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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8화


천일동안.

-나를 죽여라..-

『노력(努力)한 보람이 나오질 않는다면, 사부(師父)고 뭐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부의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제자(弟子) 동천이 사부에게…』


순간적으로 자리를 이동당한 동천은 수련보다 더 황당해 했다. 사부가 자신의 몸을 만지다가 갑자기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으니 황당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 사부님. 무슨 일이에요?”

동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봤지만, 역천은 동천의 몸 구석구석을 진지한 표정으로 유심히 쳐다보기도 하고, 손목을 잡아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지막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제자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예? 무슨.. 일이 있었냐니요?”

순간 역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랑하는 제자야. 이 사부를 속일 생각은 말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 보거라. 어떻게 해서 네 몸속에 근 일갑자반 정도의 내공이 돌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부의 말에 동천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말했다.

“아, 저.. 그게요. 길을 잃어버렸었는데요. 어쩌고해서 항광이라는 할아범을 만나게 되었고, 그 할아버지가 저한테 환골탈태를 시켜준다고 했고, 저쩌고해서 산을 내려오게 된 거예요.”

“오! 오오! 그래, 그래서? 우헤헤헤헤헤….!!”

동천의 말을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듣고 있던 역천은 놀라움에 점점 눈을 크게 뜨다가 나중에 항광이 쓰러져서 빌빌거릴 때 단환을 입에 넣어주고, 내려오다가 수련을 만나서 여기로 오게 된 거라고 말해줬더니,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고개를 수그리고는 헤벌레.. 하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역천은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픈지 배를 잡고는 숨을 고르게 쉬었다.

“헤헤.. 후우, 우후.. 후후후! 아이고, 배 아파라. 헤헤헤! 그러니까.. 네가 교주의 아들인 냉현(冷玄) 대신에 환골탈태 시술을 받았다고? 으하하하하! 그거, 쌤통이다. 으헤헤..”

동천은 사부가 왜 웃는지 몰랐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부님, 왜 웃어요? 그리고 뭐가 쌤통이라는 거예요?”

호흡을 가다듬던 역천은 제자의 질문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왜 웃냐고? 궁금한가 본데.. 가르쳐주마. 우리 암흑마교는 개파조사님이 둘이다. 그래서 처음에 세력을 형성(形成)할 때 두 세력이 합쳐져서 이 암흑마교가 탄생한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인 척 하지만 아직도 은근한 세력 다툼은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도 어느 정도 느꼈겠지만(이 대목에서 동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귀문(鬼門)은 수라마가(修羅魔家)에 충성을 맹세했었기 때문에 한열마가(寒熱魔家)를 따르지 않는다. 으헤헤헤.. 그런고로, 냉현이 받아야 할 시술을 네가 받았으니 너한테나 우리 귀문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냉현한테는 열 받아서 분통이 터질 일이란 말이다. 하하하하! 알겠냐?”

동천은 역천이 하는 말을 조금밖에 못 알아들었다.

“아? 어쨌든 좋은 일이라는 얘기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환골탈태는 안 됐냐? 네 말로는 만독노조가 환골탈태를 시켜줬다며?”

역천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자, 동천은 깜짝 놀랐다.

“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환골탈태가 안 되다니…?”

“쯧쯧. 몰랐나 보구나. 아까 네가 내공심법을 운용하고 보니 만독이 자빠져 있었다고 했지?”

“예. 분명히 그랬어요.”

동천의 말에 역천은 혼자서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도 만독이 너에게 내공을 주입해 주다가 내공의 한계를 못 이겨 쓰러졌기 때문에 미처, 너에게 환골탈태를 못 시켜준 것 같다.”

동천은 역천이 환골탈태가 안 됐다고 하자, 허탈감과 분노가 교차되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한마디로 개지랄이었다. 제가 한 것은 쥐뿔도 없었고, 그나마 근 일갑자반이라는 어마어마한 내공을 항광의 덕으로 힘 하나 안 들이고 얻었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환골탈태를 못 시켜준 항광을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

‘에이.. 씨팔탱이 늙은이. 어쩐지 생긴 게 거짓말 잘하게 생겼더라.’

