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7화
꽈악, 쥐고 있는 손에선 땀이 맺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부릅뜬 눈은 굳어버렸는지 감길 생각도 안 했다.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우수한 정신력으로 그런데로 참을 만했다. 기절한 자식은 개거품을 물고 자빠졌지만 가슴에 기복이 있는 게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안 죽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옆의 중늙은이는(중간쯤 늙은 자식의 줄임말.) 자신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을 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럴 때 자신이 멋있는 말로 데려가라고 한다면 좋겠지만, 요놈의 망할 놈의 입은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뭔가 전환(轉換)의 계기가 필요하다.
이럴 때 나는 그분을 불러본다…
-하늘님!
어린 새끼가 주먹을 꽉! 쥐고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친구는 기절을 해서 눈동자가 돌아갔는데 저 새끼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것 같았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온몸을 부르르르.. 떨고 있었다. 애써 화를 참는 모습이었다. 이럴 때는 그저 쥐죽은 듯이 애새끼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가는 눈앞의 내 친구 꼴이 될지도 몰랐다. 비겁하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죽고 싶은 생각이 없다.
희미한 기억 속에 어머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네 팔자는 개 팔자여..
“어..? 갑자기 맑던 날씨가 흐려지려고 하네? 비가 오기 전에 빨래를 걷어야 하는데.. 까먹었네? 에휴, 꽤 와서 되돌아가기도 귀찮고…”
사정화의 심부름으로 길을 나섰던, 수련은 빨래 걷기를 잊었다는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얼른 갔다 와서 걷어야겠다는 마음에 걸음을 빨리 재촉해서 걸었다.
“빨리 가야겠다. 그나저나 귀옹이 할아버지가 계실는지 모르겠네? 뭐, 안 계셔도 상관은 없지만.. 안 본 지 좀 오래돼서 보고 싶은데 계시려나?”
수련은 못 본 지 일 년이 넘는 혈귀옹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종종걸음에서 뜀박질로 달려갔다.
“어휴.. 바쁘다 바빠. 경공술을 배우면 빨리 갈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이제는 무공을 배울 거니까 괜찮겠지 뭐.”
한참도 아니고, 조금 달리다가 육체의 한계를 느낀 수련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시 숨을 돌렸다.
“휴우.. 힘들다. 역시 달리는 것은 힘들어. 휘유.. 빨래 걷기는 포기하고, 그냥 느긋하게 걸어가야겠다.”
수련의 성격이 다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잠시 숨을 돌렸던 수련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는데 길 모퉁이를 돌자 세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자기 또래인 것 같은데 돌아보고 있어서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고, 두 명은 아저씨들이었는데 한 명은 자빠져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불안한 눈초리로 꼬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함을 느낀 수련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다가가자, 그 사내가 자신의 존재를 느꼈는지 자신을 쳐다봤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꼬마가 자신의 존재를 느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신을 쳐다봤다. 그제서야 수련은 꼬마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동천?”
동천은 몸이 굳은 채 두 사내를 번갈아 보고 있을 때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음.. 뒤에 누가 오는 것 같은데.. 고개가 안 돌아가네?’
자신이 머리가 안 돌아가자, 눈알을 돌렸더니 그제서야 앞의 멀쩡한 자식도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그 사내가 뒷 편의 누군가를 보는 순간 동천의 고개도 무의식적으로 돌아갔다.
“어? 수련 아냐? 네가 여기 왜 있냐?”
수련을 본 순간 여태까지 동천의 마음을 옥죄고 있던,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돌덩이같이 굳어있던 몸이 가뿐하게 움직였다.
“동천.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역천 할아버지하고, 같이 산에 올라간 게 아니었어?”
수련이 궁금해하던 말든, 동천은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는 것에 대해 진짜로 수련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감사의 표시를 해줄까.. 하다가 예전에 강표두 아저씨가 자신을 도와준 친구에게 감사의 표현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생각이 난 동천은 얼른 실행에 옮겼다.
“수련아, 정말 고맙다.”
“꺄-악!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짝-!
