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69화
그 시각 수련은 분주하게 나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른 차를 대접하고…, 아차차! 더 좋은 차가 있었지? 히잉, 어쩌지? 버리고 다시 내갈까?”
그 소리는 어떻게 들었는지(듣고 싶지 않아도 들렸다) 사정화가 말했다.
“그냥 가져오너라.”
급히 자신의 입을 가린 수련은 아가씨의 말을 따라 지금의 차로 내갔다.
“저어, 주인 어르신. 맛있게 드세요.”
사비혼은 수련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듯 보이자 미약하게나마 웃어주었다.
“그래, 척 보아도 맛있겠구나.”
단순했던 수련은 금세 긴장을 풀고 한마디 해주었다.
“그리고요, 식사도 거르지 말고 제때에 드세요. 그래야 몸이 상하지 않거든요.”
“허허, 알겠다.”
“혹시 입맛이 없으시면 제가 음식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리고 또…….”
사정화가 눈치 없는 수다쟁이를 조용히 불렀다.
“수련아.”
“예, 아가씨.”
찔끔한 수련은 조용히 물러났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어색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서로들 생각만큼 말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다.
“화아야.”
그래도 아비라고 사비혼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던 사정화는 보이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지극히 차가운 음성인지라 사비혼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그러나 곧 얼굴을 풀었다.
“눈을 떠보거라.”
“보기 흉합니다.”
그녀가 거부하자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사정화에게 물었다.
“네 천마삼해(天魔三海)의 성취는 어느 정도 되느냐.”
사정화는 바로 대답했다.
“반년 전부터 시작했기에 이성(二成)이 고작입니다.”
“다행이로구나.”
순간 사정화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면 아니지, 절대 다행이라는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얼음장처럼 더욱 차가워졌다.
“어째서 다행인지요.”
사비혼은 딸아이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별다른 표정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이 아비는 천마삼해를 얻어 그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제일 떨어진다는 천마삼해가 본가의 무공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짐이 없음에 실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천마님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말이다.”
그는 생각의 정리를 위해 잠시 쉬었다 입을 열었다.
“처음 폐관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우선 천마님의 무공을 익혀보자는 일념밖에 없었단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 ‘과연 지금부터 천마삼해를 익힌다 해도 이 아비가 평생을 바쳤던 본가의 무공만큼 실력을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정화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렇구나. 근본이 다른 이상 득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미비하겠어.’
생각에 잠긴 그녀의 귓가에 다시금 사비혼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생소한 무공을 시작한다는 것은 위력 여부를 떠나 모험을 거는 것이라 할 수 있단다. 물론, 천마님의 무공이라면 모험을 걸어 볼 만하지. 하지만 이 아비의 나이 정도라면 얘기가 다르다. 새로운 심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신법이나 지법, 권법을 익히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다져온 것을 더욱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옳은 선택인 것이다.”
“잘 알겠어요. 그래서요?”
여전히 차가운 딸아이의 태도에 사비혼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자신이 가정에만 소홀하지 않았어도 결단코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런 변명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지금의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이 아비는 생각을 바꾸었단다. 천마님의 심법을 버리고, 대신 나머지 무공들을 본가의 심법에 맞게 재편성시키기로 말이다.”
번쩍!
놀란 사정화가 눈을 뜨자 그녀의 눈에서는 푸른 광망이 터져 나왔다. 천마의 무공을 익혔다는 일종의 증거인 셈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 끼치게 만들었지만 사비혼에게 만큼은 아니었다.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오히려 놀란 것은 사정화였다.
“아버님, 그 모습이…….”
그녀는 고목을 연상케 할 만큼 말라버린 아버지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사비혼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네가 다 놀랄 때도 있구나. 걱정 말거라. 일종의 상벌(賞罰)을 받은 것이니까.”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과 벌을 같이 받았다고요?”
