게 심약한 아이를 제자로 맞이하다니, 참으로 이상하구나. 몇십 년 사이에 성격이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윗분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맞아들인 형식적인 제자?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야 본문과 인연을 끊은 지 어언 42년이 넘어서 잘 모르겠지만 언니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그러한 쪽이 분명하겠구나. 한데, 갑자기 이 아이를 내게 보내다니. 무슨 이유에서일까? 더군다나 저 범상치 않은 기도의 중년인은…….’
민묘희가 내심 사주문이란 인간은 무시하고 있을 때 자세를 잡은 소연이 손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폼은 안정되어있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상체가 들썩거렸고, 빗물 반 눈물 반으로 뒤범벅인 그녀의 얼굴은 그다지(상당히)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민묘희가 고개를 내저을까.
“됐다, 자세를 보니 기본기는 잡혀있는 듯하구나. 자세한 것은 나중에 따로 볼 것이니 간단하게 지금 시전 하려고 했던 무공의 초식명만 외워보거라.”
“예에, 훌쩍. 제, 제가 지금 시전 하려 했던 무공은요. 다, 단금영엽(短禁影葉)이라는 금나술이고요. 흑흑, 훌쩍! 그, 그리고 일초식은 연운삼수(然雲三手). 이, 이 초식은……. 엉엉, 사부님!”
소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쪼그려 앉아 대성통곡을 하자 민묘희는 ‘그게 그렇게 울 만한 일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귀찮아진 그녀는 재빨리 일을 해결하고자 그만 하라고 명했다.
“됐다, 그것도 나중에 따로 묻겠으니 울음부터 그치거라.”
“아, 알겠습니다. 훌쩍, 훌쩍.”
한심하다는 얼굴로 소연을 바라본 민묘희는 화정이를 업고 있는 조정광에게 관심을 돌렸다.
“보아하니 이 아이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은데 맞는가?”
사주문은 예의 상 버럭 화를 내주었다.
“어허, 참으로 버릇없는 행동이구나! 반반한 계집이 감히 어르신에게 하대를 하다니!”
실로 어이가 없어진 민묘희는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을 치켜들었다. 따귀를 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에 맞추어 조정광이 나섰다.
“허허, 이 사람아. 이 여인께서 겉은 이렇지만 사실은 훨씬 나이를 드신 분이라네. 머리칼은 초조함 내지 충격으로 변해버린 듯하지만 적어도 육십에서 구십 안팎일 걸세.”
“예에? 저, 저렇게 젊은 뎁쇼?”
“주안술(駐顔術)이라는 것이라네.”
신기한 듯 민묘희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사주문은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쩝, 나중에 내 마누라도 저런 주안술을 익힌다면 얼마나 좋을까.”
민묘희도 여자인 이상 젊게 보아주는 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다소 풀어진 마음으로 조정광을 주시했다. 어서 자신의 질문에 답해보라는 눈초리로. 조정광은 그녀의 마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도움을 주었을 따름입니다. 자세한 것은 여기 소연에게 들으시지요. 허허, 진법을 망가트린 것은 실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진법에 사기(邪氣)가 깃든 것 같아 파괴하였으니 다시 진법을 세우고자 하신다면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화를 낼 사이도 없이 축 늘어진 화정이를 건네주었다. 받기를 거부한 민묘희는 당연히 묻기부터 하였다.
“이 아이는 또 뭐지?”
울음을 멈춘 소연은 훌쩍이는 어조로 급히 말했다.
“화, 화정이예요! 제, 제…. 어쨌든 같이 있어야 해요!”
그녀는 자기 것이라고 말하려다 너무 물건을 취급하는 것 같아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는 수 없이 우산을 내려놓고 화정이를 받아든 민묘희는 생각 외로 화정이가 묵직하자 옷에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줄 알았다.
“상태가 왜 이런 거지? 아냐, 아냐. 지금의 상황으로는 귀찮아. 볼일들이 없으면 이제 이곳에서 나가거라. 본녀는 외부인의 입곡을 불가 한다.”
“쳇, 되게 으스대네.”
민묘희는 사주문을 홱 돌아보았다. 찔끔한 사주문은 슬며시 눈길을 피하며 꼬리를 내렸다. 조정광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물기에 젖은 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할 것 같구나.”
그 말에 겨우 울음을 멈추었던 소연이 다시금 눈물을 보였다.
“흑,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실, 사실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는 절대로 무리였을 거예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때 민묘희가 재촉했다.
“거기에서 그러고 싶다면 상관 않겠다. 그러나 그 이후는 책임지지 않겠다.”
그렇게 신형을 돌려 성큼성큼 돌아가자 급히 사주문에게도 인사를 올린 소연은 크게 한번 콧물을 들이키고 총총걸음으로 민묘희를 따라갔다. 아쉬운 마음에 두어 번 더 뒤돌아본 그녀는 그때마다 손을 흔들어주는 사주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상 그러한 것을 보자 헤어질 당시 몇 마디 건네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죄송스러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사 아저씨!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사주문은 좋아라 방방 뜨며 두 손을 들어 흔들어주다 그녀의 모습이 우중충한 숲속으로 사라지자 힘없이 손을 내렸다.
“아아, 갔구나. 기왕이면 예쁜 마누라 얻어서 행복하게 살라고 좀 말해주지.”
조정광은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해주었다.
“자넨 분명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일세. 그러니 용기를 내게.”
“그, 그렇겠죠? 하하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정광과 함께 있는 한 어림도 없을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거기에 그 실눈까지 끼어든다면…….
부르르르!
“응? 왜 갑자기 몸을 떠는가?”
사주문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비도 내리고 하도 을씨년스럽다 보니 절로 몸이 반응했나 봅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정광은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앞서 길을 열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그나저나 정인이는 잘 있는 지 모르겠군. 빨리 찾아야 할 텐데 말야.”
사주문은 그런 조정광을 뒤따라가며 조심스레(?) 눈알을 부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