수련은 동천이 갑자기 자신을 꼬옥! 껴안자 기겁을 한 나머지 동천을 밀쳐놓고는 동천의 얼굴을 있는 힘껏 때렸다. 따귀를 맞은 동천은 황당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아야! 이 계집애가.. 왜 때려?”
감사의 표현을 한 동천은 볼이 화끈거리자 어이가 없었다. 수련은 그런 동천이 분한지 화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왜 때려? 야, 너 맞을래? 어딜 안아? 내가 만만해 보여?”
-응.
동천의 당당한 말에 수련은 동천이 무지 얄미워 보였다. 순간적으로 수련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들이… 특히, 어린 여자애들이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으레 하는 행동이 있었다.
“너어.. 너어.. 흑.. 으앙!! 아가씨께 이를 거야..!”
“뭐? 아가씨께 이른다고? 야, 내가 잘못했어.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나는 그저 감사의 표현을 한 죄밖에 없다구. 정말이야! 울지 마.”
동천은 수련이 사정화에게 이른다고 하자 기겁을 하고는 재빨리 수련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또 맞기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련의 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으아앙.. 몰라. 너, 무조건 아가씨께 이를 거야.. 잉잉…!”
계집애가 완전히 무대포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수련의 울음을 그치게 할까 고심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야, 울지 마. 너같이 착한 애가 울면은 내 마음도 슬퍼지잖아.”
착한 애라는 말에 수련은 울음을 어느 정도 그치더니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동천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수련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으아앙! 흑흑.. 몰라. 몰라. 아가씨께 이를 거야!”
동천은 착하다는 말에 잠시 혹하는 수련의 모습을 보고, 더 그럴싸한 말이 없을까 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동천은 계속 수련을 달래고 있었지만 허사였다. 계속 달래도 소용이 없자, 속으로 이 계집애가 지금 작정을 하고, 땡깡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으휴, 내가 정화한테 이른다고 하지만 않았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하여튼, 저 계집애.. 눈물을 아예 명주실 뽑듯이 쏟아내네? 햐.. 그러고 보니 신기한데? 나중에 가르쳐달라고 해볼까?’
공상(空想)의 대가인 동천은 징징짜는 수련을 말릴 생각은 않고, 쓸데없는 걸 배울 생각만 했다. 만약에 수련의 코에서 하얀 콧물이 흘러내리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잉잉.. 이를 거.. 흑! 이를 거야..”
“수련아, 그만 울어. 네가 계속 우니까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아.”
이 말의 효과는 놀라웠다. 그렇게 징징 짜던 수련이 울음을 뚝! 그쳤던 것이다.
“정말..?”
“응? 뭐가?”
동천이 모르는 듯하자 수련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다시 눈물을 쏟아낼 준비를 했다.
“흑.. 역시. 거짓말이지? 으으..”
수련이 울려고 하자, 동천은 수련이 원하는 말이 뭔지를 급히 생각했다.
‘뭐지? 뭐가 “정말..?”이라는 거지? 그만 울라는 게? 얼굴이 망가진다는 게? 아니면, 예쁘다는 게? 응? 예쁘다고? 아무래도 이 말 같은데? 으으.. 닭살 돋아. 아무리 거짓말이라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다.’
“아냐. 아냐. 정말 예뻐. 아까 내가 잠깐 말을 못했던 거는 네가 너무 노골적으로 물어보니까, 좀 당황해서 그랬던 거야. 너도 그렇지 네가 예쁘냐고 그렇게 대뜸 물어보는 게 어디 있냐?”
그제서야 수련이 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리고 언제 울었냐는 듯 옷 소매로 얼굴을 닦더니(콧물은 들이켰다. 으.. 더러.) 내 말에 얼굴을 붉히고는 수줍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동천. 너무 그러지 마. 내가 일부러 그렇게 물어본 게 아니고, 음.. 음..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내가 울다가 잘, 못 들어서 다시 확인할려고 물어본 것뿐이야.”
“그래. 알았어. 그리고, 아까는 진짜로 고마워서 그랬던 거니까 네가 이해하리라 믿어.”
