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95화
잔존사념(殘存邪念).
동천은 꿈을 꾸었다. 이젠 이력이 나서인지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쳇, 또 폐혈인가 토혈인가 하는 자식이 나오겠지?”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빨리 일을 끝내자는 폼 같았다.
“야 임마! 나 바빠. 얼른 깨서 소구 자식 것도 먹어야 한단 말야!”
지금 상황에서도 그것을 생각하다니. 실로 대단한 동천이었다. 사실 첫 번째 먹을 때는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헌데 두 번째로 먹을 때는 그럭저럭 죽지 않고 먹을 만했다. 그리고 이제는 대충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급속도로 적응하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내공을 제압 당하고부터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의아할 정도로 너무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이 몸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을 아직 못 찾겠단 말야?”
휘이이이잉-!
돌연, 하얀 안개가 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이 쓸고 간 자리에는 푸른 초목과 넓은 분지를 감싸안은 듯한 산봉우리가 둘러싸여져 있었다. 곧이어 맑았던 주변이 점점 안개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얼레, 여기가 어디랴? 오늘은 좀 색다른데?”
주위는 왠지 낯익었다. 풀 밟는 느낌이 생소한 가운데 붉은 독사가 거침없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웃? 깜짝이야. 저게 죽으려고 환장했나. 콱, 껍데기를 벗겨버릴까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주위를 좀더 둘러보자 눈에 띄는 것은 독사와 독충들뿐이었다.
“가만, 여기가 혹시…….”
동천은 이곳이 형운곡 내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림이 없었다.
“형운곡 같긴 한데 어째 좀 달라 보이네? 그새 나무 좀 심고, 잘 자라라고 거름도 좀 뿌려줬나?”
농담조로 말한 것이지만 확실히 동천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나무들이 빽빽했다. 그때 무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던 동천은 이미 중년남자의 시야에 잡혀버리자 어정쩡한 자세로 자신을 소개했다.
“헤헤, 안녕하세요? 꿈 많고 재주 많은 동철이라고…….”
동천의 자기소개는 ‘합니다.’ 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상대 중년인은 그를 못 본체 지나쳤던 것이다. 한참 앞에서 멈춰선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언덕 쪽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동해 빨빨거리고 쫓아온 동천은 내심 염두해둔 것이 있어 대놓고 소릴 질렀다.
“이봐요! 저 안보이세요?”
상대는 전혀 안 들리는 듯했다. 간이 커진 동천은 상대의 앞에서 엉덩이를 까 내리고 좌우로 흔들었다.
“어이, 이 매력적인 엉덩이가 안 보이는가? 히히히!”
그러자 얼굴을 굳힌 사내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놈, 주제를 모르는구나.”
“히익?”
기겁을 한 동천은 재빨리 엎드려 빌었다.
“아이고, 어르신! 집에 딸린 자식이 둘이고요. 어머님께서는 저만 바라보고 계십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일단 지껄이고는 봤는데, 아무래도 헛소리를 한 것 같았다. 그의 나이 몇인데 애가 둘이겠는가. 그는 급히 말을 정정했다.
“흑흑, 저는 그 딸린 자식들 중 하나인데요. 어머님께서는 저를 낳으시느라 고생을 하셔서…, 에, 이것도 아닌데. 어쨌든 살려주세요.”
그는 동천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그냥 통과해버렸다.
“엥?”
동천은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상대가 지나쳐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저항 없이 통과해버린 것이다. 말똥말똥 눈만 끔뻑이던 그는 뒤늦게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맞아, 여기는 꿈이었지? 괜히 놀랐네.”
그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벌떡 일어섰다.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내 이놈의 새끼를!”
꿈이라는 사실을 염두해두고 정신을 집중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중년인을 따라잡았다.
“이 잡놈아! 니가 감히 이 몸을 가지고 놀았냐? 너 한번 죽어볼래?”
동천의 멱따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중년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뛰어 올라 어느 동굴의 입구에 착지했다. 입구에는 두 명의 무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잠깐 놀라는 듯 싶다가 곧이어 고압적인 자세로 칼을 빼들었다.
“누구냐! 간이 크구나!”
“형산파의 잔당이냐?”
시골 농사꾼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용모의 중년인은 어느 정도 무성하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끊어질 뻔한 형산파의 맥을 살려주긴 했지만 잔당과는 거리가 멀다.”
