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1화
방 안에서 동천을 기다린다고 서성거리던 역천은, 동천이 왔다는 소리에 언제 서성였냐는 듯, 의자에 앉더니 점잖게 동천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앉아있던 역천은 동천이 들어오자, 그제서야 일어나서 제자를 반겼다.
“어서 오너라. 시비(侍婢)는 만나 봤느냐?”
“예, 사부님. 헤헤.. 오늘 왔더라고요.”
동천과 역천이 얘기를 나누자, 매향은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물러갔다.
“그만하면 괜찮지?”
사부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하던 동천은 긍정적인 표시를 했다.
“이해력(理解力)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마음에 들어요.”
“그럼, 됐다. 그건 그렇고 오늘 내가 너를 부른 이유를 말해주마. 며칠 후에 교내의 사람들에게 너를 소개해주는 자리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앞으로 네가 개인적으로 알아두면 좋을 듯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일부터 몇몇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요?”
“그렇다.”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원래 쩔쩔거리며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동천은 무척 기뻐했다.
“헤헤.. 그럼, 얼른 가요.”
역천은 동천의 그런 반응에 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면, 꺼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동천이 좋다고 하자, 일이 술술 풀려 기분이 좋았다.
“그전에… 이 요대(腰帶)=허리띠를 차봐라.”
역천이 앞부분의 연결 부위가 동그랗게 생긴 밋밋한 가죽 허리띠를 건네주자, 얼떨결에 받아든 동천은 허리띠를 차려고 허리띠의 동그란 앞부분을 만지자, 갑자기 내공이 흩어지는 현상에 깜짝 놀라며 허리띠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공이 흩어지는 게 아니라 흡수됐다고 하는 게 옳다고 볼 수 있었다.
“앗! 이게 뭐예요? 순간적으로 제 내공이 흩어졌어요!”
역천은 동천의 당황한 모습에 잠깐 웃고는 바닥에 떨어진 허리띠의 중간 부분을 잡고, 들어 올렸다.
“어떠냐.”
“예? 어떻냐니요?”
“흐흐.. 좀 놀랐지? 지금으로부터 이백여 년 전에 대려산에 운석 하나가 떨어졌었다. 그 여파(餘波)로 지금, 대려산엔 분화 자국이 남아있지. 그 당시 놀란 암흑마교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운석이 떨어진 곳에 찾아갔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 다른 사람들은 곧이어 별일이 아니라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진 줄 알고, 안심하고는 산 밑으로 내려갔었단다. 그러나.. 흐흐흐… 오직, 한 분만이 전날에 꿨던 예지력 때문에 그 자리에 남으셨었단다. 그분이 누굴 것 같으냐?”
예지력이 나온다면 뻔에 뻔짜였다.
“우리 귀문의 선대분이시죠?”
역천은 동천이 알아맞히자,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하하하.. 맞다. 맞아. 그 자리에 계속 남아 계시던 평차도(坪次道)님께서는 불에 그을린듯한, 돌을 만지다 놀라 하던 예지력이 마음에 걸려서 꿈에 보았던 것과 똑같이 생긴 큼직한 운석 덩어리를 주워 들었단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분의 내공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걸 느끼신 평차도님께선 운석을 바닥에 떨어뜨린 후 웃옷을 벗으시고, 그 돌을 싸서 그분의 거처로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5년 동안 연구(硏究)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그 운석 덩어리가 단순히 내공을 흡수하는 것보다는 일정한 분량의 내공만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 일정한 분량의 내공만을 흡수한다니요…?”
역천은 동천이 못 알아듣자, 좀 더 자세히 가르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자야.. 아까 허리띠를 만졌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그 느낌이 어떠했느냐?”
아까의 현상은 정말로 신기했기 때문에 평소, 깊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었던 동천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신중하게 대답한 뒤 얘기했다.
“음… 그러고 보니… 제 내공이 순간적으로 흩어질 때.. 전부 흩어졌던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바로 그거다. 그분께서 알아내신 게 바로 그거였단다. 그 돌멩이는 신기하게도 어떠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든지, 어느 정도 일정한 시간을 지니고 있으면, 처음에는 거의 내공을 빼앗아가지만 나중에는 전체 내공의 육할 이상은 빼앗아가지 않는다.. 이 말이다.”
신기하긴 신기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근데요..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저한테 그 허리띠를 차게 하는 거예요?”
“엉? 하하하.. 그걸, 깜빡했구나. 이제부터 상세히 말해주마. 너는 처음, 여기에 올 때 무공을 모르는 상태였었다. 맞지?”
사부의 질문에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그런데요?”
“흠흠.. 그런데 말이지.. 만약에 고수가 너를 보고는 내공이 있다는 걸 알아채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의술에 대해 어느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금세 너의 변화를 알아차렸듯이, 다른 고수들도 금방 알아챌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꼼꼼히 살펴보면 네가 몸에 내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당연히 너에 대해 궁금해하겠지? 왜, 내공이 있으면서 숨기고 있었을까?..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삽시간에 조용히 퍼질 것이다. 어떠한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듯이. 어떠한 사람에게는 넌지시 건네는 화제(話題)거리로 또, 어떠한 사람에게는 “그거다!”라는듯이….. 내 말뜻을 알겠느냐?”
역천이 끝부분에 힘을 주며 얘길 하자, 한참 동안 그 말을 되씹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모른다는 말이 허락지 않는 동천으로서는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위해 조리 있는 말투로 말을 얼버무렸다.