동천의 말에 수련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흥. 웃기지 마. 감사의 표시로 여자를 껴안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나나 되니까 봐준 거지. 그런 행동은 연인(戀人)이나, 부부지간이 아니면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구.”
수련이 뭐라고 나불거리든, 동천은 언제 또 수련이 울어버릴지 몰랐기 때문에, 다른 말로 지금 상황을 잊어버리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어쨌든, 너 여긴 왜 왔냐?”
수련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했다.
“아? 맞다. 빨랑 귀옹이 할아버지 가봐야 하는데. 아가씨의 심부름으로 만검전(萬劍專)에 가서 목도 둘하고, 검 한 자루를 받아 가지고, 집에 돌아가야 하거든.”
동천은 수련이 귀옹이 할아버지라고 말을 했을 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지만 자기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갔다.
“목도(木刀)하고 검(劍)? 그건 왜?”
수련은 동천이 궁금해하자 의기양양(意氣揚揚)한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동천의 얼굴에 들이밀면서 말했다.
“후후.. 놀라지 마. 왜냐하면, 아가씨가 나를 가르쳐주신다고 하시면서, 그런 심부름을 시키셨어. 아마도 내가 쓸 검하고 관련된 게 틀림없다고.”
“정말? 아가씨가 너를 매일 가르쳐주신대? 그럼, 너도 수련동에 처박혀서 세월아 네월아 하려고 하는 거야?”
수련은 동천의 말이 자뭇 거칠자 인상을 찡그렸다.
“야. 처박혀서가 뭐야. 그리고 나는 처박혀 있을 것도 아니고.. 이씨. 너 때문에 나도 처박혀란 말을 썼잖아! 그리고, 아가씨가 매일마다 가르쳐주신다는 게 아니고,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만 잠깐 짬을 내서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어.”
얘기를 다 듣자 동천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럼, 어쨌거나 너도 무공을 배운다는 얘기네? 네가 잘해낼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잘해봐.”
“뭐? 잘해봐? 야, 어감이 좀 그렇다? 그리고 잘해낼 수 있을지 어떨지? 너, 자꾸 그럴래? 내가 마음이 여려서 네가 반말을 하는 것도 봐주고 있는데,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잊었어?”
정말 수련을 상대하려면, 골치가 다 아팠다. 물론, 원인은 전부 다 동천이 일으킨 거지만 정작 동천 자신은 못 느끼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자신이 져줘야 하는 게 귀찮은 일을 모면하는 길이었다.
“그래,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어. 됐지? 내가 이렇게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좀 봐줘라.. 응?”
동천이 아양을 떨자, 누나인 내가 참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수련은 이젠 반대로 동천이 왜 여기에 서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만하면 됐어.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여기에 서 있었던 거야? 그리고 뒤에 있는 아저씨들은 뭐니?”
그제서야 동천은 자기 뒤에 있던 중늙은이들이 생각났다.
“아..! 저 인간들? 예전에 어떤 자식들이 날 때리려고 했었다고, 그랬지? 그게 바로 저 인간들이야. 오늘 잠시 산에서 내려왔다가 저 인간들을 만났지 뭐야? 웬만하면, 그냥 지나칠려고 했는데 재수 없게 생긴 자식이 나를 띠껍게 쳐다보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한 대 쳤더니 저렇게 뻗더라고.”
동천의 말에 수련은 못 믿는다는 표정으로 피식! 하고 웃었다. 우선, 말이 안 됐던 것이다. 어떻게 힘없는 동천이 무공을 익힌 장정을 한 대 쳤다고 기절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수련은 동천의 허풍이 좀 심했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그냥, 넘어갔다.
“그래, 알았어. 내가 믿어줄게. 나 아니면 누가 널 믿겠니? 그러니까 내 말은 왜 산에서 내려왔냐 이거야.”
동천은 수련이 자신의 말을 안 믿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앞에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사내를 향해 물어보았다.
“이씨.. 안 믿어? 야! 네가 말해봐. 내가 이 자식을 때려서 기절시켰어. 안 시켰어.”
