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85화
“다름이 아니라. 그때 분타주님께 그 도해를 드릴 때, 나머지 반쪽이 있긴 있었습니다.”
부성광은 엽소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뜸 노기를 터트렸다.
“그런데 그 중요한 것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가! 자네 제정신인가?”
화를 내는 것이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인지라 엽소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이 가짜 놈이 참으로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그래도 미묘한 이질감이 풍겼는데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익숙해졌는지 진짜와 헷갈릴 정도로 능숙한 연기를 펼쳐냈다. 그가 잠시 외부로 나갔다 왔으면 아무런 이상을 못 느낄 정도였다. 그때 하늘의 도움으로 가짜 놈이 철 반지를 오른쪽에 끼고 있지 않았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의심을 풀었으리라.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던 엽소는 바닥에 부복하고 머리를 찧었다.
쿵쿵쿵!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허나, 나머지 반쪽은 심하게 훼손되어있는 상태라서 복원하기 전까지 숨겼습니다. 만약 복원이 안 되어 하등 소용이 없는 것인데 그것을 괜히 찾았다고 가져가셨다가 오히려 화를 당하시면 어쩔까 싶어 그런 것이오니 제 충심을 이해해주십시오!”
부성광은 태도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머지 반쪽도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네. 자네의 충심을 십분 이해하고 있으니 어서 복원된 그것을 보세나.”
“예.”
엽소는 품속에서 문제의 그 양피지를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자못 흥분해있던 부성광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천마도해(天魔圖解)’라 쓰여진 양피지를 들여다보았다. 정교한 붉은 선과 파란 선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이리저리 그어지며 통로와 함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헌데 그는 이 그림이 어째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응? 가만, 이건…”
바로 그때 섬뜩한 그 무언가가 기해혈을 쑤시고 들어왔다.
“커억! 네, 네가!”
엽소는 복부에 찔러 넣은 면도를 빼내어 흥건히 흐르는 피를 가짜의 비단 금의에 처발랐다.
“처음부터 네놈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성광은 격한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확인한 엽소는 내심 안도했다. 혹여 자신의 실수로 진짜를 해한 것이 아닌가 염려를 했던 것이다.
“흐흐, 가짜로 잘 지내고 교로 들어가는 이 마당에 네놈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어디 네놈의 쌍판을 좀 볼까?”
“아, 안돼!”
찌이이-익!
종이만큼, 아니 종이보다 얇은 것 같은 인면피구가 고무처럼 늘어지며 그 껍질을 벗겨갔다. 아무리 단단히 준비한 엽소라 하여도 이때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러난 상대의 얼굴이 아는 자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에 들린 인면피구가 놀랍도록 정교했던 것이다.
“으음, 본교의 제작 기술이 이리도 뛰어날 리 없는데…”
엽소는 침음을 터트리고 난 후 가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상대는 인면피구의 착용 때문에 수염을 전부 밀어버린 40대 중반 사내였다. 그는 엽소가 처음 보는 자였다. 가짜를 예의 주시하던 그는 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교내의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 이로구나.”
그러자 가짜는 포기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암흑마교의 교도가 아니다. 사주를 받고 침투했을 뿐이지.”
“보나마나 음마동(陰魔洞)에서 나왔겠지?”
“어, 어떻… 으음!”
반사적인 행동으로 수긍을 해버린 가짜는 엽소의 유도신문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엽소는 때려 맞춘 것이 들어맞자 원래부터 알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속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치밀하게 너의 뒷조사를 해왔으니까. 그리고 이 도해는 필요가 없으니 내가 도로 가져가마.”
가짜는 엽소가 양피지를 쥐려 하자 얼른 손을 피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엽소가 그의 복부를 가차 없이 밟았기 때문이다.
“컥? 쿨럭쿨럭! 으으으.”
엽소는 양피지를 자신의 품속으로 옮긴 뒤 가짜의 목에 면도를 대었다.
“길게 말하지는 않는다. 진실만을 말한다면 살려주겠다.”
살려준다는 소리에 가짜는 못 믿겠다는 얼굴을 했다. 엽소는 풋 웃었다.
“적어도 나는 네놈들 같이 간교한 놈들은 아니니,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대신 방금 말했듯 거짓말을 한다면 그때마다 네놈 사지 중 한 개씩을 자를 테니 그리 알아라.”
가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소는 입을 열었다.
“분타주님은 살아 계시느냐?”
가짜는 그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던 듯 주저 없이 말했다.
“죽었소.”
엽소는 안타까운 빛을 했다.
“역시…”
잠시의 침묵이 이어졌다. 엽소의 입이 떨어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좋다. 다음은 그 도해를 가지고 무얼 하냐는 것이다.”
“무얼 하다니. 당연히 천마의 유해를 찾으려 하겠지.”
꿈틀한 엽소는 가짜의 아혈을 막고 가차 없이 오른쪽 팔을 잘랐다. 가짜는 처절한 고통을 느끼고 도마 위에 올린 생선 마냥 펄떡펄떡 뛰었다. 엽소는 통쾌한 기분이었다. 그는 잘린 팔을 들고 가짜에게 흔들어 보여줬다.
“내가 바보인 줄 아나? 다음에는 오른쪽 다리이니 신중히 답해라. 이년 전부터 본교의 목재 관리소와 금광 철광 등지에서 상당수의 자원들이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절강성에 새로이 분타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빼내가고 있지만 이것은 필시 도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 말이 틀린가?”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아혈이 풀린 가짜는 고통을 참느라 아랫입술이 흉하게 씹혀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수긍을 해주었다.
“그, 그렇소. 허나, 나도 하수일 뿐이오. 천마동부에 관련되어 자원이 투입되고 있지만 상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하오. 더군다나 우리 음마동은 인면피구 조달과 숙청한 인물들의 대체 인원에만 개입했을 뿐이오.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히 대가를 받고 있고, 그럼으로 인해서 재력을 쌓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서 나 또한 아는 것은 전무한 상태요.”