중년인에게서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자 한 무사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곳은 본문이 한번 쓸어버린 곳인데, 이렇게 찾아와 맥이 이어진 사실을 가르쳐주니 고맙구나. 다시 쓸어버려야겠는걸? 그 전에…….”
스팍!
무사의 재빠른 도법이 전개되자 동천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저 보초 새끼. 제법인데?’
수평으로 몸통을 베는 듯하다 휘어서 목을 올려치는 수법은 대단히 매끄러웠다. 자칫 방심하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갈 정도였다. 그만큼 상당한 수련을 쌓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상황이건만 중년인은 손바닥을 펴서 태평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곧이어 자세히 듣지 않고는 들리지 않을 ‘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
동천의 감탄사였다. 공격해 들어오던 무사가 눈이며 코, 입, 귀까지 칠공에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졌던 것이다. 그 즉시 심각한 상황임을 깨닫고 뒤로 물러선 다른 무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려주시오. 묻는 말에는 모두 답해주겠소.”
중년인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필요 없다. 죽여서 들으면 되니까.”
“뭐, 뭐라고? 크억!”
그 사내 역시 이상한 손짓에 나가 떨어졌다. 바로 옆에서 그것을 지켜본 동천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아하게도 흥미롭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참 특이한 무공이네? 침투경(浸透勁)의 일종인가?”
그 사이 가까운 곳에서 죽은 이에게 다가간 중년인은 한 손을 죽은 자의 머리에 얹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인간, 뭐 하는 짓이랴?”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동천은 곧이어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에 쩍 하고 입을 벌렸다.
“묻는다. 이곳의 총 책임자와 비중 있는 자들을 말하라.”
믿을 수 없게도 죽어있는 사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크륵, 이, 이곳의 총… 책임자는 무, 문주님. 유, 육당(六堂)의 제 삼, 오 당주. 이하, 꾸르륵! 이, 이하 향주 셋. 나, 나머지는…….”
더 들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중년인은 죽은 자에게서 손을 뗐다.
“됐다. 네 할 일은 이제 없다.”
그와 동시에 입에서 피 거품을 게워낸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눈을 들어 전방을 바라본 중년인은 거침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중년인을 바라보는 동천의 심정은 한마디로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저, 저! 뭐 저따위 자식이 다 있지? 죽은 놈한테 정보를 캐낸단 말야?”
황당해서 쫓아갈 생각조차 못했다. 그는 뒤늦게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뛰었다. 동천의 지금 상태를 반증하듯, 신법조차 까먹고 헐레벌떡 뒤쫓아갔다. 바로 그때 또 한차례의 바람이 불더니 주위의 사물들을 뒤바꿔놓았다. 그리고 동천이 서있는 곳은 수많은 횃불들이 불을 밝히고있는 통로였다. 동천은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척하니 알아 맞혔다.
“히야, 아주 편리한 꿈이잖아? 바로 동굴 내부에 데려다주고 말야.”
재빨리 주위를 살핀 그는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며 열려있거나 닫혀있는 문들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동천에게는 물리적인 힘이 전혀 없었으므로 닫혀있는 문 같은 경우엔 그냥 고개만 쑤욱 들이밀면 되었다. 그렇게 몇 번 들락날락 거리던 그는 한 곳에서 강인한 인상의 노인을 발견했다. 당연히 호기심이 동한 동천은 혼백이 사물을 지나치듯 닫혀있는 문을 통해 자유롭게 들어갔다. 노인은 자못 흥분해있는 상태였는데, 흥분한 상태에 비해 차분한 손놀림으로 책자에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동천은 당당하게 걸어가 글의 내용을 읽었다.
“에…, 실로 놀랍다. 인면지주(人面蜘蛛)가 본좌의 손에 들어오다니. 인면지주? 머리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거대한 거미를 말하는 건가? 그게 사람 얼굴을 하려면 적어도 이 천년은 지나야 한다던데? 뭐 어쨌든 계속 읽어보자. 최고의 독성을 자랑하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음기를 지니고있는 인면지주가 본좌의 손에 들어오다니. 에이 씨, 잡았으면 잡은 거지 뭘 그렇게 잡았다고 강조하는 거야? 빨리빨리 넘어갈 것이지.”
