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522화
이야기를 좀더 앞으로 돌려, 동천이 잠을 설치고 일어났던 그 시각으로 돌아 가보자.
“큭큭, 푸훗―!”
주방장 고씨는 눈엣가시인 곽술이가 사라지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손님이라고 할 수 있는 도연이 반대쪽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웃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하는 수없이 그는 통쾌하게 웃는 것을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겁습니까?”
도연이 묻자 기다렸다는 듯 고씨가 반응했다.
“아? 손님께서는 깨어 계셨구려!”
고씨의 우렁찬 목소리에 도연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말 놓으셔도 됩니다. 인연이 이렇게 닿았으니 이 자리에서만이라도 편안하게 지내지요. 성이 고씨인 것 같으니 제가 고 아저씨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오오! 가치관이 뚜렷한 인생이로다!’
도연의 단정됨에 고씨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곽술이도 가치관이 뚜렷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것이 동천처럼 안 좋은 쪽으로 뚜렷했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 그러기로 할까? 하하, 사실 우리 사이에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간 곽술이의 행각은 참으로 지탄받아야 마땅할 짓이었지. 자네에게 미안하고 그걸 먹었던 다른 손님들께도 미안한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그놈이 엄한 사람들에게 그런 음식을 먹였던 것은 아니네. 다 성질이 더럽고 하는 짓이 얄밉고……, 아? 그렇다고 자네 일행도 똑같다는 것은 아닐세. 내 자네 하나만 보더라도 이번에는 그녀석이 뭘 모르고 했던 짓 같으이. 그러니까 웬만하면 용서해주게나.”
도연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힘없는 그분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정당하지 않은 수법으로 남들을 골탕먹였다는 것에는 역시 수긍이 가질 않습니다.”
자신의 됨됨이를 나타내느라 일부러 곽술이를 좋게 말했던 고씨는 도연이 자신의 견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두말 않고 내뱉은 말을 바꾸었다.
“아암, 당연하고 말고! 힘이 없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힘을 키울 생각이나 해야지! 어디에서 감히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안 그런가?”
도연은 낮게 미소하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잠시 침묵이 돌아왔다. 도연은 이쯤에서 잠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자나?”
고씨가 불쑥 말을 걸어오자 도연이 대꾸했다.
“아닙니다. 대화를 나눈 것이 방금 전인데 벌써 잠이 올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하하!”
사실 고씨는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럼에도 대화를 시도한 것은 그 동안 곽술이와 지내면서 일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 입을 다물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만이라도 그 동안의 답답함을 씻어보고자 이렇게 나섰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사실, 이 생활은 고달프기가 그지없다네. 일에서 고달픈 것보다도 타지에 떼어놓고 온 아내와 자식들 때문이지. 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 내 처의 장인 장모님을 같이 모시는데, 그곳에 작으나마 땅 떼기가 있어서 그 땅을 고집하는 장인어른 때문에 같이 오지도 못하고 나 홀로 이곳에 들어왔지. 잘사는 집안도 아니라서 매달 내 월급을 쪼개 부치는 실정인데 그 때문인지 자식들 걱정은커녕 당장에 먹고사는 것조차 빠듯하다네. 내 처는 그분들을 모셔야 하기에 그 곳에 머물러 있고, 아이들이야 두말할 것 없이 아비보다는 어미 밑에서 크는 것이 정서에도 좋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고……. 에휴, 산다는 것이 왜 이리도 고달픈지 모르겠구먼.”
도연은 밝아 보이던 사람의 속내에 이런 고충이 자리잡고있자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주방장의 일이라면 그곳에도 많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곳까지 와서 일을 하게 되신 겁니까?”
고씨는 말했다.
“하하, 그건 말이지. 처음엔 내 실력이 일천하여 당시 그곳에서는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네. 그때는 이런 촌 동네 구석 밖에는 일자리가 없었지. 지금이야 어느 정도 자신감이 쌓였지만 사람 사는 것이 늘 그렇듯 송 대인과 정이 들자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겠더군. 내가 아니면 여기 주점은 당장에 문을 닫아야 하거든. 훗, 그래도 언젠가는 큰돈을 모아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생각이네. 그리고 그 근처에다 아주 근사한 식당을 하나 차리는 게 내 작은 소망이지. 문제는 그럴만한 돈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말일세. 하하하!”
