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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84화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얻은 것.

잠시 분타로 쫓겨났던 철마도(鐵魔刀) 부성광(附星光)은 그의 심복이자 절친한 친구인 엽소(葉消)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분타 생활을 끝내고 본교를 들어가게 되시는군요.”

엽소의 잔잔한 물음에 부성광 또한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그었다.

“그렇지. 이게 다 자네 덕분일세. 그때 그것을 가져왔기 때문이야.”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공을 뒤로 물린 엽소는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부성광의 오른손을 주시했다. 중지에 끼워진 철 반지를 살폈던 것이다. 짧은 순간 차디찬 한광이 그의 눈에 피어올랐다. 부성광은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던 듯, 엽소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너무 빼지 말게. 안 그래도 이번에 같이 본교로 들어가지 못해 자네에게 미안한 마음뿐인데 그 노고까지 회피하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엽소는 대답 대신 부성광이 따라준 술을 조용히 입가로 가져갔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술잔에 술이 모두 사라진 다음이었다.

“괜찮습니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신 후 저를 불러줄 터인데 뭐가 그리 미안하십니까. 설마 제 공을 싹 가로채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능청스러운 엽소의 대꾸에 부성광은 껄껄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하핫! 말 나온 김에 그냥 가로채 버릴까 보다!”

“어디 해보시지요! 으하하하!”

한껏 마주 웃어댄 그들은 자정이 넘어서까지 술을 마시고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뜻깊은 날이긴 하지만 2년 동안 충분히 회포를 풀었고 내일이면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이라 해야겠다. 오늘 떠나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술잔을 기울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도껏 마셨던 엽소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명상에 잠겼다. 그는 명상 내내 자신의 왼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부성광이 오른손에 끼고 있는 반지와 똑같은 철 반지였다. 근 15년 전에 맞춘 반지였다. 그는 이제 희미해져 있는 그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타주인 부성광이 교로 들어갔다 되돌아온 후부터 명상에 잠길 때마다 회상하는 것은 그의 일과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이젠 그때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하하. 이 반지가 우리를 한 형제로 맺어줄 걸세.”

어느 날 부성광이 한 쌍의 철 반지를 가져왔었다. 엽소는 사내로서 당연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뭐요? 무슨 계집애도 아니고.”

부성광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대소를 터트렸다.

“계집애라고? 으하하! 그러면 또 어떤가? 잔말 말고 그것을 왼손에 끼게나.”

엽소는 마지못해 받아준다는 시늉을 보이며 부성광을 응시했다.

“받긴 받겠지만… 딱히 왼손에 끼어야 할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부성광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왼쪽 허리에 걸려있는 장도(長刀)를 툭툭 건드렸다.

“우리는 무인일세. 그리고 오른손잡이이지. 이 귀중한 반지를 오른손에 끼고 있다가 상처가 나면 어쩌나? 안 그런가?”

“내 참. 알겠수다. 까짓거. 끼지요.”

투덜거리고 끼긴 했지만 막상 끼고 나자 꺼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까짓 거라고? 끼기 싫은가? 그럼 이리 주게.”

엽소는 부성광의 손길을 피하고 나서 펄쩍 뛰었다.

“거 무슨 소리요. 준 걸 다시 빼앗다니. 이거 상대 못할 주군일세?”

“으하하하! 알긴 아는구만?”

“하하하!”

엽소의 기억은 거기에서 희미해졌다. 2년 동안 기억을 살린 게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마치 방금 전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고 따스했다. 그 때문일까. 따스함을 잃어버린 엽소의 주먹이 으스러져라 쥐어졌다. 명상에서 깨어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피는 피로서 갚는 법!>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단 백의를 벗어내고 가벼운 흑의 경장을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백의를 껴입었다. 그가 자랑하는 면도(緬刀)는 하늘거리며 흔들리다 도집 속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품속에서 한 장의 얇은 양피지를 꺼내 보았다. 만들어진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서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다. 양피지 안의 무수한 도형과 선들. 흔들리는 초점으로 보고 또 보던 엽소는 이를 악물었다.