동천이 씨부렁거리는 사이 노인의 손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번 아홉 번째 실험에 임한 결과, 막대한 음기를 보충한 실험체는 불사강시에 다다랐다. 쳇, 불사강시 가지고 뭘 그리 호들갑을……, 뭐이? 부, 불사강시?”
깜짝 놀란 동천은 책자에 부딪힐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노인의 손은 계속 글을 쓰고있었으므로 마치 동천의 머릿속을 휘젓는 형국이 되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 고개를 뒤로 물린 그는 어느 정도 쓰여진 부분을 마저 읽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아, 여기다. 헌데, 그 막대한 음기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을 깨트리다니. 그것이 바로 음성만기지체의 힘이란 말인가? 정녕 의지가 뚜렷하면, 그 신체의 소유자는 세상의 어떠한 음기라도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쳐간다. 본좌는 불사강시의 비법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싶다. 또 다른 음성만기지체라면 본문의 역사에 한번쯤은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제 명령만 내리면 된다. 아니, 본좌의 손으로 처분하기만 하면 끝이다. 에에 또…, 좀더 빨리 써보라고.”
동천의 재촉에 힘입어 노인의 손놀림이 빨라지려는 듯 했지만 문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그 움직임이 멈추었다.
“밖에 누구냐.”
“소인 금환경(金幻境)입니다.”
금환경은 만독문에서 차출되어온 간부 중에 한 명으로서 다섯 번째 당주를 맡고있는 자였다. 이를 알 리가 없는, 아니 알았다해도 별 상관하지 않았을 동천은 심히 못마땅한 눈으로 비리비리하게 생긴 늙은이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봤다. 그 때문에 글씨가 멈추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의 폐기 문제 때문에 찾아온 것인가?”
금환경은 고개를 조아렸다.
“당초에는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사오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노인은 눈을 번뜩였다.
“달라졌다?”
“예, 문주님.”
동천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을 했다.
“범상치 않은 늙은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문주 자리를 꿰차고있는 영감이었군.”
그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금환경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놈이 반항하는 것을 누그러뜨리려고 이미 멸문시킨 형산파를 아직도 건재한 것처럼 속여 사그리 쓸어버리겠다고 위협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실제로 효과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강시로 만들어질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는 어째서 꺼내는 겐가?”
금환경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듯 진한 웃음을 띄웠다.
“아주 우연히 얻어진 결론인데, 이번이 마지막 실험이 될 것을 예견한 삼 당주께서 깨어난 운성현에게 형산파의 멸문을 일러주시고 너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문주는 대뜸 화를 냈다.
“무어라? 감히 당주의 신분으로서 본좌의 허락도 없이 입을 놀렸단 말이냐!”
금환경은 기세에 눌려 쩔쩔맸다.
“아, 아니 제 말은 그것이 아니라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는 듯 싶습니다.”
문주는 벌떡 일어난 자세에서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자세히 말해보게.”
금환경은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문을 이었다.
“예, 그랬더니 충격을 먹고 실신한 그 녀석은 깨어난 뒤 자신의 소원 한가지를 들어준다면 대법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그, 그것이 정말인가?”
문주는 앉은 보람도 없이 다시 일어섰다. 이제야 이야기의 끈이 풀리자 금환경의 얼굴이 밝아졌다.
“물론입니다. 이제 문주님께서 나서신다면 더 이상 불사강시도 꿈이 아니게되는 것입니다.”
흥분한 문주는 쓰고있었던 책을 갈무리하고 앞장섰다. 분위기에 동화되어 저도 모르게 흥분한 동천은 재빨리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 막다른 철문에 다다른 문주 일행은 미리 기다리고있었던 삼 당주 겸상(兼尙)의 안내를 받아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중앙에는 초췌한 얼굴의 사내가 앉아있었는데 여자 꽤나 울릴만한 미남형이었다. 그것은 동천이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인간이라면 그런 것을 따지지도 않지만 말이다.
“운성현, 문주님께서 오셨거늘 어찌 예의를 표하지 않느냐.”
삼 당주 겸상의 질책에 운성현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심정을 표현할 만치 가벼운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사죄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문주는 웃음 띈 얼굴로 운성현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됐네, 내 어찌 자네에게 사과를 받겠나. 아무쪼록 이 못난 수하의 잘못을 용서하고, 우리 본론으로 들어가세.”
