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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92화


동천(冬天). 2부-2.

서장(序章).

그가 찾아온 것은 운명의 그날이었다.

“당신이 천마(天魔)시오?”

키는 8척에 달했으며 두 눈에 갈무리된 신광은 그가 가히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허나, 그렇다 하여 본 천마가 위축됨을 보여줄 리 만무한 법.

“그렇다. 본좌가 바로 마의 하늘이니라. 그러는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는 나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고수하던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치우(蚩尤)!”

3년 전.

어느새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생명들이 조심스레 그 날개를 펴고 약동하는 시기. 그러나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힘없는 듯한 목소리가 대청마루 위에 앉아있는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2년이라…….”

노인의 낮은 목소리는 거칠게 잠겨있었다. 무의미한 시선으로 그저 먼 산만을 바라보던 노인은 등뒤의 미약한 인기척을 느끼곤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다 끝난 게냐?”

소연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공님. 언제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진심이 서려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차분하고 온화한 자태가 느껴졌다. 이제 그녀의 나이 14살. 다소 철없고 울기만 잘했던 그녀가 2년이라는 시간동안 훌쩍 커버린 것이었다. 감송은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허, 이 늙은이가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또 마누라 등살에서 벗어나겠느냐. 내 누누이 말했거늘 너 또한 참으로 끈질기구나.”

소연의 볼이 사르르 붉어졌다.

“사공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소녀 또한 부끄럽습니다.”

그러자 감송이 재빨리 일어났다.

“내 더 이상 말했다간 너의 그 부끄러움이 하늘을 찌르겠구나. 허허, 잠시 마누라를 떠나있어 즐거웠건만 이젠 그것도 끝인가? 허허허.”

감송의 말대로 소연의 얼굴은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뒤에서 지금 상황을 다 엿듣고있을 사부에게 민망했던 것이다.

“그럼, 소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끄러웠던 그녀는 경공을 사용해 도망치듯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감송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신형을 돌렸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키에 연자주 색 경장을 입고있는 민소희가 조용히 그를 반겼다. 그녀는 2년 전보다 오히려 더 젊어져있는 듯 했는데, 아마도 소연 덕택에 피의 섭취 량이 충분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소연이도 그렇지만 당신도 참 끈질기군요. 언제나 나를 들먹이며 같은 대답을 들려주니 말이에요.”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뭐라고요?”

부인의 언성이 높아지자 찔끔한 감송은 급히 얼버무렸다.

“내가 뭐라고 했소? 그냥 그렇다는 게지.”

민소희는 고개를 절래 내둘렀다.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젠 면역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작정한 그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소문주님에 관해 알아오신 것은 있나요?”

감송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약전주의 말로는 흔적을 찾아서 뒤를 봐주고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게 자세한 정보는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소.”

“아직도 우리를 경계하는 건가요?”

감송은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나마 소연을 제자로 맞아들여 끈을 이어놓긴 했지만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아. 역시 소문주님의 행방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는가?”

민소희는 자신의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전 같이 갈 수가 없어요.”

감송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밀려왔다.

“알고 있소. 소연이는 적어도 3-4년을 더 배워야한다는 것을…….”

수긍하는 듯 했지만 감송의 노안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 있었다. 민소희는 자신의 태도가 남편의 심경에 위해되는 일이 없도록 좋게 이야기를 끌어갔다.

“소문주님의 행적이 정확하다면 저도 따라가겠지만 아시다시피 그렇지도 못한 상황이잖아요. 더군다나 요새 교주 측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아시었소?”

민소희을 얼굴에서 잠시 어두운 그늘이 걷혔다.

“그럼요. 제가 아무리 8할의 내공을 소실했어도 한때는 독살(毒殺)인 당신에 버금가는 위명을 떨쳤던 단묘(短猫)라고요. 요 근래에 기척을 죽인 자들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왔다갔다하지를 않나, 간간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색한 연기를 펴내질 않나. 호호, 당장에 쳐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 상황이 분할뿐이죠.”

어린아이의 손만큼 앙증맞은 그녀의 주먹이 심정을 대변하듯 으스러져라 쥐어졌다. 부인이 아직까지는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감송은 이제 이야기하기가 훨씬 편해졌다고 생각했다.