우울하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가서는 개운하게 가셨다. 그 영향 탓인지 도연의 마음도 푸근해짐을 느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개인적으로 정말 오랜만의 일인 것 같았다.
‘왜일까? 이러한 지금의 감정이 막연하게나마 내가 추구해오던 무도의 끝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태강즉절(太剛則折)……. 하나하나 모두가 패도적이지만 대성한다면 그 반대의 결과가 이루어지는 기묘한 신공(神功). 이 무공의 원리는 강(剛)함을 먼저 알아야 유(柔)함을 깨우칠 수 있다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중 오로지 태(太)만이 패도적인 기운을 지니고도 원점으로 회귀하는 방향이 제시되어있는데, 어찌 보면 지금의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태의 기운에 휘둘려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연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원리대로라면 패도적인 쪽을 먼저 따라야 하지만 1초식인 태공압재(太空壓載)와 5초식인 태산중편월(太山中片月)은 패보다 유함을 더 따르는 초식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태 란 원점회귀로서의 조화를 강조하는 것일까? 과연 그런 것일까?’
“…….”
‘하아, 쉽지 않구나!’
도연은 지금 아주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조언자나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 목적했던 무리(武理)의 방향에서 틀어진다면 후일 주화입마로 번지는 수가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야하는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몇 년 전 주군에 의해 깨달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태면 태이지 무얼 더 생각하느냐, 라……. 나는 그때의 가르침으로 오늘날의 경지에 올랐다. 그렇다면 지금 또한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이 옳은 결정이 되는 것일까? 보이는 그대로 본다면…….’
어두운 천장을 올려보자니 그저 어두울 뿐이다. 이는, 밤이기 때문에 지극히 정당한 현상이다. 문득 도연은 자신의 고민과 눈앞의 어둠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아? 어둠은 어둡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지극히 간단한 이치. 이 또한 보이는 그대로 본 것일 뿐이다. 세상에는 깊게 들여다봐야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반대로 쉽게 보는 것이 지름길인 것도 있다. 바로 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 후자에 가까운 것! 도연아, 다시 한번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내 무공은 보이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 태의유장(太意流長), 태장오무(太長汚無), 무무태의(無無太意), 연화평태(連和平太)…….’
도연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려는 가운데 잠잠한 시간이 이어지자 고씨는 입이 근질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은근히 다시 물었다.
“자나?”
“아?”
무아의 지경에 들어섰던 도연은 외부의 소리가 그의 고막을 파고들자 무언가 파삭, 깨지는 듯한 날카로움을 느꼈다. 연쇄적인 반응으로 신형이 움찔거렸고, 한순간 온몸의 기력이 흩어지는 듯한 허무함이 전해져왔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잡힐 듯이 보였던 태의 묘리는 완성형을 앞두고 아쉬움만을 남긴 채 조용히 갈무리되었다.
“후우…….”
도연이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무언가를 느낀 고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내가 자네의 중요한 상념이라도 깨트렸는가?”
고씨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로서는 도연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도연은 그것을 잘 알기에 아무 내색 없이 대꾸해주었다. 다만 어두운 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아저씨의 말을 듣고있자니 제 옛일이 떠올라서 잠시 추억에 잠겼었던 것뿐입니다.”
“하하, 그랬던 것인가? 그래 자네의 어렸을 적은 어떠했는가.”
천하태평 한 고씨가 물음에 도연은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를 시작해서 또다시 읊조려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별로 유쾌한 이야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어쩐지 주군의 경우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알고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망설임이었다. 주점을 침입한 괴한들이 그럴만한 여유를 제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콰앙―!
돌연 방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두 사내들이 난입했다.
“송금은 어디에 있느냐! 네놈이냐?”
“어이쿠!”