감사하는 마음이란 개뿔도 없었던 동천은 그래도.. 하는 마음에 환골탈태의 미련을 못 버리고 역천을 향해 물어봤다.

“저.. 그럼, 이제 환골탈태는 물 건너간 건가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역천은 그런 동천의 기대를 산산히 부숴버렸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에휴…”

“그러나..”

역천의 말에 동천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나 뭐요? 가능성이 있기는 있다는 말씀인가요?”

“후후후.. 별거 아니고, 지금부터 수련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탈태환골을 할 수 있을 거니까, 앞으로 내 지시에 따라 열심히 수련 하거라. 알겠느냐?”

역천의 말에 동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별거 아니네요..”

역천은 허허! 하고 웃으면서 동천의 뒤통수를 툭, 하고 쳤다.

“녀석, 그보다 네가 있던 곳이 어디냐?”

“제가 있던 곳이요? 왜요?”

“왜요는 왜요야.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라. 네가 냉현이 받아야 할 복을 가로챘는데 교주 쪽에서 가만히 있겠냐? 그쪽에서 네가 냉현 대신에 시술을 받았다는 것을 모른다 쳐도, 만독을 찾으려고 지랄을 하겠지? 그러다가 네가 돌아다닌 흔적이 발견된다면, 당연히 네가 누군지를 필사적으로 조사할 거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얼른 가서 미리 흔적을 지워야 하기 때문에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동천은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자신은 사부를 참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와.. 굉장하시네요. 히히. 그런데..”


우르르릉–

동천이 역천에게 자신이 방향치라는 걸 가르쳐주려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은근히 내려치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역천은 비가 올 것 같자, 반색을 하더니 나지막하게 웃었다.

“킬킬킬.. 하늘도 우리를 돕는구나, 제자야. 흠.. 저 정도 먹구름이면 안 가도 되겠구나…”

“예? 왜요?”

“또 왜긴 왜요야. 생각해봐라. 비가 쏟아지면 네가 걸어온 흔적이 어떻게 될 것 같냐.”

그제서야 동천은 역천의 말을 간만에 이해했다.

“아.. 비가 내리면, 제 흔적이 지워질 거란 말이죠?”

“하하하.. 역시, 내 제자라서 똑똑하구나.”

“이히.. 그런 걸 가지고..”

동천이 좋아서 몸을 비비 꼬자, 그것을 보고 있던 역천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천아.. 이 사부가 생각해 보니까. 산에는 올라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네가 하늘의 도움인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얻어, 엄청난 내공을 가지게 됐으니 기초적인 내공 수련은 안 해도 되겠다.”

“정말요? 와, 신난다. 이야호!”

동천은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부의 말에 기분이 째지는 것을 느꼈다. 산에서 밤새도록 모기에 뜯기면서, 고생을 할 생각을 하니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부가 다시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기분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역천은 제자가 신나 하는 것을 보자 마치 자신도 그런 기분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천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순간, 역천은 먼 미래를 생각해봤다. 그러고는 자기가 마치 먼 미래를 내다보며, 감상하는 사람처럼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래.. 제자야. 너는 나중에 크면, 무림 사상(武林史上) 최고의 경공 달인(達人)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마. 너의 이름도 드날리겠지만, 너를 그렇게 만든 위대한 사부인 나의 이름도 드날리겠지…’

“으헤헤헤헤헤–!”

그런, 생각을 하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역천의 모습에 동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혹시 사부가 미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 해도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라 입을 헤- 벌리며, 웃고 있던 역천은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먼저 가면, 내 묘비명(墓碑銘)에 이런 한 줄기 글귀가 금빛 찬란하게 씌어 있을 거야.. 위대한 영세제일인(永世輕攻第一人)인 동천보다, 더 위대한 동천의 사부인 귀영광의(鬼影狂醫) 역천(逆天). 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고이 잠들다.. 캬~! 죽인다! 으하하하…. 저 하늘도 나를 도와줄….’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우러러보던 역천은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있는 게 보이자 인상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하늘은 자신을 도와줄 것 같게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도와줄 다른 게 또 없나? 하고, 생각하던 역천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떠오르는 게 없자, 나중에 하늘이 맑아지면 그때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동천을 바라보자 역천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흠험. 동천아. 내가 며칠 전에 했던 말 중에서 경공 분야에서는 독보제일인(獨步第一人)이 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느냐?”