딸아이의 차가움이 어느 정도 가셔 보이자 그는 절로 흐뭇해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 천마님의 무공을 건드렸으니 그 과정에서 이렇게 마른 것이고, 살이 빠지게 된 대가로 원하고자 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것을 두고 상벌을 같이 받았다고 말한 것이란다.”
천성적으로 무공광이었던 사정화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삼류 무공도 아니고 천마의 무공을 수라마가의 심법에 맞게 뜯어고쳤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본가의 무공으로 바뀌었어도 위력적인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주화입마에 만큼은 걸릴 위험이 없단다. 모자란 부분은 차차 보완해나가면 될 것이고.”
사정화는 저 정도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거의 완벽하게 고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하지 않은 일에는 비관적으로 들려주는 성격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허면, 이제까지 성취한 천마심법은 버려야겠군요.”
사비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깝긴 하지만 다른 여타의 심법도 아니고, 그 고유성이 강한 천마님의 심법이니 나중에 후환이 없으려면 깡그리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의외로 사정화는 애써 키운 내공심법에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답 후에 눈을 감자 방안을 감돌던 마기들은 수그러들었다. 때를 맞춰 하나의 책을 꺼내든 사비혼은 딸아이의 손에 그것을 쥐여주었다. 사정화는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지자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책과 함께 천천히 손을 빼냈다. 사비혼은 조용히 말했다.
“구결만 확실히 외운다면 헷갈리는 일은 없을 것이니, 보고 난 뒤에 소각시켜버리거라. 나중에 기억이 희미해지거든 천마삼해의 부본을 보고 참고하면 될 것이다.”
“예, 아버님.”
그 후로 딸아이와 몇 마디를 나눈 사비혼은 수련이 내온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그의 처소로 되돌아갔다. 오랜만에 들어간 그의 방은 폐관수련에 들어갔을 때와 전혀 달라진 부분이 없어 보였다. 감히 누가 있어 부교주의 물건들을 옮겨놓을 수 있겠는가. 수련이라면 모를까.
“게 누구 없느냐.”
예쁘장한 시녀가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시키실 일이라도….”
사비혼은 그녀에게 명했다.
“가서 약왕전의 전주에게 이렇게 말하거라. 오늘은 좀 피곤하니 내일로 미루겠다고.”
시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만 전해드리면 됩니까?”
“그렇다.”
“그럼,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시녀가 물러가고 다시 혼자만 있게 되자 정말로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사혼대의 첫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혼.』
일혼도 역시 전음으로 회답해왔다.
『부르셨습니까.』
『으음, 오늘만큼은 자네들도 쉬게나. 본좌가 폐관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이고 하니, 밖의 보초들도 정신을 놓지 않을 걸세.』
『말씀 감사합니다. 허나, 제 아우들과 교대로 순번을 서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습니다. 심려 놓으시지요.』
사비혼은 꺾일 고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알겠네. 자네들이 있어 항상 든든하군.』
일혼은 황송하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새삼스레 그런 말씀을…….』
사비혼은 빙긋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폐관수련 내내 항상 따라다녔던 심적인 고통이 이제는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단 1할의 가능성을 보고 천마의 무공을 수정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이용해 직접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가 주화입마에 직결되는 시간이었다. 몸은 말라가고 정신은 황폐해져갔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가 딸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바로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기에, 그렇기에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는 피 말리는 4년간의 성과를 그의 딸아이에게 선물해주었다. 비록 그 아이가 어떻게 받아주었는지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그간의 짐들을 어느 정도 덜어낸 듯한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 이상 그 무슨 욕심을 바라랴.”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숙면(熟眠)을 취했다.
다음날 정오,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불러모은 사비혼은 표면적인 출관 축하연을 끝내고 조용히 역천만을 불렀다.
“헤헤,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여준 사비혼은 역천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못 다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어제 못 다했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렇게 자네만을 따로 불렀네.”
역천은 짐작하고 있었던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을 봐서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그래, 본교가 만독문과 틀어진 것에 대해 걸리는 것이 있다고?”
“예, 부교주님.”
