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497화
수면(水面)의 파장(波長).
역천은 요새 한가했다. 그러나 한가한 육체와는 달리 마음만은 조급함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방안에서 빙글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째서 소식이 없지? 이것들이 급료를 적게 준다고 톡 쳤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랬다간 즉결 처분이니까. 워낙 답답한 마음에 그도 그냥 지껄여본 것이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첫 달에 소식이 끊겼을 때 수소문을 하는 건데…. 좀더 기다려보자는 생각에 시기를 늦추었더니 이놈의 망할 지부 놈들이 도저히 못 찾겠다고 소식을 보내오네? 콱, 치료해준답시고 병신을 만들어버릴까보다.”
저 혼자 울분을 터트리던 역천은 갑자기 깜짝 놀라더니 침대로 가 누웠다. 그리고 매향이를 부르자 조심스레 들어온 매향이는 역천의 얼굴에 오이마사지를 해주었다.
“자고로 피부미용에는 시간 엄수가 필수조건이지. 아암!”
자랑이다.
“아가씨, 아가씨!”
수련이 급박한 어조로 들어오자 눈을 감고 앉아 명상에 몰두하던 사정화는 그 아름다운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끄럽구나.”
수련은 개의치 않고 재잘거렸다.
“아이 참? 시끄럽고 씻으러가고 뭐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오늘 주인 어른께서 출관을 하신대요!”
사정화는 오랜만에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눈을 뜨진 않았다. 그녀는 다시금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이었나.”
수련은 새침한 표정으로 사정화의 말투를 따라했다.
“오늘이었나, 가 아니라 이럴 때는 좀더 놀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자, 같이 놀라자구요. 앗? 오늘이었니? 이렇게 말예요.”
사정화는 천천히 일어났다.
“말이 많구나.”
익숙하게 길을 비켜준 수련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수라비연동(修羅飛然洞)에 가보실 거죠? 밖에 역천 할아버지하고, 청목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다고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물 흐르듯 걸어가던 사정화는 약간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아버님께서 내게 볼일이 계시다면 이곳으로 찾아오실 것이다. 굳이 갈 필요는 없으니 그들에게는 그렇게 전하거라.”
“그래도….”
사정화는 매섭게 수련을 노려보았다. 찔끔한 수련은 더 이상 어찌해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에휴. 역천 할아버지와 청목 할머니께는 반드시 모시고 나오겠다고 했는데, 이제 어쩌지?”
역천과 정원에게 호언장담했던 수련은 막상 별 소득이 없자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걱정되었다. 밖으로 나온 수련이 아가씨의 이야기를 전달해주자,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못마땅해하는 눈초리가 강렬하게 그녀의 온몸을 콕콕 쑤셨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다짜고짜 그녀를 구박했다.
“이것아, 책임지겠다며!”
“요 망할 년, 네년의 그 가벼운 주둥이를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지.”
수련은 그 동안의 무공 실력을 발휘해 빨빨거리며 도망쳤다. 조금 멀어졌다싶었는지 신법을 멈추고 소릴 질렀다. 동천이 잘 써먹는 수법이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요! 모든 일이 뜻대로만 된다면 그게 어디 세상일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나름대로 거리계산을 하고 나불거린 것이었지만 역천과 정원에게는 발 한번 뻗으면 닿을 거리였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련의 앞에 도달한 정원은 재빨리 그녀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켈켈, 요년아. 이 기회에 주둥이의 무게를 늘려보거라.”
수련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도망쳤다.
“꺄악! 수련 살려!”
“거기 서 요년아! 켈켈켈.”
역천은 수련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정원을 바라보며 남의 일 말하듯 중얼거렸다.
“쯧쯧,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군. 이거야 원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도 아니고. 아아, 이 몸은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역천의 말이었다. 어쨌든 잠시 소동을 피운 후 수라비연동으로 향한 역천과 정원은 부교주의 호위대인 사혼대 중 일혼에게 물었다.
“오늘 출관하신다고 기별이 왔는데 아직 이신가?”
일혼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출관은 이미 하셨고, 지금은 씻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작은 정자로 안내된 그들은 차분히 부교주를 기다렸다. 시간을 맞춰 잘 왔는지 반각 정도가 지나자 사비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역천과 정원은 사비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했다.
“아니, 어찌된 일이십니까?”
“여위셨습니다. 혹, 폐관 수련 중 잘못되시기라도.”
그들은 말라도 너무 말라있는 사비혼의 모습에 당황한 것이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움푹 꺼진 그의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음침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겉모습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품만큼은 변질시킬 수가 없었다.