무공 얘기가 나오자 의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역천을 바라보던 동천의 눈빛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럼요. 제가 어떻게 그 말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흐흐흐.. 드디어, 때가 왔다.”

“때라구요?”

“그렇다. 이제부터 너는 천일 동안의 수련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혹독(酷毒)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대가는 주어진다. 할 수 있겠느냐?”

동천은 드디어 자신이 경공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은 못 되더라도 독보제일인이 되는 과정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동천은 자신 있었다.

“물론입니다. 언제부터 할 거죠? 지금부터 시작하나요?”

역천은 제자의 의지(意志)가 놀랍도록 굳건하자, 절로 흥이 났다.

“하하하. 너무 서두르지 마라. 수련은 일주일 후다. 그때 가서 포기한다느니 그런 소리는 할 생각을 말아라. 알겠냐?”

“히히히!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요! 자신 있어요.”


쏴아아아—

동천이 자신하던 그때,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 전부터 우르릉거리던 게 이제서야 비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크, 비가 오는구나.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와.. 많이도 쏟아지네..”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지자 역천은 동천의 허리를 잡아채더니 순식간에 암한문(暗寒門)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암한문에 즐비한 방들 중 중간에 자리한 거대한 방에 데려갔다.

“자, 여기가 이제부터 네가 기거하게 될 곳이다. 굉장히 크지? 아마 없는 게 없을 거다. 여기는 순전히 너의 방이며, 하인도 하나 붙여주마. 명색이 약왕전의 소전주인데 하인 하나도 없다면, 말이 되겠느냐?”

순간, 동천은 깜짝 놀랐다.

“하..인….이요? 저한테요?”

역천은 제자가 왜 이러나.. 했다. 그러다가 동천이 하인 신분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호오,, 그렇구나. 네가 예전에 하인이었다고 했지?”

“흑흑.. 예. 그랬어요.”

이젠 아예 울기까지 했다.

“짜식.. 그나저나 남자아이로 붙여줄까?.. 아니면, 여자아이로 붙여줄까? 말해봐라. 네가 말한 대로 데려다주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여자요!

역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하. 좋다. 며칠 내로 예쁘장한 애로 붙여주마. 그 시비는 영원히 네 거니까 괴롭히지 말고 잘 대해줘라. 알겠느냐?”

“예.. 에.”

밤이 돼서 잠자리에 누운 동천은 저녁에 역천이 한 말을 계속 되씹어 보았다.

‘영원히 내 거… 영원히 내 거.. 영원히… 영원히… 내… 꺼… 어……’

그날 밤 동천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수련은 암약전 앞에서 한참 동안 어이없어 하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오자, 주위에서 비릿내도 계속 나고 해서 투덜거리며, 혈귀옹에게 찾아갔다. 만검전(萬劍專)에 들어간 수련은 뜨거운 화기를 피하며 어느 정도 들어가자, 혈귀옹이 느긋한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보였다. 혈귀옹이 보이자, 수련은 기쁜 마음에 달려가서 혈귀옹의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

“어이쿠! 수련 아니냐? 녀석, 못 본 사이에 꽤 예쁘게 컸는데?”

예쁘다는 말을 마다할 수련이 아니었다.

“정말요?”

수련의 말에 혈귀옹은 짐짓, 정색(正色)을 했다.

“내가 거짓말하는 것 봤냐?”

“아니요. 헤헤.. 아이, 기분 좋아라.”

수련이 기뻐하자, 그런 모습을 즐거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혈귀옹은 품에 안긴 수련을 내려놓았다.

“아가씨의 칼 때문에 왔느냐?”

