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2화
“초향아앙~! 부탁이 있어.. 들어줄 거지? 그렇지?”
난데없이 들어와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콧소리까지 내며 자신에게 부탁을 하자, 당황해 하던 초향은 자신에게 안겨드는 매향을 밀쳐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턱대고 부탁을 들어줄 거냐니..”
밀쳐졌던 매향은 다시 안겼다. 초향은 여자끼리 안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끈덕지게 붙어 달리면, 금방 들어주곤 했다. 그렇다고 처녀인 초향이 남자에게 안기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 아니었다.
“으응.. 그 부탁이 뭐냐 하면, 이따가 분명히 전주님께서 소전주님을 다시 데려다주라고 나를 다시 부르실 게 틀림없다고, 그러면 네가 대신 나가서 내가 체해서 내 대신 왔다고 말하면 될 거야. 아 참. 그리고, 소전주님도 내가 체한 것을 아니까 그분께 확인을 부탁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어때? 응? 내 부탁, 들어줄 거지? 그렇지?”
매향의 안김이 성공을 거두었는지, 징그러운 눈초리로 매향을 밀쳐내던 초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 알았어. 그러니까 네 말은 네 대신에 소전주님을 바래다드리면 된다는 얘기지?”
매향은 정말로 기뻐했다.
“맞아, 맞아. 정말, 고마워. 내 이 은혜는 절대로 안 잊을게…”
초향은 매향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또 안기려 하자, 살며시 피하며 멀찌감치 물러났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안겨.”
초향은 매향이 안기려 하자, 피하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매향의 야릇한 웃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렇게 소전주님과 같이 가기 싫어했던 거지? 난 조용하고 좋기만 한데…?’
처음에는 이 소전주가 손버릇이 나빠서, 앞서가는 시녀들의 엉덩이나 다른 부위들을 만지는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황당한 일을 시키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초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로 매향이 체해서 자신더러 대신 가라는 걸로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초향이 그런 생각을 마치자, 동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이봐.”
앞서 걸어가던, 초향은 동천의 부름에 잠시 멈춰 섰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 길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맞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이 길 아닌 것 같은데? 아까 오던 길은 이 길이 아닌 것 같았는데 왜 이 길로 가고 있는 거지? 만약에 다른 길로 가는 길이라면 왜 다른 길로 간다는 말을 처음부터 안 했던 거지? 내 집으로 가는 길이 많으면 많다고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냐?”
초향은 동천이 그냥 이 길 맞아? 하고 물으면 될 것을 길게 늘어뜨리자, 잠시 정리를 한 후 간단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응? 뭐가 맞다는 말이지? 이 길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맞다는 얘기야? 아니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맞다는 얘기야? 아니면, 내 집으로 가는 길이 맞다는 얘기야?”
초향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다시 결론을 얘기하자면 이 길 맞아? 였다.
“네. 아까전에 매향이 모시고 올 때 어느 길로 왔는지 모르지만, 소전주님의 집에서 전주님이 계시는 곳까지는 총 세 군데의 길이 있습니다.”
동천은 자뭇 흥미로운 눈길로 물어보았다.
“세 군데나 된다고?”
“그렇습니다. 지금 제가 모시고 가는 길이 중로(中路)입니다. 매향이 어느 길로 모시고 왔는지는 죄송하게도 모르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세 갈래나 된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갈 생각은 안 하고 멍하니 서 있는 동천을 바라보는 초향의 시선은 긴장에 가득 차 있었다.
“저… 안 가실 겁니까?”
멍하니 서 있던 동천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뭐? 아.. 그래, 가야지. 어서 가자.”
초향은 별일이 아니자, 은근히 불안해했던 자신을 속으로 책망했다. 아까 매향의 행동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자, 가벼운 마음으로 안내를 하던 초향은 무사히 암한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전주님. 다 왔습니다. 그럼…”
“어? 어디가?”
초향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소전주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왜 그러시죠? 제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데…”
“으응, 별일이 아니라, 소전주나 되는 내가 사부님이 계시는 곳을 모른다고 하면, 말이 되겠어?”
초향은 왠지 불안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것과 저하고 무슨 관계가….”
동천은 초향의 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 힘이 없었던 초향으로써는 어쩔 수 없이, 뒤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던 동천은 조금 후에 붓과 먹, 그리고 화선지를 들고 나왔다. 그것을 궁금해 여긴 초향은 조심스레 물어봤다.
“저.. 그것은 왜..?”
“이거? 뭐긴, 뭐야. 약도(略圖)를 그리위한 도구(道具)지!”