“훗, 급하셨군요. 하지만 저 또한 그 못지 않으니 그러기로 하지요.”
동천은 마치 자신이 문주인 양 거만하게 마주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여기에서 꿈이 끝나면 기분 더러울 테니 어서 시작해보자.”
바로 이어서 동천의 앞을 지나친 문주가 말했다.
“듣자 하니 자네가 한가지 소원을 원했다면서?”
운성현의 안면이 약간 꿈틀거렸다.
“그렇습니다.”
“허허, 기탄 없이 말해보게나. 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운성현의 눈에 미약한 살기가 어렸다.
“문주님의 목숨을 원해도 말이오?”
순간 문주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신분에 어울릴만한 인내심을 지니고 있었다. 도리어 겸상과 금환경이 화를 내자 문주인 그가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군. 허허, 다시 정정하여 말해줌세. 본좌의 목숨을 노리지만 않는다면 그 어떠한 소원도 들어주겠네. 이제 됐는가?”
운성현은 차디차게 대답했다.
“됐습니다. 그럼 제 소원을 말하지요. 형산파를 그러니까 본파를 재건해주겠다 약속하시면 문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동천은 뒷짐을 진 문주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문주는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단 말이지? 정녕 형산파를 재건해준다면 대법에 순응하겠단 말이 지?”
운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건 하나를 추가시켰다.
“그렇습니다. 재건한 본파가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때까지 재정적 지원을 해주시고, 훗날 아무 간섭도하지 않겠다고 약조해주십시오.”
문주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은 곤란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간섭하지 않겠다는 문제는 들어줄 수 있지만 재정적 지원을 그렇게까지 해달라는 조건은 좀 어렵겠군. 실로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니 말일세. 다만 재건시킨 형산파의 위세가 예전의 반 정도까지 이르렀을 때, 그때가 되었을 때까지 지원을 해줄 수는 있네. 이만하면 되겠는가?”
운성현은 급조된 추가 사항치고는 제법 성과를 올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문주는 기뻐하는 얼굴로 운성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하, 자네의 결단으로 인해 앞으로 재건될 형산파는 그 위명을 다시 떨칠 수 있을 걸세. 그날이 멀지 않았음이야!”
문주의 곁에서 득의의 웃음을 짓고있던 겸상이 앞으로 나섰다.
“축하드립니다, 문주님. 실로 만독문의 경사입니다.”
“뭐? 만독문? 니들이 만독문의 인간들이야?”
동천이 놀라 그렇게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서로들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잠깐 떨어져 혼자 생각을 정리하려던 동천은 닫혀있는 철문에서 웬 사내가 튀어나오자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뭐, 뭐야! 통과했어?”
그렇다. 동천이 잘못 보았는지는 몰라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도 아무 저항 없이 물체를 통과한 것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상대는 밖에서 보았던 그 중년인이었다. 그제야 동천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들어오는 것을 못 봤구나. 하여튼 저 자식은 아까부터 사람 깜짝 놀라게 하고 지랄이야.”
그렇게 동천도 놀랐지만 그 못지 않게 내부의 다른 사람들 또한 중년인의 등장에 놀라했다.
“누구냐!”
“네놈은 어찌 이곳에 들어왔느냐!”
삼 당주와 오 당주가 기세 등등하게 나섰지만 정작 중년인은 그들을 무시하고 대뜸 문주에게 물었다.
“네가 이번 만독문의 문주인 관성(瓘晟)인가.”
이제야 이름이 밝혀진 관성은 자신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나타난 불청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본좌의 신분을 알면서도 하대를 하다니, 그 배짱만큼은 칭찬해주마.”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상당한 진노(震怒)가 깔려있었다. 그의 분노를 예측한 듯 오 당주 금환경이 나섰다.
“문주님! 저 오만 방자한 놈을 제 손으로 처분하게 해주십시오!”
금환경보다 사람 볼 줄 알았던 겸상이 같이 나섰다.
“제가 오 당주를 도와 손을 쓰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문주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볼 겸 수하들의 청을 승낙했다.
“좋다. 그러나 한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겠다.”
“존명!”
중년인에게 신형을 돌린 두 사람은 좌우로 갈라서서 천천히 다가갔다. 절로 긴장한 동천은 좀더 자세히 지켜보기 위해 그들의 대치 사이에 끼여들었다.