“허허, 그리도 이상하게 보이는가?”
실수를 인식한 그들은 급히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사비혼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시간이 흘렀으면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헌데 딸아이가 안 보이는군.”
역천과 정원은 찔끔 고개를 수그렸다.
“그, 그것이.”
어느 정도 짐작한 사비혼은 손을 내저었다.
“됐네. 그 아이의 성품으로 볼 때 그럴 만도 하지. 우선 자리에 앉게.”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비혼은 역천과 정원이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있자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 자네들만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그간의 일들을 자세히 들어보고자 함이네. 이제 딸아이의 나이가 열 넷이니, 교주위(敎主位)를 물려받을 시기는 4년에서 5년이 남았네.”
역천과 정원이 자못 흥분된 음성으로 동시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암흑마교의 교주 자리는 열화마가와 수라마가가 번갈아 대통을 이었지만 그 자리를 내주는 시기에 있어 초기에는 분란의 소지가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언제 물러나나 싶어 손가락만 빨며 기다려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4대 교주 때 정해진 것이 나이를 칠십을 제한하고 다음 교주위를 잇는 자는 부교주가 아닌 부교주의 자식, 혹은 손자 손녀가 잇는 것으로 공표 되었다. 비록 여인이 교주가 된 적은 역대 단 한번밖에 없었지만 전례가 있는지라 사비혼의 힘이라면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지금 교주의 나이가 66세이니 적어도 4년 정도가 남은 셈이었다. 지금 사비혼은 그것을 말하고있는 것이고 말이다.
“본가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아직 변함이 없는가?”
정원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켈켈, 물론입죠. 그들이 지금의 자리를 고수하게 된 배경에는 부교주님의 은공이 컸거늘, 감히 다른 마음을 먹겠습니까?”
정원의 말을 끝으로 사비혼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지자 역천의 입이 떨어졌다.
“저 또한 그렇게 알고있습니다. 헌데 교주 측에서 4년 전, 난데없이 절강성에 분타를 세우겠다며 거액을 움직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사비혼은 관심을 보였다.
“그 이야기라면 본좌도 들었네. 하지만 일혼에게 듣기로는 계획 없이 추진한 일이 아니라던데?”
역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면상으로는 절강성의 동태를 감시하자는 것이었지만 그 정도는 그곳에 상주한 하위 정보 가문들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감시 목적이었던 그곳이 만독문과의 결전 전초기지로 변하고있습니다. 물론, 그쪽에서 먼저 비위를 거슬렀다면 충분히 이해를 하겠으나 아무래도 걸리는 것이 있어…….”
역천이 말끝을 흐리자 눈치 빠른 사비혼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건 나중에 시간 날 때 듣기로 하겠네. 그보다 교주께서는 폐관 수련을 마치셨는가?”
“예, 한달 전쯤에 폐관 수련을 마치셨는데 며칠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타를 하셨습니다.”
“어디로 말인가.”
“그게….”
역천은 더 이상 아는 게 없는지라 주춤거렸다. 약왕전은 그 특성상 힘을 키울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비혼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약간 멋쩍어하며 정원에게 물었다. 정원은 대답했다.
“귀주(貴州)으로 향하셨지만 워낙 삼엄하고 넓은 경계망을 펼쳐놓아 아랫것들이 차마 뚫고 쫓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좀더 실력 있는 녀석들로 파견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 이목에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쓸데없이 일이 커질 것만 같아 그 정도로 그쳤습니다. 지금이라도 명하시면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움푹 꺼진 눈을 가늘게 뜬 사비혼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됐네, 지금쯤이면 볼일을 다 마쳤을 테니 나중에 은밀히 귀주 분타주를 시켜 알아보기만 하게.”
“켈켈, 알겠습니다.”
정원의 대답이 끝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사비혼은 정자를 걸어나오며 말했다.
“내 오늘 저녁에 각 수뇌부들을 볼 것이니 그렇게 전갈을 띄우게.”
대답은 역천이 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정원은 같이 뒤따르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처소로 드시겠습니까?”
우뚝 멈춰 선 사비혼은 의미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딸아이를 한번 보고싶군.”
“아가씨, 아가씨!”
수련이 급박한 어조로 또다시 들어오자 겨우 차분한 마음으로 명상에 잠기게되었던 사정화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조로 말했다.
“네 그 경박함은 아무래도 병인 것 같구나.”
수련은 개의치 않고 재잘거렸다.