“어느 정도…”
다행히도 동천의 말투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 만약에 네가 순간적으로 내공이 생겼다는 것을 교주 쪽에서 안다면, 만독노조의 일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냐. 충분히 이해가 가겠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로 큰일 날 것 같았다.
“아.. 그런 일이..”
“흐흐.. 이제 알겠느냐? 그런 고로, 내가 특별히 허리띠 속에 그 운석을 집어넣어 준 거다. 처음에는 네 내공을 잠시 폐쇄하려고 했었지만, 이 방법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이 사부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에 만들어 준 것이니, 오늘부터 허리에 차고 다니도록 해라. 어느 정도 익숙해져야 하니까.”
아까의 느낌으로는 허리띠를 맨다는 게 좀 께름칙하기는 했지만, 일의 중요함을 깨달았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동천이 허리띠를 매려고 운석이 들어있는 앞부분을 잡자, 내공이 놀라운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섬찟했다. 내공이 빨려 나간 동천은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털-썩..!”
허리 둘레에 맞춰 구멍에 껴 넣으려고 하던 동천은 몸에 있던 내공이 갑작스레 빠져나가자, 온몸에 힘이 없는 게 황당하고 두려웠다. 지니고 있던 내공이 빠져나가는 게 이런 현상을 초래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몸에 힘이…”
“하하.. 걱정 말아라.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면 돌아다니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도 없을 것이다.”
과연, 역천의 말대로 이각 정도를 빌빌거리자,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단전에는 내공이 텅텅! 비어 있었지만, 신기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에구.. 죽는 줄 알았네..”
동천이 벽에 기대어 있는 동안에 철과상에 탁월한 효능(效能)을 지닌 약초들을 배합하고 있던 역천은 동천이 조심스레 일어나자, 빙긋 웃었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겠느냐?”
“예. 이거, 굉장한데요? 음.. 내공을 흡수하는 돌은 처음 봐요. 참! 그런데요.. 이 돌이 이렇게 내공을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거라면, 흡수된 내공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동천의 물음에 역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글쎄다. 그것에 관해서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흡수한 뒤 다시 밖으로 배출하지 않을까 싶다.”
“왜요?”
“왜냐고? 생각해봐라. 어떠한 그릇이든지, 일정한 분량(分量)만을 집어넣을 수 있다. 나는 이 돌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흡수는 하겠지만, 나머지는 다 밖으로 배출하리라고 생각한다. 음.. 이 정도면 됐느냐? 정 궁금하면, 네가 평생을 가지고 연구해 보거라. 누가 또 아냐? 네가 그 운석에 대해서 또 다른 효능을 알아낼 수 있을지?”
동천은 역천이 평생을 가지고 연구해보라는 말에 기겁하며 말했다. 잠시만으로 족했기 때문이었다.
“예? 아.. 저기, 저는 그렇게 자세히 알지 못해도 괜찮아요. 저, 그만 가도 되나요?”
“응? 아직, 안된다.”
“어? 왜요? 할 일이 더 남아있나요?”
“그렇다. 여기에 남아서 사람들과의 기본 예절을 좀 연습하다 가거라.”
역천의 말인즉, 내일부터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다 고위층들이라서 서로, 만났을 때의 예의와 인사를 주고받을 때의 예의 등..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연습하다 가라는 얘기였다. 동천은 무려 두 시진 동안, 몇 가지 동작만을 반복해서, 역천에게 예절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시간이 좀 흐르자 지겨워졌다.
“사부님. 이만했으면 되지 않을까요..?”
“오.. 그래. 내가 너무 너를 잡아뒀구나. 그래.. 얼른 가보아라.”
역천도 동천이 군말 없이 잘 해내자, 긍정의 표시를 했다.
“예, 사부님. 그럼, 나중에 다시 뵐게요.”
“오냐. 오냐.”
인사를 하고, 나갔던 동천은 다시 돌아왔다.
“저.. 사부님.”
“응? 왜 그러냐? 뭐, 잊은 게 있냐?”
동천이 다시 돌아오자, 역천은 제자가 뭐 잊은 게 있어서 온 줄 알았다.
“그게 아니고요. 돌아가는 길을 몰라서.. 헤헤.”
“응? 푸헤헤헤! 알았다. 알았어. 킬킬킬.. 얘, 매향아!”
역천이 매향을 불렀지만, 조금 있다가 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이에 의문을 느낀 역천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더니 새로운 여자를 보며 물어보았다.
“응? 매향이를 불렀는데, 왜 초향(草香)이 네가 왔지?”
초향이라 불리운 소녀는 역천의 질문에 허리를 다급히 숙이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죄송하오나, 매향이가 지금 체했기 때문에 소전주님을 바래다줄 때, 심려를 끼쳐드림이 염려스러워 제가 대신 왔사옵니다. 매향이 체한 건 소전주님께서도 아신다고 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가만히 옆에서 초향의 얘기를 듣고 있던 동천은 자기가 안다고 하자, 기분 좋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예! 맞아요. 아까, 한바탕 토했었어요. 그건 제가 보장해요.”
“그러냐? 그럼, 초향이 네가 내 제자의 집으로 데려다주어라. 실수없이 공손히 모셔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초향은 인사를 마친 뒤 조용히 앞장섰다. 초향이 안내를 하자, 다시 한번 사부에게 인사를 한 동천은 점잖게 팔자걸음으로 뒤따라갔다. 한참을 걸어갈 때 초향은 왜 매향이 자신더러 대신 가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초향은 조금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매향이 자신을 보고 애원조로 말했던, 아까의 일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