“아까 전처럼 손만 뻗어서 승부를 끝낼까? 그럼 시시할 텐데.”
동천의 궁금증은 두 당주들의 신속한 선제공격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 그들의 검과 도가 절묘하게 상하를 치고 들어오자 동천은 생각했다.
‘분명 뒤로 물러나겠지? 그렇지 않고는 나 죽여주쇼, 하는 거니까.’
그러나 중년인은 되려 앞으로 마주쳐갔다. 이에 동천은 생각을 바꾸었다.
‘음, 생각보다 대단한 내공을 지녔나 보구나. 분명 신법으로 저들의 공격을 흘리거나 내공을 사용해 퉁겨낼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는 나 죽여주쇼, 하는 거니까.’
대충 상식적인 예상을 했지만 중년인은 동천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그는 겸상과 금환경의 공격을 무시한 것이다. 이해하겠는가? 피하거나 막아내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당연히 당주들의 검과 도는 중년인의 몸통을 꿰뚫었고 그들의 얼굴에서도 만족스러움이 드러났다. 그러나 양손을 펼쳐든 중년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들의 목을 휘어잡았다.
‘어, 얼레? 안 죽네?’
동천의 놀람을 뒤로하고 겸상의 답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 어, 어떻게?”
이것은 분명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뒤이어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목으로 파고든 중년인의 손은, 완전히 파묻혔다고 생각한 순간 아무 상처도 입히지 않고 그대로 꿰뚫고 지나간 것이었다.
우둑, 우두둑!
“커억!”
“끄어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의 목에는 전혀 상처가 없었다. 그러나 기분 나쁜 소리의 정체는 분명히 드러났다. 중년인의 양손에 들려있는 뼈마디. 피로 얼룩진 뼈마디는 바로 목뼈였던 것이다. 소름이 끼친 동천은 재빨리 쓰러져죽은 당주들을 살폈다. 그들의 머리는 흡사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아무렇게나 돌아가 있었다.
“히익?”
다리를 후들거리던 동천은 마침내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사, 사술이다!”
동천과 비슷한 생각을 한 만독문주 관성은 진땀으로 얼룩져있었다. 그는 말투를 달리해 물었다.
“분명 수하들의 무기가 관통했거늘, 본인의 착각이오?”
중년인은 양손에 쥐고있던 것들을 버린 후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네 눈은 정확했다.”
관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면, 그것도 무공이란 말이오?”
중년인의 얼굴에 묘한 비웃음이 일었다.
“무공? 어째서 본좌의 능력을 견식한 것들은 전부 무공이라고 믿는 것일까?”
관성은 미간을 모았다.
“무공이 아니란 말이오?”
중년인은 선심 쓰듯 말해주었다.
“굳이 말하자면 염동술(念動術)이라고 해야겠지.”
“염동술? 처음 들어보는걸?”
중년인이 다시 말했다.
“설명해주자면 이러한 것이다. 네가 전개한 독은 지금 내 몸 안에 상주해있다. 맞느냐?”
관성은 놀라는가 싶더니 태연하게 대꾸했다.
“맞소, 본문의 장로 정도 되어야 취급할 수 있는 만장탈혼산(萬丈奪魂散)이라는 것이오. 일단 그것에 중독 되면 내공이 흩어지고, 급기야는 뼈마디가 녹아버리는 지독한 극독이라오.”
“좋다. 어쨌든 그 탈혼산은 내 몸 안에 있다. 보통 무림인 같으면 허락되는 내공으로 그것을 제압할 것이오, 내공이 허락하지 않으면 밖으로 몰아낼 것이오,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면 해독약을 얻을 때까지 내부의 어느 한곳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외는 당하는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물론이오.”
“헌데, 나의 염동술은 다르다. 모든 것은 의지로서 이루어지지. 가령 내가 몸 안의 탈혼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의지로서 탈혼산만 놔두고 몸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관성, 이해하겠느냐?”
관성은 그것의 결과를 생각하기도 싫은 듯 말했다.
“좀 어렵구려.”
그러자 중년인은 눈을 돌려 관성 뒤의 운성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떠하냐.”
잠깐 흠칫한 운성현은 중년인에게서 희망을 보았는지 다소 들뜬 어조로 답했다.
“어르신께서 움직이신다면 만장탈혼산은 어르신께서 움직이기 전의 그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으리라 예견되옵니다.”
중년인은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