“아이 참? 병(病)이고 병(甁)이고 뭐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지금 주인 어른께서 찾아오셨다구요!”
사정화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수련이 원하던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빨리도 오셨군.”
수련은 새침한 표정으로 사정화의 말투를 따라했다.
“빨리도 오셨군, 이 아니라 이럴 때는 좀더 놀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자, 같이 놀라자구요. 앗? 벌써 오셨니? 이렇게 말예요.”
사정화는 천천히 일어났다.
“알겠으니 그만 하거라.”
수련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너무 맨 얼굴이신 데 화장이라도 해드릴까요? 아참, 주인 어른을 만나러 가는 것과 그것은 별 상관이 없나? 그래도 말 나온 김에 해드릴까요?”
사정화는 뚝 멈추어 말했다.
“참으로 말이 많구나. 다 큰 처녀가 그렇게 말이 많아서야 누가 너를 데려가려 하겠느냐.”
기분이 상한 수련은 입술을 대뜸 내밀었다.
“그렇지도 않을 걸요? 주위의 아저씨들이 절 얼마나 귀여워 해주시는데요. 아들이나 손자의 신부 후보감 첫 순위가 저라니까요? 뭐, 전 이미 점찍은 사람이 있어서 거들떠도 안 보지만 말예요.”
“그래서…, 앗? 아가씨!”
사정화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들을 가치가 없자 볼 것도 없이 먼저 나간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재빨리 따라나간 그녀는 수련동의 입구 안쪽에서 잠시 서있는 아가씨를 볼 수 있었다. 햇빛에 익숙해지려는 것이었다. 일각 정도를 그렇게 서있던 사정화는 여전히 감은 눈으로도 잘도 거처를 찾아갔다. 물론 거기에는 그녀를 뒤따르며 방향을 제시해준 수련의 덕이 컸지만 말이다.
“아이 참? 거기가 아니에요! 좀더 옆으로. 더 왼쪽으로요! 아니, 거기를 지나치시면 안 되죠! 내참, 제 말을 듣고는 계신 거예요?”
멀리서 사정화를 뒤따르던 호위대는 그런 수련의 행동에 ‘저러면서도 안 죽는 게 용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수련의 덕이 컸다.
“이곳인가?”
암흑마교 교주인 냉소천의 물음에 마차를 세운 가는 눈썹의 노인은 힘 있게 대답했다.
“예, 교주님. 이제 다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범정산(梵淨山)에 도달하시려면 이 마차로는 더 이상 무리입니다. 천천히 행보 하시면 이틀이 걸리옵고, 귀찮으셔도 힘을 쓰시면 한 시진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어쩌겠냐는 물음이었다. 냉소천은 느긋하게 자신을 보필하고있는 또 한 명의 노인에게 물었다.
“염홍(廉紅). 현아의 서찰로 보면 중대한 일인 것 같긴 한데 자네는 어떠한가.”
흑의를 걸치고있던 노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모든 일에는 확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래그래, 힘을 좀 써보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냉소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산세가 험준하기로 소문난 귀주에서 손꼽히는 범정산 쪽을 바라보았다. 절로 낮은 휘파람이 나왔다.
“이런 곳인데 처음의 수색대는 그곳을 잘도 찾아냈군.”
적의(赤衣)를 입은 가는 눈썹의 노인은 뒤따라온 몇몇 수하들에게 마차를 맡긴 뒤 냉소천을 안내했다. 주위의 경물(景物)들을 밀어내며 막힘 없이 쭉쭉 나아가던 그들은 예측했던 시간보다 약간 빠르게 범정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멈춰선 냉소천 일행은 다소 거칠어진 숨결을 진정시켰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들어가시죠.”
그들은 세찬 바람이 불어닥치는 협곡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자 경계를 펼치던 무사 넷이 튀어나왔다.
“누구냐?”
염홍은 패를 들어 보여주었다. 그제야 냉소천 일행의 정체를 파악한 그들은 급히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소인, 교주님과 장로님들을 뵈옵니다!”
“교주님과 장로님들을 뵈옵니다!”
적의의 노인은 차갑게 명했다.
“가서 소교주님께 전갈을 띄워라.”
“조, 존명!”
그들을 뒤따라가자 얼마 안 있어 냉현과 흑혈이살이 그들을 영접했다.
“오셨습니까, 아버님.”
“교주님과 사부님들을 뵈옵니다.”
그리고 꼽사리로 나온 총감독관 서당주(西堂主) 선호균(宣虎菌)이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오시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 점을 용서해주십시오.”
