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7화
“아참, 이름이 뭐예요?”
수련의 물음에 빨리 갈 생각만 하고 있던 소연은 깜짝 놀라며, 엉성하게 말했다.
“예? 제.. 이름요?”
“호호, 긴장했나 봐요? 늦은 것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소연은 핵심을 콕! 찌르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걱정 말아요. 그보다 이름이 뭐예요. 이번이 두 번째로 물어보는 거니까 이번에는 꼭 말해줘야 해요.”
“소연(小蓮)이 예요..”
“소연이요? 호호, 내 이름이랑 비슷하네? 나이는요?”
수련은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자못 흥미로운 눈길을 주었다.
“열 살이 예요..”
“어?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높네요?”
“그런가 보죠…”
소연은 처음 보는 사람의 앞에서는 수줍음을 많이 탔기 때문에 수련이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요..? 흐음..”
“…..”
수련이 침묵을 지키자, 어색한 분위기가 마차 안을 감돌았다. 소연은 그런 침묵이 정말 싫었다. 그러나 이러고 있는 자신이 더 싫었다. 그때, 갑자기 수련이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련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언니 동생 사이 할래요? 내가 한 살 어리니까, 당연히 동생 할게요.”
“예? 아.. 저기.. 저는…”
소연은 갑작스러운 수련의 제의에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못했다. 수련은 그런 소연을 다그쳤다.
“왜요? 싫어요? 나는 언니가 생기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하지만, 저는.. 신분이…”
수련은 소연의 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평소에 아가씨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 때문에 남들이(다른 하인들.) 좀 거리를 두고 대했었다. 그래서 주위에 또래의 친구가 없던 수련은 지금을 기회로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언니를 두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머? 몰랐어요? 나도 언니와 신분이 똑같아요.”
“저.. 정말?”
“호호호. 몰랐나 보네? 동천이 이야기 안 해줘요?”
소연은 수련이 주인님을 자기 친구 대하듯이 말하자 깜짝 놀랐다.
“앗! 저기.. 주인님의 이름을 마구 불러도 돼..? 그러면, 큰일 날 텐데…”
그 말에 수련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었다.
“호호호. 걱정 말아요. 글구, 주인님이 뭐예요? 그냥 동천이라고 그러지. 이제부터 내 언니가 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요.”
소연은 당황하고도, 두려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너는.. 나와 똑같은 하인인데 어떻게 주인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거지?”
수련은 소연이 말을 놓자, 드디어 자신에게도 언니가 생겼구나 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우와! 드디어 저를 동생으로 생각하는 건가요? 그런 거예요?”
소연은 자신의 질문과는 엉뚱한 대답이 나오자 저으기 당황했다. 그러나 수련의 말에 대답을 안 해줄 수도 없고 해서 순순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 네가 제의를 할 때 마침, 나도 아는이 하나 없어서…. 허락하는 거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먼저, 제의한 것이니…
“그럼요. 그럼요. 아이 좋아라.. 참,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해요.”
“맹세?”
“그래요. 맹세. 우리 둘이 의자매를 맺었다는 것에 대한 맹세 말이에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으응.. 괜찮기는 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요. 우선 나처럼 두 손을 모아봐요.”
“이렇게?”
소연은 수련이 손을 모으자, 곧바로 따라했다. 수련은 소연의 합장 자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됐어요. 자.. 그럼. 눈을 감고….”
“감고…”
“…..”
“……”
잠시의 침묵(沈黙)이 흐르자, 수련은 눈을 떴다.
“내가 말할까요?”
“응? 으응.. 네가 해. 나는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소연의 말에 수련은 알았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았다. 소연은 수련이 눈을 감자, 자신도 얼른 눈을 감았다. 수련은 눈을 감은 척하다가 실눈을 뜨고, 소연이 확실히 눈을 감았는지 확인했다. 수련은 소연이 확실하게 눈을 감았다는 것을 보자, 자신도 눈을 감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비록, 우리 두 사람이 한 몸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천지신명님의 은혜로 이렇게 의자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연 언니를 친언니를 대하듯이 대하고…”
잠시 말을 멈춘 수련은 소연이 말이 없자, 살며시 소연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제서야 눈치챈 소연은 그 다음 말을 자신이 이어 말했다.
“저는 수련을 제 친동생 대하듯이 하겠나이다. 만약에 이 맹세를 어길 시에는 천지신명께서 내리시는 그 어떠한 가혹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나이다….”
말을 마친 소연은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비록, 핏줄은 다르지만 지금의 맹세로 친동생과 다름없는 동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기쁜 마음에 우는 것이었다. 수련도 소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 눈물을 눈물을 글썽이며, 소연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언니, 울지 마.. 언니가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잖아…”
“그래, 안 울게.. 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수련도 따라 울었다.
“언니.. 엉엉…!”
“안 울게.. 흑흑,, 안 울게…”
둘은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꺼-억!”
동천은 무려 일곱 그릇이나 퍼먹은 뒤, 조금 쉬다가 두 그릇을 더 먹고는 허리춤을 푼 다음 툭 튀어나온 배를 드러내며 이를 쑤시고 있었다. 쑤셔봤자 나올 건더기도 없었지만…
“쩝쩝..! 어, 배부르다. 으아.. 이제야 살 것 같네?”
배가 부른 동천은 아직 남은 죽들을 아깝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가서 누으려는 것이었다.
“에구에구.. 하도 먹었더니, 움직이기도 힘드네.. 헥헥. 배부르니까 숨 쉬기도 고역(苦役)인데?”