사마귀 장한은 그제서야 소외감에서 벗어났다. 꼬마들끼리의 쫑알거림에 말은 안 했지만 기분이 좀 그랬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자신이 대답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사내는 잠시 당황했다.
-예? 아.. 그게.. 맞습니다. 소전주님께서 이 친구를 기절시킨 겁니다.
수련은 사내가 당황해하는 것을 보고, 동천을 잠시 곁눈질로 바라봤다. 수련은 동천이 지위가 높아졌다고 압력을 넣어서 거짓말을 하라고 한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속아주는 척 하는 것도 누나 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아.. 그래요? 와, 동천. 너 굉장하구나?”
수련이 거짓말이 얼굴에 드러날 정도의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단순한 동천은 수련이 믿어주는 줄 알았다.
“히히히. 이제 알겠어? 거짓말 아니지?”
거짓말이든, 아니든, 수련은 동천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안 하자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근데. 산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그게… 야! 이제 네 친구 데리고 가도 좋아. 어서 가라구.”
동천은 산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지금 약왕전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옆에 있는 자식이 들을까 봐, 손을 휘저으면서 가라고 했다. 그 사내는 동천의 손짓에 살았다는 듯이 친구를 업고는 경공술을 발휘해 사라졌다. 그 사내가 사라지자 동천은 그제서야 황광을 만났던 얘기와 혈귀옹을 만났던 얘기를 빼고, 전부 말해줬다. 혈귀옹의 얘기는 왜 안 했냐면, 자신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 그렇게 해서, 소려산에 다시 올라갈 수도 없어서 약왕전에 찾아갈려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까 그 자식들과 너를 만난 거야.”
“그래? 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내가 같이 가줄게. 가자.”
“어?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천은 수련의 손을 잡고서 얼른 가자는 식으로 수련을 잡아 끌었다. 수련은 동천이 자신의 손을 잡자 빼내려고 했지만 잠시 생각한 후 그대로 놔뒀다.
“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래, 너 착하다. 그러니까 얼른 가자. 히히히..”
수련은 활기찬 동천을 바라보자 왠지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동천의 무사안일(無事安逸)주의는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던 걱정들을 없어지게 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둘이서 한참 동안 걸어갔을 때쯤..
“다 왔냐?”
-….. .
동천은 수련이 말이 없자,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다 왔냐니까?”
-……. ..
자신의 두 번째 물음에도 수련이 묵묵부답이자, 성질이 난 동천은 신경질적인 투로 말했다.
“야, 다 왔냐구!”
동천이 마침내 화를 내며 물어봤지만 더 화가 나 있던 수련은 드디어 꾹! 참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악-! 야! 너, 진짜. 나불거릴래? 너는 왜 길을 걸을 때면 그렇게 나불거리는 거야! 내가, 어련히 잘 데려다줄 텐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구! 응? 말 좀 해봐!!”
동천은 수련의 화난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또 뭐를 잘못한 건가? 하고, 생각했다. 자신은 저번에 가던 길과 다른 길이었기 때문에 약왕전이 하도 안 보여서, 물어본 건데 수련이 예상외로 신경질을 부리자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당황한 와중에도 동천의 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씨발. 길 좀 안다고 더럽게 지랄거리네.”
“뭐? 지랄? 나, 안 가!”
“안 가? 맘대로 해! 이 계집애가 오냐, 오냐. 해줬더니 계속 지랄이네? 네 맘대로 해봐라. 에이, 차라리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게 더 편하겠다!”
진짜로 열이 뻗친 동천은 수련에게 길 안내를 받느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너어.. 너어..!”
수련의 눈에선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동천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너어. 라고? 너는 할 말 없으면 너어, 너어 하는데 그 습관(習慣) 좀 고쳐! 알겠냐?”
그러고는 가던 방향으로 수련을 남겨둔 채 화가 나서 무작정 걸어갔다.
“야 이, 나쁜 놈아! 네가 그러고도 무사히 갈 것 같냐? 내가 장담하건대 꼭! 나쁜 일이 일어날 거다! 흑흑.. 으앙! 나쁜 자식..”