<가끔은 잘되는 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재미있지.>

살기에 물들었던 엽소는 곧 정색을 하고 흐트러진 얼굴을 했다. 그는 반시진 후,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남모르게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달라져 보이는 건 없었다. 다만 그의 내면은 긴장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엽소가 부성광의 거처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던 경비가 고개를 숙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총 호법님, 돌아가신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오셨습니까?”

엽소는 능청스레 웃었다.

“하하, 다름이 아니라 분타주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그걸 까먹었지 뭐냐? 네가 알다시피 난 생각났을 때 말해야 속이 편한 분 아니냐. 내일이 특별한 날이라 나도 참는다고 참았는데 고작 참은 것이 반시진이었다. 더 참다가는 속에서 열불이 나겠다 싶어 온 것이니 너는 그렇게만 알아라.”

“저런? 그러셨으면 좀 더 일찍 오시지 않고. 들어가시지요.”

경비는 엽소의 성질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자였다. 그래서 별 의심 없이 길을 터 주었다. 엽소는 경비의 어깨를 툭툭 쳐준 후 안으로 들어갔다. 분타주인 부성광에게 가는데 검문은 총 4군데였다. 첫 번째를 그렇게 넘기고 둘째와 셋째도 같은 방법으로 수월히 넘긴 엽소는 마지막 관문인 부성광의 방 앞까지 오게 되었다.

“이 늦은 밤에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엽소에게 물어본 이는 여인이었다. 제법 곱상하게 생긴 이 여인은 주영(注英)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주영은 부성광이 교로 갔다 돌아올 때 데리고 온 여자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부성광을 만나고자 할 시에는 꼭 이 여인을 거쳐야만 했다.

“쩝, 그게 말이지…”

엽소는 여지껏 해온 방법대로 그녀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주영은 듣는 내내 아미를 살짝 찡그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질 않았다.

“밤이 너무 늦었사옵니다. 대신 그 말씀을 제게 해주시면 분타주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엽소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허! 내가 뵙기를 청하는데 감히 네까짓 게 무어라고 거만을 떠느냐!”

쩌렁쩌렁 울린 엽소의 목소리는 부성광이 잠에서 깨어나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이냐.”

엽소는 당황해하는 주영에게 ‘이제 깨어났으니 됐지?’라는 눈웃음을 보인 후 부성광 쪽을 향해 단정히 말했다.

“접니다.”

“으응? 들어오게.”

엽소는 문을 열고 들어가 옆에 계집을 끼고 있는 부성광에게 다가갔다. 부성광은 느긋하게 바지를 입고 일어났다.

“아까 보았는데 이 늦은 시각에 다시 찾은 이유가 뭔가? 또 술이 생각나 부른 것은 아닐 텐데.”

엽소는 긴장감이 흐르는 기색을 하곤 전음을 흘렸다.

<아주 중요한 일이니 주위에 모두 물려주십시오.>

부성광은 흠칫했다. 갑자기 전음을 보내 깜짝 놀란 것이다. 잠시 엉거주춤한 자세를 고수하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엽소의 뜻대로 해주었다.

“지금부터 내가 다시 부르기 전까지 멀찌감치 물러나 있거라!”

숨어서 경계를 강화하던 인물들이 몸을 날리는 소리가 엽소의 귀에 포착되었다. 그는 문밖의 주영까지 물러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런 상황을 만들었던 연유를 설명했다.

“실은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지만…”

부성광이 엽소의 흐린 말끝을 이었다.

“어서 말해보게. 혹시, 그 도해에 관한 것인가?”

놀란 표정을 지은 엽소는 부성광의 시선을 피하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순간 부성광의 눈에서 신광이 터져 나왔다.

“자세히 말해보게.”

상대의 기세를 느낀 엽소는 몸을 움찔거렸다.

<으음, 저놈이 예상외로 상당한 고수구나. 어쩌면 먼저 간 그 친구보다 고수일지도 모르겠군.>

내심 판단을 내린 그는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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