동천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했지만, 초향은 깜짝 놀랐다.
“예?”
초향이 놀라 주춤거리고 있을 때, 동천은 얼른 가자는 듯이 초향의 손을 잡아끌었다. 초향이 동천이 하려는 짓에 황당함을 느끼며, 끌려가고 있을 때, 때마침 인기척을 느끼고 자신의 방에서 나오던 소연이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동천을 본 소연은 급히 나왔다.
“아.. 주인님 오셨어요?”
그제서야, 막무가내였던 동천이 멈추었다.
“어? 마침 잘됐다. 너도 같이 가자.”
“예? 어디로요?”
소연이 의아해하자, 동천은 왜 가자고 했는지에 대하여,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아-아..! 그래서 세 길을 다 둘러보시겠다구요?”
“그래, 그러니까 어서 가자.”
“호호,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러시지 마시고, 잠깐만 기다리세요.”
동천에게 기다리라고 한 소연은, 쏜살같이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두 장의 종이를 들고 나오더니, 동천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어? 이건…”
소연은 동천이 자신이 가져온 것을 보고 놀라자, 주인님께서 손수 약도를 그리시는 수고를 덜어줬다는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헤헤.. 그건요. 제가 약왕전의 길과 장소를 알기 위해 받았던, 내부도예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여기 암한문의 내부도구요..”
동천은 자세히 설명해주는 소연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래도 데리고 있으면, 도움이 되기는 되는구나 했다. 소연은 기분이 좋아서 웃다가 그런, 동천의 시선을 받자,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수그렸다.
“이봐, 그만 가도 좋아. 소연아, 들어가자.”
동천은 이제 초향에게 볼일이 없어지자, 가라고 한 뒤 소연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초향은 다행스럽게도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지만,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초향은 자신이 힘들게 소전주를 안내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안도의 한숨을 쉰 뒤 돌아갔다. 반각여를 걸어 자신의 방에 들어가자, 뜻밖에도 매향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한 모습으로 서있던 매향은, 초향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들어오자,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 눈빛이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이나 동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어서 내심 기분이 상했다.
“초향아.. 너 괜찮아?”
“응?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
매향은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얘도 참..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눈치네?”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매향은,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나가며 말했다.
“아.. 아냐… 나, 이만 가볼게…”
“매향아! 왜 그래? 나 참….”
매향은 뭔가 숨기는 듯했지만, 쫓기듯이 도망갔으니 알 길이 없었다. 한동안 이상하다… 했지만, 나중에 만나면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뒤, 전주님이 따로 부를 때까지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연의 손을 잡아끌고, 들어가던 동천은 소연이 잽싸게 따라오지 못하고, 엉거주춤하자 뒤돌아 보았다.
“야, 빨리 와.”
“저기.. 죄송하지만.. 손 좀..”
소연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을 놓아달라고 하자, 동천은 의외로 순순히 놓아주었다.
“왜? 내가 손잡는 게 싫어?”
동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어보자, 소연은 그게 아니라는 듯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요. 그렇기보다는….”
그렇다. 아니다.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을 못하고, 중간쯤으로 흘려서 말하는 소연을 보자, 동천은 그 성격이 춘천을 많이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됐어. 나는 이거나 볼 테니까, 그만 가봐.”
“예,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연은 혹여, 자신을 부를세라, 자신의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자, 동천은 소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쯧쯧쯧… 아무리 생각해도, 쟤는 생각이 너무 앞서간단 말이야?”
방 안으로 들어가 내부도를 바라보던 동천은 하는 짓이 늘 그렇듯이 조금 보다가 질려서 보는 것을 포기했다. 저녁이 되자, 저녁밥을 먹고 난 동천은 항광이 준 책을 조금 보다가 잠이 들었다.
“으… 뭐야?”
차가운 느낌에 눈을 뜬 동천은 축축한 침대의 느낌에 잠에서 깼다. 그러자, 놀랍게도 방 안에 물이 계속,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엇? 이게 무슨 일이지?”
철퍽,, 철퍽…!
황급하고, 두려운 마음에 침대 위에 있던 동천은 재빨리 일어난 뒤에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순간, 엄청난 양의 물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콰과과과—
“웃! 푸.. 우왔! 어그르르르…”
물이 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게 된 동천은 강한 물살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정신을 잃어갔다. 그때, 동천의 손등을 어떤 미끈덩한 물체가 스쳐갔다.
‘으.. 뭐.. 뭐지? 이.. 느낌은..??’
혼미한 기억 속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손등을 스친 게 무엇인지 알고나 싶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흙탕물뿐이었다.
‘제길…’
그러고는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