동천이 걸어가면서 뒤를 잠깐 힐끗! 쳐다봤을 때 수련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너무했나 싶었지만 다시 가서 수련의 비위를 맞춰준다는 것은 왠지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그냥 걸어갔다.
“흥! 나쁜 자식? 세상에 나처럼 잘생기고, 착한 아이보고 나쁜 자식이라고? 웃기고 있네.. 내가 나쁜 놈이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마귀쯤 되겠다! 지랄하고 있네. 칫!”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천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느꼈다. 이대로 수련을 두고 간다는 것은, 착한 소년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내, 생각을 바꾼 동천은 수련이 울고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흑흑흑.. 나쁜 자식.”
수련은 아직까지 울고 있었다. 그런 수련의 모습에 어휴.. 하고, 나직이 한숨을 쉰 동천은 수련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말했다.
“야, 내가 다 잘못했어. 그만 가자.”
순간 울고 있던 수련이 움찔하더니 동천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더 큰 소리로 울어 제꼈다.
“으아앙! 아가씨… 흑흑! 가! 이 나쁜 놈아. 내가.. 흑흑.. 다시 너를 상대하면 인간이 아니다. 흑!”
“야, 가긴 가더라도 네가 그만 울어야지 내 마음이 편할 거 아냐.”
동천의 말에 수련이 울음을 그치더니 퉁퉁 부은 눈으로 동천을 째려봤다.
“흥, 마음이 편해? 네가 언제부터 그런 애였다고 그래? 너 내가 아가씨에게 이를까 봐 다시 온 거지? 그렇지?”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던 동천은 순간 찔끔했다.
“억지 그만 부리고, 이제 울음을 그친 것 같으니까 나 간다.”
-같이 가.
“뭐?”
“아까, 바래다준다고 했으니까 같이 가줄게.”
눈물을 그친 수련은 화가 났지만 약속은 지켜야 했기에 굳은 얼굴로 동천을 지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순간 어색해진 동천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련의 뒤를 쫓아갔다.
“나 혼자 가도 되는데..”
동천의 혼잣말에 앞서가던 수련이 매서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째려보자, 쫄아버린 동천은 짐짓 딴청 피우는 척했다. 한참 동안 째려보던 수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잔말 말고 따라와.
“알았어…”
일각여를 묵묵히 걸어가던 수련과 동천이 샛길을 벗어나자 드디어 약왕전이 보였다. 수련은 약왕전이 보이자 그제서야 굳어있던 안색을 조금 풀었고, 동천은 드디어 소려산에 있는 사부님께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서 수련을 내버려두고 얼른 달려갔다. 약왕전의 문 앞에는 어김없이 연호(然號)와 하련(賀練)이 지키고 있었다. 그 둘은 동천이 달려오자, 서둘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소전주님.”
“어? 어.. 안녕?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소려산 중턱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 없어?”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동천이 어색하게 인사를 받은 후 물어보자 하련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물어봤다.
“소려산 중턱에 있는 집이요?”
“그래, 거기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좀 가르쳐줘. 빨리!”
“그렇게 무턱대고 말씀하시면…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조심스런 하련의 말에 마음이 다급한 동천은 신경질적인 투로 말했다.
“이씨.. 좋아. 왜 거기를 찾냐면 거기에 사부님이 계시기 때문이야. 내가 소려산을 내려왔었는데 올라가는 길을 그만 깜빡해서 잊어버렸었다구. 이제 됐어?”
“전주님을 찾으시려 한다구요?”
자꾸 물어보는 하련의 행동에 동천은 한 대 칠 듯이 말했다.
“그래! 바쁘니까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
“저기.. 전주님이시라면 여기 계시는데요?”
“뭐?”
동천이 한순간 놀라서 멍해 있는 사이에 그제서야 천천히 걸어온 수련이 동천의 바로 뒤까지 다가와서 연호에게 물어봤다.
“여기 계시다구요?”