너무도 놀라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고씨는 대번에 무림인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살려주십시오, 나리들! 송 대인이라면 이 방이 아니라 맞은편 끝 통로를 따라 들어가시면 안채로 이어지는 그곳에 계십니다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침입자 둘이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한 사내가 먼저 말한 뒤 움직였고, 다른 사내가 그림자 따라가듯 유유히 흘러 방을 빠져나갔다. 황당한 사건을 접한 고씨는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더니 이내 침대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으적으적, 이봐. 네가 송금이냐?”
“으헉?”
어느 사이인가 또 다른 인간이 소리 없이 스며들어와 있었다. 상반신이 창가의 달빛에 비친 상대방은 들어온 속도에 걸맞지 않게 문틈에 끼일 정도로 뚱뚱했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먹고있는지 입술을 오물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놀라기는, 으적으적. 이봐, 네가 송금이 맞냐니까?”
거칠게 씹는 음식물 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고씨는 행여라도 자신이 씹히는 처지가 될까봐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반대쪽 통로로 가셔야합니다!”
잠깐 씹기를 중단한 뚱뚱이는 다시 턱을 움직이며 말했다.
“고놈, 대답 한번 간단해서 좋다. 으적으적, 내 특별히 살려주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부디, 이루시는 바를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뚱뚱이는 웃었다.
“헐헐, 그래야지. 성공해야지.”
고씨의 열렬한 성공기원에 만족을 느낀 뚱뚱이는 약속대로 조용히 사라져주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고비를 넘긴 고씨. 그는 참았던 두려움을 그대로 표출해냈다.
“으으! 이, 이젠 안 오겠지? 제발 오지 마라, 오지마. 괜히 칼맞아 죽고싶지 않다…….”
그것을 본 도연은, 저런 처세술이라면 설사 또 와도 안전하리라. 여겼지만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생각을 대놓고 했다가는 상대에게 크나큰 실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철푸덕―!
“응? 처, 철푸덕?”
흡사 바닥에 패대기쳐진 돼지고기 소리와 비슷하다고 고씨는 생각했다. 아울러 그의 근처로 떨어진 정체불명의 물체는 끈적거리는 액체를 사방으로 튀겼는데, 그 중의 일부를 손가락으로 비벼보자 냄새를 맡을 것도 없이 대번에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컥? 주방장 경력 자그마치 16년! 이,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피다!’
주방장 경력 16년이 사람의 피 냄새를 구분하는 능력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넘어가기로 하자.
‘그, 그러고 보니, 저거 사람 아냐? 저 물체의 모양새가 사람의 몸을 제멋대로 꺾어놓은 형상과도 비슷한 것 같은데? 크윽, 틀림없어! 죽은 놈의 몸을 어떻게 꺾어놓든, 그놈이 아프다고 원상복구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괴상한 결론을 내려놓고 저 혼자 괴로워한 고씨는 퍼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을 해봐야하는 것이다.
“후우, 후!”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 정체불명의 물체를 툭툭 건드려본 고씨는 이내 사람의 시체임을 완전히 확신할 수가 있었다.
“으아… 으아……. 사, 사람이 죽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비명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바닥을 기어갔는데 마음만 앞서는지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양팔만을 허우적거렸다.
‘주, 죽은 놈이 내 발목을 잡아채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앞으로 나갈 수가 없구나!’
바로 그때, 시체를 방안에 내던진 장본인이 입구를 가로막고 고씨의 행동을 노려보았다. 소리 없이 나타난 그 상대는 음유한 기운이 서린 것이 방금 전까지 동천과 대화를 나누었던 날수혈괴였다. 날수혈괴는 고씨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자 그제야 싸늘하게 물었다.
“가기 전에 대꾸부터 해라. 네놈이 송금이냐?”
“하이고, 지금 어르신을 포함한 여러 어르신들! 왜 자꾸 이놈의 방으로만 오십니까요! 송 대인의 거처는 저 반대쪽 통로로 들어가면 되는데 말입니다요!”
고씨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고씨의 방은 주점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였고 송금의 거처는 그와 반대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눈앞에 보이는 방을 먼저 거쳐가게 되는 것이다.