“예. 아가씨가 언제쯤 되는지, 알아보고.. 목도 둘하고, 보통 검 한 자루는 지금 가지고 오라고 하셨어요.”

혈귀옹은 용도(用度)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 그거야 어렵지 않지. 아가씨의 검은 아직 멀었고.. 목도 둘하고, 검은 네가 돌아갈 때 인부 하나 딸려서 갖다주마. 됐니?”

“예. 그리고.. 저야 할아버지와 더 있고 싶지만.. 아가씨께서 기다리시고, 또 지금 비가 오고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해요. 아휴.. 빨래 다 젖었겠다. 으이구! 이게 다 동천 때문이야.”

수련의 말에 혈귀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응? 동천? 그.. 뭐냐. 맑디고. 푸르딩딩이고.. 하는 녀석 말이냐?”

“예? 맑디고, 푸르딩딩이고는 몰라도, 그 동천이 제가 말한 동천이라면 동천이 맞는데, 동천을 아세요?”

수련의 말을 듣고 혼자 생각하던 혈귀옹은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빗방울이 더 거세지기 전에 얼른 가보아라.”

혈귀옹은 한 번 아니라고 하면, 절대 말을 안 해주기 때문에 수련은 궁금하면서도 순순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예…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오냐.. 아가씨께 안부 좀 전해라.”

“네..”

비가 오자 수련은 혈귀옹이 마련해준 마차를 타고서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동안 혈귀옹의 말이 무지무지 궁금했지만 아무리 추리해 봐도,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포기했다.

“아저씨, 수고했어요.”

수련이 마차에서 내린 후 마부석에 앉아있던 사내에게 말하자, 그 사내는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마차를 몰아 만검전 쪽으로 사라졌다.

“앗! 차거. 빨랑 가야겠다. 그나저나 빨래 다 젖었겠다앙… 힝.”

목도와 칼을 처마 밑에 내팽개친 수련은 얼른, 빨래를 걷기 시작했다. 당연한 거겠지만 빨래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빨래를 걷느라 비를 쫄딱! 맞은 수련은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이힝~! 동천, 나쁜 놈. 이게 어떤 옷인데.. 에휴. 어서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비 맞은 빨래를 거실 한 귀퉁이에 처박아 놓은 수련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우산을 쓰고, 총총걸음으로 목도와 검을 들고 바삐 걸어갔다.

“아가씨. 다녀왔어요.”

사정화는 수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서탁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왔어? 내 검은 언제 완성된대?”

“그거요? 할아버지 말로는 아직도 멀었다는데요?”

“그래..? 할 수 없지.”

“급한 거예요?”

사정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래요..? 참, 아가씨. 저 아까 전에 귀옹이 할아버지에게 가는데 동천을 봤지 뭐예요?”

수련의 말에 사정화는 자못, 흥미가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천을? 아까는 소려산에 올라갔다면서.”

“후후후.. 물론, 그랬죠. 그러니까..”

수련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역천이 동천을 데리고 사라진 데까지 자세히 말해주었다. 동천이 자신을 울렸던 일까지 다 말해버렸지만, 사정화의 표정은 담담했다. 사정화는 역천이 동천을 끌고 사라졌다는 대목까지 듣고 나자, 그 뒤가 궁금해졌다.

“귀영광의가 동천의 몸을 만지더니 갑자기 데리고 사라졌다고?”

“예. 그랬어요.”

뒷얘기가 궁금했던 사정화는 재촉하는 듯한 눈초리로 수련에게 물어봤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사정화의 물음에 수련이 해줄 말은 없었다.

“그게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요…”

-……… .


하도 오래돼서 빛이 바랜 집에서 누워있던, 한심은 이제나, 저제나 동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씨.. 더럽게 안 오네. 내가 찾아봐야 하나? 놔두자. 전주님의 말로는 기다렸다가 같이 내려오라고 했으니.. 찾는 건 내 임무 밖이니까 그만두자. 햐~! 그나저나 비 한번 억수같이 쏟아지는구만?”

그날 밤 한심은 별 생각 없이 잠을 잤다.