“좋소, 좋아. 당신을 염려하는 마음에 숨기려고 했지만 알고 있다니 지금 상황을 간추려 들려주겠소.”

민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감송의 말이 이어졌다.

“소문주께서 계실 때에는 언제나 멀리서 숨어 지켜보던 자들이 그분께서 나가시고 1달이 지나면서부터 우리들의 움직임을 가까이 에서 주시하기 시작했소. 그러나 섣불리 나서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지. 왜냐하면 청뇨로명단을 만들 때 내가 꽤 쓸만한 놈을 죽여놨기 때문이오.”

“실력을 알았으니 이곳의 거물급이 아닌 이상은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게야. 그런데 그들이 대놓고 나선다면 이곳 약전주의 시야에 걸릴 테고, 그럴싸한 변명을 댄다고 해도 꽤나 복잡하게 얽히겠지. 또한 나중에 가서 그 교주 놈의 비리가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후후, 모르긴 몰라도 강직한 부교주와 틀어질게 뻔한 일.”

“아직도 냉소천에 대한 복수는 우리 문주님께서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질문의 요지는 방금 감송이 말했던 것처럼 교주와 부교주의 사이를 급격히 틀어지게 만들어 분열시키는 방법은 써먹지 않을 거냐는 것이었다. 이에 감송은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물론! 그 방법은 문주님께서 직접 쓰신 후 이곳을 독으로 물들여야 하오. 나와 당신은 문주님께 모든 비밀을 말씀드린 다음 잔혹한 복수극의 한 축을 맡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민소희는 남편이 너무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 문주님의 복수를 위해 수하인 그들이 밑거름을 미리 뿌려주면 오죽 좋으랴.

허나, 모든 복수는 문주님께서 직접 손을 쓰셔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니 어찌 그녀가 갑갑하지 않겠는가. 이럴 때 소문주님이라도 계셨다면 좋은 방도가 있었겠지만 그 마저도 없으니 부인인 그녀로서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휴우, 좋아요. 상황이 이렇게 급박한데 그렇다면 이젠 어떻게 대처하실 거죠?”

감송은 잠시 침묵을 고수했다. 무슨 낌새를 느낀 것일까. 민소희의 주름진 눈가에 희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설마……, 결심하신 건가요?”

감송의 고개가 비장하게 끄덕여졌다. 그는 눈을 감고 나서야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그렇소. 이제 떠나야겠소.”

표정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민소희의 음성은 차분했다.

“시기는 언제인가요?”

“일주일 뒤라오.”

바른 생활 사나이가…

제 목:[연재] 동천 -26- 관련자료:없음 [13103]

보낸이:조재윤 (바른길12) 2001-01-13 07:25 조회:799

순간 민소희의 얼굴에 우려의 빛이 나타났다. 갖춘 것도 없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으음, 시간을 좀더 넉넉히 잡고 움직이는 건 어떨까요?”

감송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한 듯 털털하게 웃었다.

“허허허! 걱정이 되는 모양이구료. 하지만 마음놓으시오. 말이 일주일이지 그때 바로 떠난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요?”

“우선, 약 전주에게 가서 상의를 해봐야할 것 같소. 혼자 조용히 나가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말이오.”

민소희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끝났나요?”

그녀는 자신의 질문이 끝나자 고개를 젓는 남편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문제로 내일 일찍 찾아가 보려고 하오.”

이미 결심을 굳힌 남편에게 그녀가 좀더 시간을 갖자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소문주님이 기한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보장만 있어도 잡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조여오는 무리들과 냉소천의 비밀을 전해야하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남아있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소문주님이 밖으로 나가서 문주님에게 소식을 전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허나, 남편이 약전주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절강성과 정 반대쪽으로 움직이고 있다하지 않은가. 감송과 민소희의 입장에서는 냉소천의 비밀을 알고있는 소문주님이 어째서 곧바로 절강성쪽으로 가지 않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결정을 내리셨다니 저도 웬만큼은 준비를 해야겠군요.”

“부인의 마음은 고맙지만 만약 부인이 움직인다면 놈들이 눈치챌까 두렵소. 내 당신의 마음만 받겠으니 도와주려거든 평소와 같이 행동해주시오.”

……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지요.”