엽소는 진실인 것 같아 보여 이번에는 손을 쓰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이다. 분타주님의 유해는 어디에 묻히셨나.”
가짜는 꺼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사실 그대로 말해 주었다.
“동마옥(東魔獄)에서 고초를 받다가… 약화문(藥花門)으로 옮겨졌다고 들었소이다.”
순간 엽소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뭐라? 그놈들이 감히 시체해부실에 분타주님을 넘겼다는 것이냐?”
엽소의 두 눈에 핏줄기가 맺혀갔다. 그 핏줄기는 곧 눈물이 되어 혈루로 쏟아져 내렸다.
“아아, 수하 된 도리로서 이런 불충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루는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웃었다.
“큭큭큭, 너희는 내가 이 도해를 어디에다 쓸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흐흐, 어디에다 쓰냐하면 바로 정파에 넘겨줄 것이니라. 그럼 상황이 볼만 하겠지? 으흐흐흐.”
엽소의 등판에 충격이 가해진 것은 그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퍼억!
“우욱, 웩!”
엽소는 가짜의 바로 옆으로 볼품 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그가 돌아볼 새도 없이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호! 네놈이 기어코 일을 벌이는구나.”
가짜는 그 여인을 알아보고 살았다는 안도감을 토해냈다.
“주영, 왜 이리 늦었소!”
일개 시녀로 행세했던 주영은 거만하게 바뀐 표정을 짓고 가짜에게 말했다.
“호만(湖滿), 내 책임은 아니다. 네가 멍청하여 당한 것을 어찌 나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느냐.”
엽소는 그 사이 몸을 뒤집어 힘겹게 말했다.
“너, 너도 헉헉. 제기랄 너는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오호호! 본녀 또한 네놈이 별것 아닌 줄 여겼었으니 그리 원통해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본녀가 올 때 도해 어쩌고 하더구나. 자아, 그것이 무엇이더냐? 설마 천마에 관련된 것은 아니겠지?”
엽소는 분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입을 다물겠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네가 만들어 놓은 작품처럼 나도 네놈의 팔 하나를 자르겠다. 어서 말해라.”
졸지에 엽소의 작품으로 전락되어버린 호만은 울그락불그락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주영과 호만은 서로 엇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이냐?”
찬 서리가 내린 얼굴로 엽소를 노려본 그녀는 수도로 팔을 자르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사내들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내부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잠시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주영, 어찌 된 일이냐?”
수뇌로 보이는 자가 물어보자 일이 꼬인다고 생각한 주영은 이쯤에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작은 은패를 내밀었다.
“본녀는 이번에 요림(妖林)의 홍화당주(紅花堂主)로 임명된 주영이다. 너희들은 명을 받들라.”
사내들은 급히 허리를 굽혔다.
“존명!”
주영은 만족의 웃음을 머금고 그들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분타주의 호위를 맡고 있는 그들은 엽소를 향해 분노의 기색을 떠올렸다.
“감히 당신이 분타주님을 노리다니! 주영님의 혜지(慧智)로 대리인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뻔했는가!”
엽소는 힘없이 고개를 저어댔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닥쳐라! 주 당주님, 저희들이 저 발칙한 자를 벌하게 해 주옵소서!”
주영은 도해에 관련된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것은 나중에 호만에게 들으면 될 것이라 여기고 허락해 주었다.
“허락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여섯 명의 사내들이 몸을 날렸다. 엽소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끝인가? 아아, 이럴 줄 알았다면 사본을 미리 정파에 넘겨주고 일을 행할 것을…>
엽소의 후회를 끝으로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
엽소는 의아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비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엽소는 무슨 일인가 하여 급히 눈을 떴다. 그의 망막에 비친 것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주영의 잘린 살덩어리들뿐이었다.
“아니? 자네들이?”
그들은 착잡한 얼굴로 엽소를 응시했다.
“우리도 예전부터 의심은 했었습니다. 다만 확신이 서질 않아 망설였을 뿐. 후우… 막상 이렇게 되니 착잡합니다.”
엽소는 힘겹게 일어났다. 그 또한 착잡함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내 자네들의 마음을 잘 아네. 허나, 이렇게만 있을 것인가? 분타주님의 억울함을 우리라도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선두의 사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이제부터 총 호법님을 따르겠습니다.”
엽소는 코가 찡함을 느꼈다. 혼자라 여겼는데 이렇게 동지가 생겨난 것이다. 일을 행함에 있어 한 사람의 가세는 가히 천군만마였다. 그런데 그 천군만마가 여섯이나 되었으니 어찌 든든하지 않겠는가. 엽소는 등판에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거뜬한 척하며 천마동부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럼, 그 양피지를 정파에 건네준다는 겁니까?”
“그렇지. 세력도 막강하고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몸을 의탁하려 하네.”
사내들은 눈을 번뜩였다.
“황룡세가(黃龍世家)?”
엽소는 긍정을 표했다.
“적어도 그 정도의 세력이어야 하지 않겠나. 자, 어서 가세.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당도해야 하네.”
엽소가 먼저 몸을 날리고 나머지가 그를 따랐다. 그러나 마지막 사내는 엽소가 아닌 호만에게로 다가갔다. 호만은 불안감을 느끼곤 말을 더듬었다.
“무, 무얼 하려는 게냐?”
“다 알지 않느냐. 입을 막으려는 것이다.”
호만은 기겁을 했다.
“말도 안 된다! 엽소가 분명 살려준다 했거늘!”
사내는 가차 없이 그의 목을 쳤다. 호만의 목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사내는 그 후 답변을 해주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