동천이 가고 나서, 지속적으로 운기조식을 하던 항광은 기가 안정되자 그제서야 운기조식을 멈췄다. 비가 쏟아지고는 있었지만 운기조식이 먼저였기 때문에 비를 피하지 못했던 항광은 운기조식이 끝나자, 아직 공간이 남아있는 무너진 동굴의 입구 쪽으로 들어가 쏟아지는 비를 피했다.

“다행히 사할 가량의 내공이 회복되었군,.. 부득! 재수 없는 냉가 자식! 내가 잘 때 암흑마교 쪽으로 뉘고 자면, 항광이 아니다. 으으으.. 부득! 두고 보자!”

잠시 후 휴식을 취한 항광은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러나 냉가 자식의 생각이 계속 미치자, 기(氣)의 흐름이 원활치 못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 잡기가 강해서 더 이상의 운기조식은 무리겠군. 할 수 없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 부득.. 내일이면 재수 없는 냉가의 영토(領土)를 벗어날 수 있겠군.”

그날 밤 항광은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잠을 잤다.

다음날 깨어난 항광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너무 갈았는지, 이가 얼얼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간밤에 이를 너무 갈았나 보군.. 좀 자제해야겠다.”

항광은 아침이 되자, 다시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운기조식은 끝이 없이 계속돼서 비가 오는 와중에 오후가 지나가고, 유시(酉時) 초(오후 5시.)가 되서야 무사히 운기조식을 끝낼 수가 있었다.

“휴..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칠 년 후쯤에는 내공을 거의 회복할 수 있겠군..”

이제는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을 마친 항광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픈 생각밖에 없었다. 비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부.. 윽! 잠시 까먹었었군. 흐흐흐.. 냉소천. 십 년이다. 십 년 정도면 나의 내공이 완전히 회복됨은 물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지금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고 들었지만 쇠퇴된 만독문(萬毒門)을 예전 정도로 강성(强盛)하게 만들어서 이번 일을 친절하게 보답해주마.”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항광은 무리하지 않는 차원에서 내공을 끌어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데 조금 달려가고 있을 때 마치, 푸른 바다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항광은 달리기를 멈추었다.

“죽림(竹林)이군.. 그래도 삼십 년간이나 이 근처에서 정들었던 곳은 오직, 이곳밖에 없었는데…”

항광이 옛 생각에 잠기자, 파릇파릇한 대나무들이 떠나는 항광을 배웅해주려는 듯 바람에 휘날리며 잎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상큼한 대나무의 향기가 물밀 듯이 항광의 폐부를 깨끗이 씻어주는 것 같았다. 항광은 그런 냄새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공기를 들이켰다.

“잘 있어라.. 그동안 정들었던 대나무들아…”

생각해보면, 이 대나무들 덕택에 삼십 년 전 죽음을 면했다고 볼 수가 있었다. 대나무의 냄새가 자신의 피 냄새를 씻어주어, 추적자들이 자신을 쫓는 데 시간을 지체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에 항광은 이곳을 지나던 냉소천을 만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일이 다 냉소천의 계획인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십 년 후면, 냉소천의 존재도 사라질 테니까… 바로, 자신의 손에.. 항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부(丈夫)의 복수는 십 년의 기다림도 아깝지 않지..”

항광은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바라보자, 갑자기 암호가 생각났다. 동천(冬天)… 그러자 그 냉가 자식이 생각났다. 재수 없이 실실 거리던 얼굴.. 천약뇌수단을 가지고 자신을 놀렸던 일..

“부득! 부득! 부드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분노가 뇌리를 지배한 탓인지, 아픔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항광은 이런 마음을 계속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으면, 나중에 운기조식을 할 때 지극히 위험하다는 생각에 눈앞의 푸른 대나무 숲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냉가는 재수 없다! 재수 없는 냉가!! 죽어라, 냉가야!!!”

큰 소리로 떠들어대자 어느 정도 속이 후련한 걸 느꼈다. 후련한 마음에 희미한 미소를 짓던, 항광은 잠시 대나무 숲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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