역천은 새벽녘에 잠이 깼다. 그러나 결코 기분 좋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2년 전 어느 날 곤히 낮잠을 자고있는데 제자가 피를 토하며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 꿈이었다.

“어째 꿈이 더럽네?”

오늘 꾼 꿈도 그때의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오늘 꿈이 그때와 달랐던 점은 멀쩡한 제자가 히히거리며 귀영유수를 가르쳐달라고 했다는 것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천은 안 가르쳐줬다. 지금 제자의 수준에서는 절대로 3단계의 경공을 익혀서는 안되니까.

거기에서 꿈이 끝났으면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매몰차게 거절을 하자 제자가 두 눈에 혈루를 뿌리며 사라졌다는 데에서 기분이 매우 잡쳤다. 아울러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그때당시 폐혈서생 자식과 엽소 놈의 부근에서 제자의 흔적이 발견되어 한동안 뒤숭숭한 밤을 보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이 사부를 불렀던 것이 아닐까?”

2년 전 그 당시, 폐혈서생과 안휘 분타에서 반역을 한 엽소가 공멸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 주위에서 제자의 흔적을 보았다는 역마대의 보고를 받게되었다. 당연히 역천은 깜짝 놀랐고 혹여 사랑스런 제자가 구경한답시고 꼽사리를 꼈다가 피해를 입었으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한달 뒤에 역마대가 무사하다는 보고를 올렸지만 그 동안 역천의 마음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한심이 다가와 ‘전주님, 피부가 많이 상하셨습니다. 헤헤, 요즘은 약발이 잘 안 듣나보죠?’ 라는 말까지 했겠는가. 그 뒤로 한심이 며칠간 사라진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추가로 말하지 않겠다.

“으음, 아무래도 불안해…….”

왔다갔다 갈피를 못 잡았다. 더군다나 무의식중에 경공을 펼치는지라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눈이 어지러워 핑핑 돌아갈 정도였다. 그러던 중 한 순간 신형을 멈춘 그는 쏜살같이 침대에 누웠다.

“아무래도 다시 꿈을 꿔서 사랑스러운 이 몸의 제자에게 무슨 일인가 물어봐야겠다. 그래, 그러는 거야.”

역천은 제자와 정신적인 공감대를 높이기 위해 귀의흡수신공 중 상단전을 운기했다. 그리곤 제자가 다시 꿈속에 나타나길 바라며 깊은 수면상태로 빠져들었다.

‘사랑스런 제자야, 어서 나와서 이 사부에게 무슨 일인가 설명해다오.’

그렇게 한 시진여가 지났을까?

“드르릉. 드르르릉…….”

아무래도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전주 님.”

섬세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역천은 너무도 깊은 잠에 빠져들어 깨어날 줄을 몰랐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던 문밖의 여인은 다시금 역천을 불렀다.

“전주 님, 송 영감님께서 오셨습니다.”

역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잠이 덜 깨 귀찮은 마음에 짜증스런 어투로 중얼거렸다.

“으음…, 나중에 다시 오라고 그래.”

감송은 자신이 너무 빨리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랐으니까.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초향은 그것을 알면서도 감히 역천을 다시 부르는 행동은 삼가 했다. 그녀는 감송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어제 밤 노곤한 작업을 하셨나봅니다. 두어 시진 후에 다시 오시지요.”

감송은 별 내색 없이 받아들였다.

“허허, 그리하겠네.”

한발 물러선 그가 역천을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정확히 두시진 뒤였다.

“정말 죄송 하외다. 사소한 일로 잠을 좀 설쳤더니 아침에 감송님께서 오신 줄도 몰랐지 뭡니까?”

정성스런 역천의 사과에 감송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별도 없이 일찍 찾아온 제가 무례지요.”

간단히 사과를 주고받은 역천은 감송에게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제자 놈 소식이 궁금하여 찾아왔습니까?”

아니라고 말하려던 감송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허허, 겸사겸사 왔답니다.”

역천의 눈이 반짝였다.

“겸사겸사라는 말씀은…….”

감송은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젠 가야지요.”

“으음? 이렇게 빨리 말입니까?”

역천은 곤혹스러워했다. 감송이 지금 떠나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아니, 떠나도 되지만 그의 최종목적지가 만독문이어서는 안됐다. 최후의 선택이지만 죽여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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