냉소천은 인사치레로 괜찮다고 대답해주었다. 아들의 인도를 받아 동굴의 내부로 들어간 그는 처음 와본 곳이라 그런지 가슴이 뛰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주라는 신분답게, 겉모습만으로는 어떠한 심중을 품고있는지 그 진의를 파악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내부로 들어가며 아들인 냉현에게 기관장치의 발동과 제어부분을 꼼꼼히 들었지만 정작 냉소천은 새겨듣지 않았다. 그가 다시는 이곳에 찾아올 이유가 없을뿐더러 이러한 것은 대동하고 온 장로들이 다 알아서 숙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복잡한 기관장치들을 눈여겨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냉현에게 있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 모든 것들은 지나치듯 보아도 아주 훌륭하다. 만약 이 아비라 해도 사전지식이 없다면 아주 위험할 것 같구나. 허나, 네가 이 시기에 아비를 부른 것은 고작 이러한 것을 선보이기 위함이 아닐 터.”
냉현은 설명을 그치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서찰에는 아주 중대한 일이 벌어진 듯했는데 내부는 너무도 조용하구나. 어찌된 일이냐.”
아들을 바라보는 냉소천의 눈빛은 대답 여하에 따라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각오를 해야할 것만 같은 차가움이 담겨져 있었다. 그 눈빛에 냉현의 얼굴이 굳어지려는 찰나 냉소천의 안광이 불을 내뿜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장로들이 냉소천을 호위했다.
“거기 누구냐!”
그의 시선이 멈춘 좌측 통로에는 청수한 용모의 노인이 기척 없이 서있었다. 아무도 느끼지 못한 사이, 불과 지척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냉소천과 장로들이 눈치챘으니 망정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뒤늦게 알아차렸을 것이 분명했다.
“허허, 역시 암흑마교의 교주와 선대의 흑혈 이살답구려. 본인의 기척을 이리도 빨리 잡아채다니.”
노인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냉소천 일행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나 놀라긴 했어도 냉현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지 경계하는 태세가 아니었다.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냉소천은 가늘게 입술을 뗐다.
“저분은 누구시더냐.”
냉현은 뒤이어 벌어질 상황을 즐기려는지 느긋하게 가르쳐주었다.
“제가 아버님을 이곳으로 청한 이유는 바로 저분 때문입니다. 이곳에서의 대화는 좀 그런 것 같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신 후 인사를 나누시죠.”
냉소천은 적의(敵意)를 가라앉히고 냉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가슴이 철렁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기에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도록 하마.”
은연중 서로를 경계하며 통로를 걸어간 냉소천과 노인은 경비가 삼엄한 곳에 이르러 잠깐 멈추었다. 무사들이 허리를 숙이고 길을 터주자 비교적 넓은 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님, 이곳은 괜찮지만 나중에라도 주위의 것들을 만지는데 있어 주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하나 위험한 것들이니까요.”
“으음, 그러마.”
아들의 당부를 받고서야 자리에 앉게된 냉소천은 마침내 베일에 가려져 있던 노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뭣이? 당신이 그!”
주먹이 으스러져라 거머쥔 냉소천은 하마터면 교주의 위상을 무너뜨릴 뻔했다. 진정한답시고 이를 악물었지만 안면이 꿈틀거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허, 본인이 틀림없으니 의심일랑 거두어주시기 바라오.”
냉소천은 단어 하나 하나를 분해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의심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소? 내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하니, 걱정일랑 거두어주시기 바라오.”
노인은 상대가 자신과 비슷하게 받아치자 뜻 모를 웃음을 머금었다.
“좋소, 좋소. 워낙 두문불출하시는 분이라 이렇듯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본 제갈(諸葛) 모(某)는 피할 생각이 없소이다. 교주께서는 어떠하시오?”
냉소천은 잠시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심기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우선은 맞장구를 쳐주고 중대사는 천천히 결정하는 것이 최선책이리라.’
“이 냉 모는 이렇게 귀하신 분을 뵌 것만으로도 운명이라고 봅니다. 그전에 잠깐….”
제갈 노인에게 양해를 구한 냉소천은 모두에게 나가라는 전음을 띄웠다. 모두가 물러가는 와중에 장로들이 남아있기를 자청했지만 냉소천으로서는 허락할 수가 없었다. 수뇌부끼리의 중대사에 상대가 혼자 왔거늘 어찌 그가 호위를 둘 수 있겠는가. 이는 예의가 아닌 것이다. 마침내 모두가 물러가고 단둘이만 남게되자 노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간은 넓거늘 그에 비해 둘 뿐이니 조금 어색하구려.”