“가르쳐주어 고맙다. 헌데, 이후에 찾아오게 될 놈들이 걸리는군. 만일을 위해 네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는 고씨가 자신의 말을 이해할 겨를도 없이 장난하듯 손을 뿌렸다. 날카롭게 날이 선 날수혈괴의 손끝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고씨의 목 줄기를 노렸다. 그의 몸체는 벌써부터 바깥쪽으로 반쯤 돌아서 있었는데 자신이 실패하리라고는 생각조차 않은 것 같았다.
“멈추십시오!”
다급하게 들린 도연의 목소리는 날수혈괴의 손목을 밀어낸 후에나 들릴 정도로 재빨랐다.
“으응?”
도연 쪽은 생각도 않다가 방해를 받게 된 날수혈괴는 차가운 눈을 했다.
‘생각해보니까 내 이놈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구나. 실력이 제법이긴 하나, 잘 된 일이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하지 않았는가.’
도연의 행동으로 살기가 배가된 그는 지체 없이 손목을 틀어 도연의 두 눈을 찔러갔다. 이는 한번에 죽일 의도가 없는 잔인한 짓이었다. 입가를 씰룩한 도연은 상대의 손을 위로 쳐 올리며 비스듬히 앞으로 나아가 정권을 내질렀다. 날수혈괴는 가히 무시 못할 공세가 느껴지자 한바퀴 몸을 회전하여 물러선 후 예비동작도 없이 어린놈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기본기는 제법이나 너무 정직한 공격이로군! 그런 공격은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깜짝 놀란 도연이 껑충 뒤로 물러섰으나 벽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서지 못했다.
‘큰일났다. 내 주력은 검이거늘, 안일하게도 주군의 방에 놓고 왔구나.’
콰직! 콰쾅!
“놈! 피하지만 말고 처음의 기세를 보여라!”
도연은 좁은 방안임에도 불구하고 용케 피해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애당초 무리에 가까운 발악이다. 고씨로 인해 행동반경 범위가 좁아졌고, 상대가 무시 못할 고수인데 어찌 그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럼에도 도연이 잘 버티고있자 고씨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 대단하구나. 헌데, 뭐가 뭔지 보여야 말이지…….’
어두운 와중이라 재빠른 그들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는 없었으나, 인생을 어느 정도 경험한 사람답게 도연이 자신을 생각해서 구석진 곳으로만 피해 다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곤혹스러워 한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는 곧 무엇을 깨달았는지 나직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구나! 무기가 필요한 것이었어!’
이런 상황에서 거기까지 유추해낸 것을 보면 고씨의 머리도 장식용은 아닌가보다.
‘이런 때에 무림인들의 무기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이다. 어디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어디 무기가 될 만한 것이……. 크윽! 제발 생각나라. 제발!’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주방장인 관계로 자신의 침대 밑에 항상 여분의 식칼을 준비해놓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문제는 그 식칼이 놓인 장소가 괴한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도연이 크게 얻어맞고 나동그라지자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보우하사! 여보! 아부지 어머니! 수일과 순애야! 그리고 장인 장모님! 부디 제게 용기를!’
후다닥, 달려간 고씨는 자신이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몸놀림으로 식칼을 꺼내 도연에게 던져주었다.
“이, 이걸 받게나!”
팍!
식칼은 정확히 도연의 옆구리 쪽에 박혀들었고 주저앉아있던 도연은 없는 것보다 이득인 그것을 재빨리 뽑아들며 일어섰다. 날수혈괴는 그 모양에 피식 웃었는데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린놈이 식칼을 손에 쥐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기세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놀랍구나. 검을 절기로 사용하는 놈이었더냐?”
“헉헉, 그렇습니다.”