사비혼은 자세를 약간 젖히며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관해 자세히 말해보시게. 어디가 어떻게 걸리는지.”
잠시 목을 가다듬은 역천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실 만독문의 견제에 있어서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보더라도 저희를 추종하는 절강성 문파 중 하나를 섬멸시킴으로써 일의 발단이 일어났지만 먼저 도발을 한쪽은 만독문이 아니었습니다. 철갑문(鐵甲門)이라는 이름만 그럴싸한 소문파의 문주 녀석이 술자리에서 망언을 했는데 만독문에서 사과를 요구하자 우리에게는 암흑마교가 있다며 배 째라는 식으로 끝까지 버텼다가 만독문에서 쓸어버린 것이었다 합니다.”
사비혼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의 잡설이었기에 공공연히 뒷배경을 떠들었는데도 멸문시켰단 말인가.”
“황송하게도 현 만독문의 문주를 깎아내렸답니다.”
그제야 사비혼이 납득을 했다.
“그 정도였다면 이쪽에서는 반박할 여지가 없겠군. 본교의 세력권에서 너무도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상대의 문파도 녹록지 않은 곳이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가지고 교주께서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아갔단 말인가?”
“그 정도라면 명분이 약하겠지요. 헌데 사태를 무마시키러 만독문으로 보낸 밀사들이 가는 족족 독수에 당해 죽어버리는지라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사비혼은 움푹 꺼진 눈을 날카롭게 굴렸다.
“흐음, 당연히 만독문의 수법으로 당했겠지.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까.”
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만독문 쪽에서는 감히 밀사까지 죽일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반박했지만 분노하신 교주께서는 기다렸다는 듯 절강성에 분타를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비혼은 눈을 번뜩였다.
“기다렸다는 듯?”
역천은 가는 미소를 짓고 답했다.
“예, 이제와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사실 만독문주 항광은 30여 년이 넘게 본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응? 무슨 소리인가.”
사비혼이 놀라자 역천은 그때의 일들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자신의 제자가 어떻게 그를 만났으며 그를 통해 알아낸 것들, 그리고 독살단묘 부부가 스스로 진 속에 갇혀 숨어 지내야 했던 일까지 말이다.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사비혼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렸을까.
“허허, 속아 머물게 된 항광의 처지도 처지였지만 교주의 이목을 속이고 몸을 사리고 있었던 독살단묘 부부 또한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그들 부부의 충성심은 제가 다 숙연해질 정도였습니다.”
“으음, 헌데 동천이라고 했던가?”
역천은 약간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었다.
“예? 아, 예. 부교주님께서 데려오신 그 아이입니다. 헤헤, 아가씨께 떼를 써서 제가 제자 놈으로 맞아들였죠.”
사비혼은 자신이 데려온 아이가 만독문의 일과 깊이 관계되어 있자 묘한 감흥이 일었다.
“내 그 아이를 좀 보고 싶군.”
순간 역천이 뜨끔한 표정을 저었다. 가출한 놈이 이곳에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역마대가 마지막에 보내준 서찰에 의하면 새로운 경이적인 무공도 익히고 있고 어쩌고저쩌고 나와 있긴 하지만 허락도 없이 뛰쳐나간 것은 엄연히 가출이었다.
‘그렇다고 사부된 입장에서 제자 놈을 깎아내릴 수도 없으니……. 아아, 그러고 보면 난 참으로 너그러운 사부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깜짝 놀란 역천은 멋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은 제 제자 놈에게 강호행을 시켰기에 잘 지내고 있나 해서 잠시…. 헤헤.”
사비혼은 자못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강호행? 그 아이의 나이가 지금 몇이기에 강호행인가.”
“에, 그러니까. 에에. 에에에…….”
말꼬리가 길어질수록 역천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늘어갔다. 그리고 역천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걔가 몇 살이었지?’
당황하여 상체를 약간 틀고 손가락을 세어보던 그는 갑자기 밝아진 얼굴로 자신 있게 말했다.
“푸헤헤! 올해로 열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