동천이 숨을 헐떡이며 침대로 다가갈 때, 방문이 열리며 소연이 들어왔다. 그 뒤로 수련이 쟁반 위에 죽을 올려놓고 들어왔다.
“동처언~! 많이……?”
“어? 수련 왔어? 웬일이야?”
동천은 수련을 불렀다는 것 자체도 까먹고 있었다. 수련은 동천의 말에 황당해했다. 잠시 멍해있던 수련은 조금 후에 눈앞의 전경을 보았다. 차곡차곡 쌓여져있는 빈 그릇들과 인간의 배라고는 믿기지 않는 동천의 맹꽁이 배… 화가 났다. 그것도 무지하게..
뒤따라 들어온 소연은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자, 수련이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어떡 하나했다. 수련은 쟁반 위에 있던 죽을 식탁에 내려놓더니 쟁반을 들고 천천히 동천에게 다가갔다.
“호. 호. 호.. 죽 잘 먹었어??”
눈치 없는 동천은 따라 웃었다.
“히히.. 끄-윽! 그래, 잘 먹었어…”
동천의 그런 모습에 수련은 씨익 웃더니 들고 있던 쟁반을 일자로 세워서, 그대로 내리쳤다.
“퍼-억!!”
동천의 머리에서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충격이 머리에 전해지자, 그 충격으로 시야가 잠깐 차단됐던 동천은 조금 후에 시력이 회복되면서, 통증도 같이 느끼게 되었다.
“끄아악! 나 죽어! 나 죽어! 쓰..읍! 이게 무슨 짓이야-!”
안 맞아본 사람은 모르지만, 가로가 아닌 세로로 세워서 쇠쟁반을 있는 힘껏 내리친다면, 맞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건 거의 살상용(殺傷用)이나 다름없었다. 한 대 때렸던 수련은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들고 있던 쟁반으로 계속 내리쳤다.
콰앙! 쾅! 쾅! 쾅!
아… 한 맺힌(?) 여인의 복수는 무서웠다….
“이, 나쁜 놈아! 네가 죽 처먹고 싶다고 해서 무공 수련(武功修練) 하다 말고, 여기까지 와서 죽을 만들어 왔더니, 하는 말이 뭐? 웬일이야? 너 죽 처먹고 죽어볼래?”
그래도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이번에는 넓적한 부분으로 내리쳤다. 그런 둘의 모습에 소연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한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윽.. 야! 이 계집애야! 으-엑! 나 죽어!!”
수련은 동천이 자신을 계집애라 욕하자, 다시 쟁반을 세워서 한 대 더 내리쳤다. 동천은 두 번째의 고통에 더는 못 참겠는지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수련은 그런 동천을 한 대라도 더 때리려는 듯 발이 완전히 침대 밑으로 들어갈 때까지 두드려 팼다.
“허억.. 허억…”
까-앙. 그르르르르….
동천이 침대 밑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련은 그제서야 쟁반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숨을 가다듬을 때까지, 침대 밑을 째려보던 수련은 소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언니, 나 갈게요. 그리고 저 자식이 언니를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단숨에 달려와서 때려줄 테니… 알았죠?”
“으응.. 그래…”
소연은 한순간 수련이 위대해 보였다.
“아휴! 열받어. 너, 동천.. 우리 언니 괴롭히면 알아서 해!”
그러자 침대 밑에서 동천이 소리쳤다.
“싫어! 괴롭힐 거다.”
“뭐? 야! 너, 이리 나와!”
동천의 말에 더욱 화가 난 수련은 끝을 보려는 듯 자신도 따라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소연의 노력으로 겨우 말릴 수 있었다.
“수련아.. 이제 그만해.. 응? 그만하면 됐어.”
수련은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휴.. 알았어요.”
수련이 여기에 계속 있으면, 일이 더 커질 것 같기에 소연은 얼른 말했다.
“그래. 그래. 수련아. 잘가.. 내가 틈나면 놀러갈게..”
“언니, 화내서 미안해요. 나갈게요. 으이그.. 열받어.”
“알았어..”
수련이 나가고 잠잠해지자, 동천은 침대 밑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며 말했다.
“갔냐…?”
“예.. 갔는데요.”
소연이 갔다는 말에 잽싸게 기어나오던 동천은 순간적으로 멈칫! 했다. 아까 정신없이 맞을 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침대 밑으로 들어갔지만, 막상 나오려고 하니까 배가 껴서 못 나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동천은 소연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 배가 낀 것 같아.. 나 좀 끌어주라…”
“예? 호호호…”
동천은 소연이 웃자, 인상을 찡그렸다.
“어? 웃어?”
“앗! 죄송해요..”
동천의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연은 무안한 모습으로 동천의 두 손을 잡아끌었다.
“힘.. 줘! 힘줘.. 히임….”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동천을 끌어내던 소연은 동천의 몸이 빠지면서 그 힘에 못 이겨,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아앗! 엄마야…”
그런데 뒤로 넘어지는 게 너무 강했는지, 치마가 들리고 속치마까지 위로 제쳐지면서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기겁을 한 소연이 얼른 치마를 내렸지만, 동천은 볼 것 다 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동천이 그걸 보고 어떠한 느낌이 든다거나 하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은 소연뿐이었다. 소연은 침대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동천이 쓰러져있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려고, 다가오는 것을 이상한 생각을 했는지, 두려워하는 얼굴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