시간을 벌어보고자 대답에 응해줬다. 도연은 그 와중에도 짧은 칼로 유리한 초식을 찾아 헤맸고,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태의 2초식인 촌정태천파(寸靜太天破)였다. 촌정태천파는 근접전에 사용하게끔 만들어진 초식으로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위력이 배가되는 초식이다. 비록 검은 아닐지라도 무기가 짧았으니 그만큼 상대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응? 이놈이 벌써?’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날수혈괴는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도연의 호흡이 가지런해지자 서둘러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으로 내리 찍는다는 그의 외호에서 알 수 있듯 날수혈괴(捺手血怪) 모용변(慕容辨)은 손으로, 특히 손끝으로 찍어누르는 것을 절초로 삼는 무림고수였다. 그 중에서도 그는 오지변환수(五指變幻手)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것에 당한 상대는 별다른 흔적 없이 희미한 손가락 자국만 남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네놈의 자질을 보고있자니 아쉽구나. 이 자리에만 없었더라도 훗날 무림에서 한 가닥 명성을 날릴 수가 있었을 텐데…….”
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펼친 날수혈괴는 시간이 없는 관계로 먼저 공격에 들어갔다.
“네놈의 운이 없었음을 탓하거라!”
츄아악!
날수혈괴의 오지변환수는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 그 빛을 발하듯 정확히 다섯 개의 불빛이 되어 도연에게로 날아들었다. 급하게 방어초식을 전개한 도연은 어지러이 날아오는 상대의 공격을 물리치고자 했으나 곧 짧은 식칼의 한계를 깨달았다. 찰나간 그의 어깻죽지에 빈틈이 생겼고, 그것을 놓칠 새라 날수혈괴의 손가락이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크윽?”
도연은 짧은 신음성을 흘렸다. 어깨가 화끈해지는 것이 감각이 없어졌고 급기야는 놓쳐서는 안될 식칼까지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 날수혈괴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손을 내뻗었다.
“이제 그만 죽어라!”
그때 뜻밖의 방해자가 나타났다.
“너나 죽어라!”
“엇?”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한 날수혈괴 모용변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기습이란, 자신에겐 통용되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무림에 발을 들여놓고 기습 한 번 당한 적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섰다고 자부한 요 몇 년간은 기습을 당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벌써 코앞에 다가오다니!’
날수혈괴가 느낀 상대의 공격은 일장 가까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작했다. 앞서 놀라긴 했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아니, 이미 떨어진 것과 다름없는 순간이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초래한 결과였기에 눈앞이 깜깜해졌고(원래 깜깜했지만), 그동안 잊고 지내왔던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어왔다. 그의 인생에 있어 이렇게 죽는 것은 너무도 허무했다. 이성이 마비되고 본능이 앞서기 시작하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크―아아아악!”
갑자기 괴성을 내지른 날수혈괴가 한계 이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끌어올린 내공을 팔뚝으로 흘려보내자 대번에 팔의 움직임이 원활해졌다. 날수혈괴는 다급히 상대의 칼날을 걷어냈고, 워낙에 집중된 내공이자 상대의 칼이 부서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이쿠! 이제는 진짜로 죽었구나!”
절망에 찬 고씨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고씨의 생각대로 날수혈괴의 반격이 시작되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았다.
울컥!
무리한 행동에는 늘 위험이 뒤따르듯 날수혈괴의 기혈 또한 들끓기 시작했다. 팔뚝으로 모인 내공이 통제에서 벗어나자 미친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뛰었다. 일단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난 날수혈괴는 재빨리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의 독문심법을 운용하여 날뛰는 내공을 진정시켰다.
“흐으, 흐으!”
수월치 않은 작업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상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겉으로 보기엔 다분히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 그것을 간파한 도연은 움직이는 게 여의치 않자 기습을 감행했던 상대에게 소리쳤다.
“이, 이때… 빨리 공격을!”
멍하니 부러진 도만 바라보고 있던 상대가 정신을 차렸다.
“아차, 그렇지?”
신속하게 앞으로 전진한 상대는 감히 날수혈괴를 경시하지 못하고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곧이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복부를 강타 당한 날수혈괴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크허―억!”
날수혈괴는 답답한 비명을 내지르는 동시에 한 움큼의 피를 쏟아냈다. 그는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요상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우오오! 아뵤! 와다다다다! 아쵸―오!”