“아, 예. 외단에서 입교하려던 잠마삼단(潛魔三團)이 오련(五蓮)의 홍하대(紅霞隊)와 마주쳤었는데, 숫자적인 열세를 못 이겨 대패해서 이곳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중환자들이 많아서 한 당주님께서 전주님을 이리로 모셔왔기 때문에 지금 전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단원들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연호가 심각하게 얘기했지만 다시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게 된 동천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히히히히.. 하늘이 날 돕는구나! 히히. 수련아, 어서 가자.”
동천은 어어.. 하는 수련의 손을 잡고는 약왕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시 나왔다.
“연호, 사부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동천의 말에 연호가 웃으면서 말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수련이 아까의 복수를 하려는 듯 동천의 귀를 잡더니 질질 끌면서 들어갔다.
“아야야! 야, 아퍼!”
“으이구.. 잔말 말고 따라와. 내가 가는 길을 아니까.”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놓고.. 아야!”
연호와 하련은 그런, 동천의 모습에 서로 마주보고는 나지막하게 킬킬거렸다. 동천의 귀를 잡고 끌고 간 수련은 어느 정도 걸어가자 동천의 귀를 놓아주고,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고통에서 해방된 동천은 씨발씨발하면서 귀를 문지르며 수련을 따라갔다.
“여기야. 아마, 저번에도 여기로 왔었을걸? 맞지?”
수련의 말대로였다. 수련이 온 곳은 저번에 와본 적이 있던, 암약전(暗藥傳)이란 곳이었다. 동천은 자신이 가야 할 곳에 척척! 잘 찾아가는 수련이 부러웠다. 아니, 어쩌면 수련 말고도 방향치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을 부러워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꿀리는 건 전혀 내색하기 싫어하는 동천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러네? 야, 수고했어. 이따가 아가씨한테 가거든 내가 안부(安否) 전한다고 해줘. 알았지?”
수련은 동천이 그만 가보라고 하자, 웃기지 말라는 듯이 콧방귀를 뀌면서 암약전에 들어갔다.
“흥, 웃기지 마. 내가 남이 가라고 하면, 예예. 하면서 그냥 가는 사람인 줄 알아?
“아니었어?”
순간, 수련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야-!”
“이크, 거 목청 한 번 더럽게 크네. 알았으니까 들어가.”
수련은 동천이 의외로 자기 잘못을 순순히 시인(是認)하자, 화냈던 표정을 풀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지나서 수련과 함께 돌계단을 올라가자, 약초 냄새와 은은한 피비린내가 동천의 후각(嗅覺)을 자극했다. 수련도 그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코를 잡고는 주위를 손으로 휘저었다. 동천은 그런 수련을 보고 지금 수련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물어봤다.
“야, 너 혹시 피 냄새 안 나냐?”
오랜만에 수련은 동천과 의견일치(意見一致)를 봤다.
“으응.. 그런 거 같애. 우웁. 넘어올 것 같아.”
수련이 결국에는 비릿한 내음에 속이 울렁거려, 토하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동천은 그때를 맞춰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문을 연 사람은 역천이었다.
“에잉.. 왜 이리 시끄러? 엉? 동천하고.. 수련??”
하루 내내 병신들과 같이 있어서 짜증이 났던 역천은 동천은 오기로 되어있었던 거니까 그렇다 치고, 수련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에 대해 짐짓 놀라움을 가졌다. 역천의 눈이 왕방울만 해지자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수련은 아까의 울렁거림은 잊어버린 듯했다.
“호호호. 아저씨 얼굴이 되게 웃겨요. 호호호.. 커진 눈 좀 봐.”
그제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역천은 헤헤 웃으면서 얼른 신발을 신고 나왔다. 역천이 걸어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동천을 껴안는 일이었다.
“하하하. 잘 왔다. 제자야.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냐? 거기서 하룻동안 잤나 본데 한 당주가 잘해주…”
동천을 안고 기뻐하던 역천은 한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동천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순간적으로 동천의 손을 잡고는 수련의 시야에서 휭.. 하니 사라졌다.
수련의 입장에선 황당 그 자체였다.
“무슨 일이지…?”
수련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