“그러시오니까? 저는 신기(神奇)께서 너무도 커 보여 그런 느낌을 못 받았소이다.”
“허허, 너무 추켜세워 주시는구려.”
제갈 노인은 이야기가 겉돌고있자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실로 의외였을 것이요.”
냉소천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그렇소. 이곳 천마동(天魔洞)에서 제갈여휘(諸葛呂揮)님을 보게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신기 제갈여휘. 신무제(神武帝) 우연승(宇沿昇)과 더불어 정도의 지주로 불리는 자. 24-5년 전 홀연히 사라져 수많은 의혹을 낳았고, 제갈세가의 위세를 황룡세가에 건네주게 만든 바로 그 장본인. 그런 그가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냉소천과 눈을 마주친 그는 빙긋 웃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소. 천마동의 내부를 개조하고있는데 난데없이 구멍을 뚫고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소. 예전부터 의심은 해왔었지만 설마하니 천마도해가 두 장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두 장이 합쳐져야만 완전한 의미로 천마동이 되는 것일 줄이야. 훗, 우연이라고 하기엔 조금 냄새가 나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따르고싶은 것이 이 제갈 모의 심정이라오.”
눈을 크게 뜬 냉소천은 침중한 신색으로 붉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으음, 역시 두 장이었나? 이것 참, 내 너무도 모른 채 제갈여휘님을 대하고있으니 실로 당황스럽군요.”
제갈여휘는 여유 있게 말했다.
“허허, 그럴 겝니다. 그럼 지금의 대화를 잠깐 미루도록 할까요?”
냉소천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정확히 반 시진 후에 다시 뵙겠소이다.”
“알겠소이다.”
인사를 나누고 석실을 벗어난 냉소천은 분노한 얼굴로 아들을 찾았다.
“네 이놈, 어찌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놓고 일 처리를 허술하게 했느냐! 서찰에는 신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또한, 또 다른 천마동에 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찰을 띄운 것이냐!”
자존심이 상한 냉현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자, 흑혈이살 중 흑살인 철소가 급히 고개를 조아리고 나섰다.
“고정하십시오. 소교주님께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신기 그자가 이 일의 중요성을 언급하여, 직접 보는 앞에서 쓰셨기 때문에 이곳의 사정은 전혀 전달해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지금의 상황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만일 소교주님께서 보내신 서찰이 중간에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실로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 왔어야 했다. 그렇다면 상세히 적어 보내는 것보단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내용을 간추린 것이 확실히 옳은 판단이었다. 그는 서찰의 내용을 상기시켜보았다.
-일이 차질을 빚고 있음. 아버님께서 직접 오셔야만 해결될 수 있음.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일의 중요성을 볼 때 절대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사안이었다. 이번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신기의 손에서 놀아난 것만 같아 새삼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됐다. 그 동안의 일들을 차근차근 말해보거라.”
그제야 냉현의 입이 떨어졌다. 그는 처음 구멍이 뚫렸던 일을 시작으로 신기의 등장, 그리고 실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유한 상대측과의 교섭. 교섭 내용으로 볼 때 그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자 아버지인 냉소천을 불러야만 했던 일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잘 집어서 설명해주었다.
“흐음, 그랬었구나. 잘했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 기분이 되살아난 냉소천은 아들을 칭찬해주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리석게 행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자리에서 일어난 냉소천은 뒤따라오는 장로들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자 말인데. 예전에 한번 보았을 땐 범접치 못할 기도를 뿜어냈거늘 지금에 와 보니 그 기운도 많이 수그러들었더군. 못 알아봤단 말이야.”
사장로인 염홍이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이십여 년이 지난 탓도 무시할 수 없지만 처음 그와 걸어갈 때는 내내 고개만 갸웃거릴 정도였으니까요.”
냉소천은 맞는 말이라며 오장로에게 물었다.
“경현(硬現), 자네는 어떠한가. 현아가 말해주기 전에 알아보았는가?”
오장로도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역시 익숙하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그 이상은 알아채지 못했었습니다.”
냉소천은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집안 식구라던가 잘 아는 친우가 아니라면,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를 보고도 신기 제갈여휘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할 거란 말이지?”
그는 왠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중에 가서는 그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후후, 푸하하하! 재미있는 세상이야!”
그는 기대에 찬 얼굴로 신기 제갈여휘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